소설리스트

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131화 (131/160)

131화. 잊지 못할 기억

“……저기 자네가 소포니악 집정관 보좌관인 건가?”

레이가 단숨에 술을 마시는 걸 보고 도베는 작은 병에 담긴 시원한 술을 찾아 가져오는 길이었다.

레이가 따로 명령을 내린 건 아니지만 어제 오늘 내내 말이 안 통하던 사람들 속에서 고생했던 걸 알기에 도베는 상사를 위해 뭐라도 하려고 했다.

“네, 맞습니다만.”

도베가 왜 묻냐는 투로 대답하자 스투라 집정관이 손을 휘저으며 대답했다.

“아아.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걸세.”

보통 집정관에게는 보좌관이 잘 붙지 않으니 도베가 누군지 확실히 알고 싶었던 듯했다. 그가 손을 휘적거리며 도베를 보냈다.

“공작 부인이 조금 부족하시니까 보좌관을 붙여 준 거 아니겠습니까.”

“부족이라뇨.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아니, 그게 그러니까 부족이 아니고 힘드시니까, 였는데 말이 헛나갔습니다.”

“루이반 공작님께서 워낙 뛰어나시니 영향을 안 받을 수가 없겠지요.”

자기들끼리 하는 말이지만 같은 공간에서 수군거리면 무슨 말인지 잘 안 들려도 분위기로 읽을 수 있다.

루이반 공작가 사람이니 목소리를 낮추는 걸로 조심하는 듯하지만, 당사자가 같은 곳에 있는데도 저런 분위기를 잡고 험담하는 듯한 대화를 하는 것을 보면 대놓고 레이를 까는 것과 다름이 없다.

60여 명이 모인 대인원이니 자기들이 묻힐 거라고 생각해서 태평하게 이야기를 한 것일 터다. 하지만, 그들의 실수는 도베가 근처에 있으며, 그는 그 누구보다도 바로 옆에서 레이의 능력을 봐 오던 이라는 점을 간과한 것이었다.

그들은 여자 상사 아래에서 일하는 도베가 자존심 상해 하고 불만이 많을 거라 지레짐작하고 그가 이런 소릴 듣든 말든 상관하지 않을 거라 여겼다.

“그건 우리 집정관님이 먼저…….”

루이반 공작이 아니라 우리 집정관님께서 한 것이라고 발끈해서 외치려던 도베가 말을 멈췄다. 여기서 작게라도 소동을 일으키면 그 상사에 그 부하라는 소리 따위나 하며 레이의 평판에 외려 해만 가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 사람들의 수런수런한 공기를 가르는 레이의 명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너무 뛰어나서 내 남편이 영향을 받은 건데?”

도베의 표정과 근처 분위기를 보고 레이는 대강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라비던의 마녀’를 두고 사람들이 연회에서 저런 분위기를 형성하곤 했었기 때문이다.

“휴일도 내가 먼저 시행했고 아이 정서도 내가 먼저 생각했어. 자네들도 알다시피 공작께서 워낙 뛰어나셔서 내가 말하는 게 좋은 일인 거 알고 바로 내 정책을 도입하시더군.”

레이의 발언에 다들 당황한 얼굴을 했다.

지금 무슨 소릴 들은 거지. 반말에, 자네들이라고?

“지금 뭐라고…….”

“그대들이 날 공작 부인이라고 여기고 있으니 그에 합당하게 대화를 하고 있는 건데. 불편한가?”

집정관들이 귀족으로 취급된다고 하지만 굳이 하나하나 따지고 들자면 정식 귀족은 아니다. 파칸도 줄을 세우자면 공작 아래, 후작보다 조금 위 정도의 서열이니 이곳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레이가 확실했다.

“할 말이 있으면 내게 와서 직접 하지?”

레이가 말한 그대로, 저들이 생각하는 그녀의 직함은 루이반 공작 부인이니 그 누구도 그 말을 지적할 수 없었다.

“도베, 네가 들은 이야기를 나한테도 들려주겠니?”

너희 잘못 걸렸어. 내 별명이 뭔지 알아? 라비던의 마녀란다. 그 수도 귀족들을 말로 패고 다니던 게 나라고.

“그게…….”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도베에게 눈빛을 보냈다.

도베는 잠시 머리를 굴렸다.

레이를 무시하는 발언을 하는 저들에게 불쾌감을 느낀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더불어 레이를 비하하면서 그에 소속된 자신도 당연히 함께 비난했을 것이란 건 불을 보듯 뻔했다.

도베는 눈앞에서 듣는 자신의 험담을 그냥 넘길 대인배가 되진 못했다. 그런 데다 지금 현장 최고 권력자의 직속 부하였다. 본 소속인 헬라 파칸은 이 사태에 해당하지 않으니 자신이 신경 쓸 만한 일은 어디에도 없었다.

“저에게 보좌관으로서 부족하신 부분을 힘껏 도우라는 취지로 말씀하신 것뿐, 별말씀 안 하셨습니다.”

도베는 말을 돌려 예쁘게 포장해 고했다. 그냥 들으면 정말 별말 아닌 의미겠지만 수도 귀족들 사이에서 저런 식으로 포장된 욕은 일상다반사였다. 레이는 도베의 예쁜 포장지 속 진실을 어렵지 않게 바로 알아들었다.

“누구야? 어떤 분이 나한테 부족해서 보좌관을 붙였다고 했어? 빨리 고백해.”

루이반 공작이 아내 아끼는 걸로 수도에서 그렇게 유명하다 들었다. 그 아내가 지금 화가 난 상태고 루이반 공작은 지금 이 자리로 달려올 수 있는 지척에 있다는 사실에 다들 겁을 먹고 잔뜩 얼었다.

“그런 망발을 지껄이는 건 어디서 배워 오셨는지. 그대들은 내가 우습습니까.”

“절대! 절대 그런 게 아닙니다.”

“잘 보좌하라고 한 말인데, 공작 부인께서 곡해하신 것 같습니다.”

“저흰 그저 걱정이 되어…….”

“맞습니다. 공작 부인께서 혹 어려움이 있으실까 봐 걱정스러운 마음뿐입니다.”

레이가 방긋 웃었다.

“열아홉 살 집정관에게도 안 하던 걱정을?”

그러는 자기들은 이런 일 하다가 당선이라도 되었던가. 자신들도 처음엔 그저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했었을 거면서.

“필레가 내팽개친 일이 너무 많은 탓에 처리를 부탁하면서 헬라 파칸이 붙여 준 겁니다. 15년짜리 일감, 치워 봤어요?”

15년 동안 필레가 싸지른 똥을 치우느라 정신없는 사람한테 걱정이니 뭐니 하는 소리나 하며 깔보고 있는 모습이라니.

당연하게도 저들은 레이의 말에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공작 부인을 화나게 만들었다는 점을 떠나 정말로 반박할 말이 없기도 했다.

“당장 코앞에 있는 회의 안건에 맥락 파악도 안 하고 허튼소리만 하시는 분들이 남의 일 평가는 참 잘도 하십니다.”

레이는 시원스레 지적했다. 수도에 있으면서 자주 얼굴 볼 사람들을 상대로도 잘 싸웠는데 노 아르망 때나 어쩌다 한두 번 만날 사람들이야 두려울 것이 없다.

“그리고 나는 공작 부인이 아니라 집정관으로 이 자리에 있는 겁니다. 이 점, 유의하셨으면 좋겠군요.”

마지막으로 내내 거슬리던 사실을 짚어 내며 삐딱하게 웃었다.

노 아르망 회의는 집정관은 물론 파칸들도 찍어 누르는 듯한 레이의 서늘한 미소로 끝이 났다.

***

연회장으로 속속 초대객들이 도착했다. 파티의 시작이었다.

엿새간의 긴 연회여서 오가는 사람들도 많은 북적이는 잔치였다. 각지에서 나온 최상급 특산물이 연회를 한층 풍성하게 만들었고, 임신 이후 외부 행사를 삼가던 태자비까지 태자와 등장을 해 그야말로 화려했다.

낯익은 수도 귀족들도 참여 명단에 보이고 따로 초대장을 보낸 케이틀린과 몇몇 테가푸스 회원들도 온다고 하니 레이는 심란한 마음이 조금이나마 진정될 것 같았다.

레이가 자신을 비하하는 파칸과 집정관들을 대차게 깐 이후 몇몇은 슬금슬금 그녀를 피했다. 루이반을 건드렸다고 생각하는 듯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었다. 그렇게나 루이반과는 관련 없는 자리임을 알려도 결국 레이에게 돌아오는 대우는 ‘루이반 공작 부인’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라미엘과 상의할 수도 없었다. 라미엘이 루이반인데 루이반을 떼어 내기 위해서 어찌해야 하냐고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앞으로 저들은 만날 일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연회장 입장 전, 라미엘이 잠시 문지기에게 가서 무언가 짧게 지시를 내렸다.

“무슨 이야기한 거예요?”

“별거 아니에요. 자, 집정관님. 입장하실 시간입니다.”

라미엘이 연회장 앞에서 레이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에스코트를 허락받는 것처럼 손을 내밀었다. 방에서 이곳까지 쭉 팔짱을 끼며 왔지만 새삼 인사를 청하는 라미엘의 모습에 레이의 얼굴에 방긋 웃음꽃이 피었다.

“공작께서 에스코트하신다니, 영광입니다.”

레이도 정중하게 라미엘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라미엘이 레이를 에스코트하며 문지기에게 신호를 주었다.

“소포니악 집정관 레이알렉시스 님과 라미엘 루이반 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파칸이나 집정관들이 간혹 연회를 끝까지 즐기지 못하고 가는 일이 있고, 연회 내내 사람들이 계속 오고 가기 때문에 문지기가 출입자를 알리는 건 연회 첫날 첫 입장에만 행하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이 유일하게 레이알렉시스 소포니악 집정관을 알릴 수 있는 때였다. 하지만 레이를 대하는 분위기를 보아 이번 소개에도 루이반 이름으로, 공작 부부로 묶여 나갈 것이 자명해 보였다.

레이가 마지막 회의를 끝내고 이를 꽉 깨물고 자신에게 돌아왔을 때의 일을 생각하면 소개에 실수하지 않도록 사전에 말을 해 둬야 했다. 더불어 루이반 공작이라는 자신의 직함이 드러나지 않게 추가적인 사항을 덧붙여 두었다.

“설마 라엘, 방금 전에…….”

루이반 공작 부부가 아닌 집정관 레이알렉시스를 위시한 소개, 심지어 라미엘의 공작이란 직함마저 쏙 빠진 알림에 레이는 그가 최대한 저를 배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라미엘도 잘 알고 있었다. 루이반이라는 거대한 이름을. 그 이름에 자신이 짓눌리지 않도록 지금 이 순간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준 것이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자신도 이 사람을 위해 뭔가를 해 주고 싶다는 마음이 울컥 솟았다.

‘웬만한 건 이미 다 가진 사람인데. 라엘이 좋아할 만한 것이 뭐가 있을까.’

“들어가시죠, 집정관님. 다들 당신을 기다리고 있잖아요.”

라미엘의 말에 그의 얼굴에 닿은 시선을 떼어 내 앞을 보니, 케이틀린과 테가푸스 회원들이 그야말로 목이 터져라 환호를 하며 손이 부서질 듯 박수를 치고 환영하는 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지금 이 순간을 레이는 죽을 때까지 절대 잊지 못할 것이라 확신했다.

공작 부인으로 유명했던 레이알렉시스의 새로운 직함과 그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공작의 모습에 장내 모든 참석자가 파도에 뺨이라도 맞은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상석에 있던 태자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부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루이반, 대체 무슨 일인 거지? 랑크랩에 제……. 이젠 집정관이라고?”

제로석을 급히 삼켜 버리고 태자가 물었다.

태자 전하, 랑크랩이 아니라 킹크랩입니다. 황실에서 몇 번이나 드셨으면서 아직도 랑크랩으로 부르고 계신 거예요?

……라고 당연히 말할 수 없고, 아무래도 앞으로 태자에게 있어 킹크랩은 그냥 랑크랩으로 통하게 될 모양이었다.

태자와 공작이 있는 자리니 레이가 그리 임시라고 떠들어 대던 집정관들과 파칸은 감히 입도 벙긋할 수 없었다. 웬만한 귀족만 됐어도 ‘임시’로 소포니악을 돌보고 계신다고 정확히 상황을 알려 드렸을 텐데 거물 중의 거물들의 대화니 차마 지나가는 말도 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 법안을 제안하려고 부인부터 나선 건가.”

“아닙니다. 재판 이야기를 들으셨겠지만 우연한 계기로 이리된 것입니다.”

레이의 대답에 태자의 한쪽 눈썹이 슥 올라갔다.

“그 법안과 이번 일, 자세히 좀 들어 보면 좋겠군.”

태자의 말에 레이와 라미엘이 놀란 얼굴을 했다. 법안에 시큰둥한 반응이었던 태자가 이런 말을 꺼낸다는 것은 그가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변화를 암시했다.

노 아르망에서 이런 큰 수확을 건질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한 터라 두 사람은 표정 관리도 못한 놀란 얼굴을 태자에게 고스란히 보여야 했다. 라미엘조차도 놀란 걸 보며 태자는 쓴웃음을 삼켰다.

“공작도 그럴 일인가.”

“죄송합니다.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라미엘이 표정을 갈무리하고 정중히 사과를 올렸다.

“……그간 아무리 생각해 보고 자료를 뒤져 봐도 법안을 반대할 이유가 하나도 없더군.”

라미엘의 말을 반박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지만 논리적이고 적당한 반대 이유는 찾아지질 않았다.

“적극 반대할 거리가 전혀 없으니, 지지할 수밖에.”

태자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시종이 잠깐의 틈을 타 태자를 불렀다. 태자비가 급히 찾는다는 소리에 그는 일단 첫날이니 연회를 즐기고 나중에 이야기하자며 자리를 떠났다.

가장 영향력이 큰 사람이 지지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모두에게 힘이 되는 소식이었다.

노 아르망의 시작은 비록 엉망이었을지라도 이 건을 계기로 모두가 단단하게 다져지는 기반이 되는 듯해 레이는 회의 내내 느꼈던 감정이 비로소 해소되는 기분을 느꼈다.

“라엘, 우리도 이제 연회 즐겨요.”

레이가 평소처럼 맑고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