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불꽃 청혼
연회는 눈 깜짝할 새 지나갔다. 엿새나 되는 시간이 길다고 여겼는데 벌써 마지막 불꽃놀이를 앞두고 있었다.
태자비 때문에 연회장에 쭉 머물지 못한 태자는 따로 라미엘을 불러 법안 이야기를 나눴다. 노 아르망에 참석한 짧은 1박 2일의 시간 중 반나절을 회의에 썼으니 가히 긴 시간이었다.
수도 귀족이기에 귀족 작위만 생각했던 테가푸스 회원들은 이번 일을 계기로 전국 도시의 파칸과 집정관 자리도 눈여겨보는 것으로 노선을 크게 확장하겠다고 했다. 이러한 결정의 최고 지지자는 레이알렉시스 집정관이었다.
연회였지만 각자 앞으로 달성할 바를 위해 결속을 다지는 자리가 된 셈이다. 그래서 모두는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온전히 연회를 즐길 수 있었다.
“노 아르망의 불꽃을 즐기세요!”
마지막 행사를 알리는 발언에 사람들은 연회장 발코니로 나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레이, 술이 좀 깨요?”
레이에게 계속 시선을 주며 어떻게든 이전의 발언을 만회하려고 안절부절못한 파칸과 집정관들을 라미엘이 차가운 시선 한 번으로 물리친 후부터 진정한 파티였다.
편안하게 테가푸스 회원들과 신나게 어울려 즐겼던 레이는 이젠 라미엘의 부축 없인 똑바로 서 있기도 힘든 지경이었다.
“안 치해따, 너 인누 와.”
질척질척. 그 언젠가처럼 젖은 미역같이 자신에게 꼭 달라붙은 레이가 주변의 시선 따윈 아랑곳하지도 않고 계속 뽀뽀며 키스를 퍼부어 댔다.
“……깨려면 멀었네.”
다만 그때와 크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 행동들이 마냥 예뻐 보이기만 한다는 것이었다.
소포니악 집정관님의 귀여운 술주정은 오롯이 자신만이 봐야 했다. 라미엘은 사람들을 피해 연회장 밖으로 레이를 데리고 나왔다.
“아, 예뻐. 너 누구야아? 누군데에 이뤄케 이쁘지이? 헤헤.”
연회장을 나와 문을 닫자마자 그는 레이를 안아 들었다. 생글생글 웃는 발그레한 얼굴이 코앞에 다가오며 그의 입술을 살짝 깨물고 떨어져 나갔다.
“너 누구 끄야아?”
“레이알렉시스, 당신 겁니다.”
만족할 만한 답이었는지 그녀는 술기운에 조금 열이 오른 따뜻한 팔로 라미엘의 목을 감싸 안았다가, 오래지 않아 팔을 풀어 버리곤 양손으로 그의 볼을 감싸고 헤죽헤죽 웃었다.
바람을 쐬면 조금 정신이 들겠지 하는 마음에 데리고 나왔지만, 안 깨도 나쁘진 않을 것 같기도 하고.
취한 레이가 종알종알, 왜 그 무적의 흰 옷을 안 입었는지, 자기 드레스를 빌려주겠다며 옷을 벗으려는 걸 꼭 안아 주는 걸로 말리는데 말소리가 들렸다. 사람이 붐비는 발코니를 피해 정원에서 불꽃을 보려는 사람들이었다.
라미엘은 그런 그들의 시선을 피해 조금 더 구석진 곳으로 자리를 옮기고 커다란 나무에 몸을 숨기듯 기댔다.
펑!
그 순간, 노 아르망의 마지막을 알리는 불꽃이 하늘을 수놓기 시작했다. 마력석을 가공해서 만든 불꽃은 검은 하늘을 형형색색으로 물들이며 화려하게 피어올랐다.
“와아아.”
라미엘 품 안의 레이도 그 화려한 빛에 시선을 빼앗겨 질척거림을 멈출 정도였다. 얌전해진 레이 덕분에 라미엘도 잠시 시선을 떼고 불꽃을 구경할 수 있었다.
“……저거.”
미동도 없이 하늘의 꽃을 바라보던 레이가 돌연 입을 열었다.
“레이?”
“저거, 라엘 가타. 에쁘고 빤딱빤짝해.”
나보단 당신이 훨씬 더 보석같이 귀하고 반짝거린다는 말을 지금 하면 레이가 알아들을 수나 있을까.
라미엘이 불꽃에서 시선을 떼고 레이를 바라보았다.
“저거보다 엡브게 화여하게 살게 해 주께.”
눈빛만 보면 멀쩡한 사람으로 생각될 만큼 갑작스레 또랑또랑 맑아진 레이의 눈에 자신의 얼굴과 반짝이는 불꽃이 담겼다.
“나랑 겨론해요. 너, 내 거 해라.”
레이가 연회 내내 고민해도 결론은 하나였다. 라미엘이 좋아하는 건 자신이라고.
그래서 결론을 내렸다. 자기 자신을 주자고. 이미 자신을 가진 사람이지만, 제대로 그에게 청혼한 적이 없으니 이번 기회에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다만 술에 취해 불쑥 튀어나가게 될 줄은 몰랐던 일이다. 맨 정신에 제대로 해야 한다고 이성이 말렸지만 술 때문에 흐릿해진 정신은 말이 튀어나가는 걸 말리지 못했다.
“나 청혼하능 거예요.”
어떻게 취하면 사람이 이렇게까지 귀여워질 수 있을까.
뜻밖의 청혼에 라미엘이 좋다고 대답할 틈도 없이 레이의 숨이 다가왔다.
한참이나 라미엘에게 달콤함을 선사하던 레이가 느릿하게 몸을 떼었다.
“……할 거지?”
“네, 레이. 당연하죠.”
라미엘이 레이의 청혼을 받아들이는 순간 마지막으로 가장 크고 화려한 불꽃이 터졌다.
금빛으로 커다란 원을 그리던 불꽃이 가장자리부터 붉게 터지면서 태양을 형상화하는 것처럼 보이다가 불꽃 하나하나가 다시금 형형색색의 작은 꽃 조각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폭포가 떨어지듯, 비가 내리듯 쏟아지는 빛 조각의 향연에 모두의 탄성이 터졌다.
시끄러운 와중에도 레이가 내뱉는 작은 숨소리 목소리 하나하나가 또렷하게 라미엘의 귀를, 마음을 울리며 닿았다.
“당신 청혼 받아들일게요. 제발 꼭 저와 결혼해 주십시오.”
수락과 동시에 마지막 불꽃송이가 사르르 하늘에서 떨어졌다.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축배를 들고 박수를 쳤다.
***
레이의 손가락에 있던 반지가 빙글 돌았다. 그녀의 손에 꼭 맞춘 것이지만 알이 너무 커서 다이아는 위를 향하지 않고 좌우를 바라보았다.
불꽃과 술에 취해 날린 프러포즈였음에도 라미엘은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내가 무심했군요.”
제대로 된 청혼도 결혼식도 없었던 부부 생활의 시작이 이제 와 후회가 되었던 모양인지, 레이의 청혼 이후 라미엘은 윌포프에게 무언가를 지시했다. 그리고 이게 그 결과물이었다.
“레이, 날 가져요. 정식으로. 평생.”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를 손가락에 끼워 주며 라미엘은 레이의 취향에 맞춘 청혼의 말을 건넸다. 이전에 지나가듯 친구가 사는 곳은 청혼할 때 다이아몬드 반지를 준다고 했던 말을 기억해 뒀던 듯했다.
리담은 청혼할 때 특정한 선물을 주는 풍습이 없다. 귀족들이야 정략혼이 흔하니 혼약서를 넣고 서로의 재산을 확인한다는 절차 정도만 있을 뿐이고, 민가에서는 자신이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을 상대에게 주며 청혼을 한다. 그런데 그 소중한 것은 모두 자신들의 추억을 공유하는 개인적인 물건인 경우가 많아 하나로 특정되지 않고 제각각이었다.
그렇다 보니 라미엘은 레이가 말했던 청혼 선물로 반지가 유명하다는 말을 생각해 내고 실천했다고 추측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가장 소중한 것은 상대방 자체였고, 특히나 레이가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정평이 난 건 물건으로 특정된다기보다는 흰 정복을 입은 라미엘의 미모였으니 말이다.
“정식으로 평생 가지라니. 귀여워 죽겠네, 진짜.”
라미엘의 저런 의외의 귀여움을 그 누구도 모른다는 사실이 개탄스러우면서도 뿌듯했다.
‘그나저나 이 반지도 분명 보통 것이 아닐 텐데.’
광산 하나 또 팔아 치운 건 아니겠지.
한눈에 봐도 매끄럽게 커팅된 맑디맑은 다이아몬드였다. 커다란 다이아 주변으로 작은 색색의 다이아들이 장식되어, 다이아를 다이아가 꾸며 주고 있었다.
주변 다이아도 큰 알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거지, 아주 작은 편도 아니어서 그야말로 ‘내 몸값 장난 아니다.’ 하는 포스를 내보이고 있었다. 이 정도면 무게도 묵직해야 하는데 가벼운 걸 보니 경량 마법도 걸린 게 분명했다.
마음을 이미 충분히 보여 줬음에도 더 표현하고 싶어 하는 그의 심정은 잘 알겠지만 문제는 이 귀하고 비싼 보석이 일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점이었다. 빼 놓고 있기는 싫고, 끼고 있자니 걸리적거리고.
“이걸 어찌해야 하나…….”
노 아르망 이후, 첫 휴일.
공작은 태자를 만나러 황실에 갔고 마님은 공동 집무실에서 반지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작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어머?”
그 순간 허연 것이 공중에서 툭 모습을 보였다.
“푸둥?”
워크산에 놀러 갔다 오면서 이쪽으로 게이트가 열린 모양이었다. 게이트에 이상이 있는지 가끔 푸둥은 레이가 있는 장소의 허공에서 나타나곤 했다.
“우리 애기 또 허공에서 나오네.”
푸둥이 레이의 목소리에 방싯방싯 웃더니 머리를 숙이고 품에 안겼다.
“예하께 무슨 일이 있으신가.”
헤덴에게 도저히 무슨 일이 있을 것 같진 않지만.
푸둥의 게이트는 게이트를 연 곳으로 다시 돌아오는 왕복식이었다. 레이 옆에서 워크산으로 갔던 게 아니니 원래 있던 장소로 돌아와야 했다.
“조만간 대신전에 한번 다녀와 볼까.”
복슬복슬한 푸둥의 털을 쓰다듬으며 레이가 스케줄을 가늠하는데, 몇 번 걸리는 느낌이 들던 손짓이 멈춰 버렸다.
“음?”
“끼잉?”
반지에 푸둥의 털이 엉켰다.
“어머, 이게. 뭐야, 안 빠진다.”
레이가 빼내려고 할 때마다 더 단단히 털이 얽히더니 이젠 아무리 손을 흔들어도 꿈쩍도 않는다.
“헐, 어떡하냐. 푸둥, 잠깐만 놀라지 말고 참아 봐.”
일단 손이라도 빼고 볼 심산으로 반지를 잡고 손을 당겼는데 푸둥이 깽 소리를 냈다.
사각사각.
한참 동안 낑낑대고 난 후, 레이는 결국 푸둥의 털을 잘라 내는 것으로 해결을 했다.
“미안하다. 푸둥아.”
푸둥은 고개를 돌려 제 등을 휙 쳐다보고 미안해하는 레이의 얼굴을 보고 다시 등을 보더니 이내 괜찮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푸둥의 등 한 부분이 움푹 파였지만 주변 털을 잘 빗어 주니 그럭저럭 괜찮았다. 다만 시간이 조금 지나니 빗질의 효력도 사라질 뿐.
“아이, 이게 참……. 푸둥아, 너 그냥 싹 털 밀어 버릴래? 이제 곧 여름이니, 야, 짜샤, 어디 가?”
푸둥이 손을 벗어나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털을 밀리긴 싫은 모양이었다. 농담이었는데.
“마님.”
그때 윌포프가 라미엘이 도착했다는 소리를 전했다. 예상보다 일찍 일을 마친 라미엘을 향해 레이가 빠르게 집무실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