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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133화 (133/160)

133화. 라미엘의 보물

바닥에 떨어진 흰털 한 뭉치와 털이 잔뜩 끼어 솜 반지가 된 청혼 반지를 보고 라미엘은 대강의 상황을 짐작했다.

“다 됐다.”

반지에 남아 있던 털을 다 뽑아내자 본연의 형태를 되찾았다. 레이가 다시 반지를 끼는 모습을 보며 라미엘이 말했다.

“레이, 내일이면 좀 더 편하게 착용할 수 있는 반지가 올 겁니다.”

“네?”

“같이 주려고 했는데, 작은 게 작업이 더 어렵다고 하더군요. 시간이 걸린다고 해서 먼저 준비된 것부터 준 거예요.”

이 섬세한 남자 같으니라고. 어떻게 이런 부분까지 다 생각을 했을까. 장신구라곤 한 번도 차 본 적도 없을 텐데.

레이 역시도 반지를 껴 보기 전까지 불편할 줄 몰랐던 사실이었다.

“가끔 당신 이럴 때마다 내가 너무 놀라는 거 알아요? 어떻게 이런 부분까지 다 알 수가 있지?”

“레이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생각하면 바로 나오는 답입니다.”

레이가 놀라는 것과 달리 라미엘은 이게 그리 놀랄 일인가, 하는 반응이었다.

“……라엘, 내가 지금 좀 격하게 당신한테 애정을 표현하고 싶은데 잠깐 하던 일 멈추고 이쪽으로 와 줄래요?”

레이의 제안에 라미엘은 세상에 다시는 없을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뒤를 따라 부부 침실로 향했다.

***

레이에게 전권이 넘어왔다.

이미 루이반을 쥔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라미엘은 조금 더 확실하게 루이반의 모든 것을 레이가 손댈 수 있게 했다.

가문의 보물들을 보관하는 곳과 마린의 거미줄을 꺼낼 수 있는 권한은 물론이거니와 가주만이 접근할 수 있는 비밀 서재까지 라미엘은 아낌없이 레이에게 공개했다.

“라엘, 이래도 되겠어요? 이렇게까지 안 해도 난 당신을 믿어요.”

“압니다. 이걸 청혼에 대한 답례라고 생각해요.”

라미엘의 보조 집무실 책장 너머로 있는 비밀 공간은 세간에 공개되지 않은 가문의 보물들과 역사를 남긴 기록이 있는 곳이었다. 특정 책들을 순서대로 꺼낸 뒤에야 드러나는 문은 가주의 반지로만 열리고, 그마저도 가주만이 접근할 수 있는 특수한 마력 장치가 되어 있었다.

그 장치에 레이를 하나 더하는 것까지 하고 나서야 라미엘은 만족한 얼굴이었다.

이는 유례없는 일이었다. 역사상 그 누구도, 아무리 사서에 남을 사랑꾼이었다고 해도 아내와 가주 자리나 다름없는 상징을 공유하는 사람은 없었다.

전쟁이 터지거나 암살단이 몰려오는 일 등 수습할 수 없는 큰 문제가 발생했을 때나 가까스로 차기 가주에게, 아직 후계 확정이 되지 않았다면 안주인에게 급히 알려 주는 정도에 그쳤다.

그런데 라미엘은 평온하기 그지없는 이 시기에 레이와 전권을 공유한 것이다. 앞으로 이 비밀 장소의 역사 내역엔 역대 최고의 사랑꾼이라는 타이틀 아래 라미엘 루이반의 이름이 새겨진 기록이 남을 것이다.

“이곳은 비밀 창고이기도 하지만, 유사시에 탈출할 길이 있는 통로가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레이에게 알려 주는 거예요. 이쪽은 황실로, 저쪽은 저택 밖으로 향합니다.”

위급한 순간에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가문을 지켜 내기 위한 일을 하는 게 아니라 평소에도 모든 것을 공유하며, 집안의 대소사를 함께 알고 위급 상황에 가주만이 아니라 그의 반려까지도 살아남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레이는 평생 내 반려니까.”

라미엘이 알려 준 모든 정보들이 루이반을 뒤흔들 수준의 묵직한 것들뿐이란 걸 레이 역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자신에게 거리낌 없이 다 알려 주는 그의 심정도, 마음도, 모든 것이 다 레이의 마음을 울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빨리 청혼할 걸 그랬나 봐요.”

레이의 말에 라미엘이 작게 웃었다.

라미엘이 전해 준 생활용 반지는 청혼 반지의 축소판이었다.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작게 줄어든 것만 다르지 디자인과 색상이 완전히 똑같은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가격은 큰 것과 같았다. 라미엘이 없는 곳에서 차고 있을 것이기에 보안을 위해 본 반지보다 보호 마력을 배로 걸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이제 가보로 보관해야지.”

커다란 본 반지는 마린의 거미줄과 함께 보관하기로 결심하고 레이는 반지를 들고 보관 장소로 향했다.

매일 그랬듯, 저녁 시간에 게이트를 열어 소포니악에서 라미엘에게 돌아온 레이는 실생활용 반지를 받고 청혼 반지를 빼냈다.

라미엘은 아직도 일을 하고 있느라 집무실에서 꼼짝도 못 하는 중이었다. 어차피 이젠 레이도 마린의 거미줄에 닿을 수 있으니 굳이 라미엘을 찾지 않아도 된다. 윌포프가 하인들도 모두 자기 방으로 돌아가길 명했다고 했으니 저택에서 레이의 모습을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여기서 이쪽 벽을 건드리면……. 됐다.”

오랜만에 보는 마린의 거미줄이었다. 고아하고 우아하고 화려하며 비싼 예술 작품은 여전히 조명이라도 달린 것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대로시네요.”

목걸이에 안부 인사를 전하고 레이가 반지를 담은 작은 상자를 마린의 거미줄이 걸려 있는 장소 아래쪽에 두려고 손을 내밀었다.

“이건 뭐지?”

그곳엔 마린의 거미줄 말고도 레이의 주먹 두 개를 합친 정도 크기의 작은 궤가 하나 보였다. 집안의 가보를 보관하고 있는 듯 고급스럽고 묵직한 상자였다. 심지어 잠금 마력까지 걸어 뒀는지 레이가 손을 대자 찰칵, 하며 무언가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식이면 내가 봐도 된다는…… 거겠지?”

레이는 주위를 둘러보고 다시금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작은 궤의 뚜껑을 열었다.

“음? 뭐야. 왜 이런 게…….”

궤 안에 든 건 가보도 귀한 보물도 아닌 평범한 돈이었다.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엄청난 액수도 아닌, 루이반의 거대한 재력에 비하면 코웃음이 나올 작고 귀여운 액수다. 이런 게 왜 그리 이중 삼중 잠금이 된 장소에 귀하게 보관되고 있는지 의아하기만 했다.

혹시 이건 눈속임이고 돈 아래 정말 귀한 게 있지 않을까 싶어 레이가 내용물을 뒤적거렸다.

“앗, 역시나.”

돈 아래쪽에 있는 무언가가 손가락에 걸렸다.

“대체 뭐기에 마린의 거미줄보다 더 귀하게 꽁꽁 숨겨 두셨을…….”

손에 잡혀 나온 건 작은 주머니였다.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게 분명한, 평범하고 흔한 천 주머니.

하지만 이 주머니를 보자마자 레이는 말을 잃었다.

이건 자신이 라미엘에게 줬던 월급이다.

“하아.”

한참 만에야 제대로 숨을 내쉰 레이가 활짝 웃었다. 예상 못 한 반전에 감동으로 울리는 마음을 따라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진해지더니 레이는 이내 소리 내서 웃기 시작했다.

“저 남자 귀여워서 어떡하지.”

레이는 다시 주머니를 원래대로 궤 안에 잘 넣어 놓고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소중한 보물을 원래 자리에 돌려놓고 그 옆에 자신의 청혼 반지를 두었다.

“반지 보관함이랑 잘 어울리네.”

의도했던 건 아니었겠지만 라미엘의 보물이 담긴 작은 상자와 레이의 반지 케이스가 본디 한 쌍으로 제작된 것처럼 잘 어울렸다.

그녀는 라미엘의 보물 상자를 소중하게 쓰다듬은 뒤 모든 잠금 장치를 꼭꼭 잠갔다.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라미엘과 푸엥, 푸둥을 데리고 만개한 꽃나무 아래에서 작은 티파티를 연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푸릇한 잎이 나오고 있다.

“날씨 좋다.”

레이가 머무는 소포니악 관사 옆에 있던 나무에도 푸른 옷이 돋아났다.

테가푸스는 수도 외의 도시에서도 회원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라미엘 법안에 대한 지지 의견을 공개적으로 밝히진 않았지만 태자가 부쩍 자주 공작과 회동하는 것을 보아 사람들은 태자가 찬성으로 돌아섰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법안에 대한 인식을 긍정적으로 바꾸기 위해 라미엘은 이전에 비해 케이틀린과 자주 만났는데, 그와 비례해 베르니에서 레이와 함께 퇴근하는 일도 자주 생겼다.

케이틀린은 헬라에서 일을 마치면 종종 소포니악까지 레이를 찾아와 짧게라도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 덕분에 소포니악에서 집정관님의 친구, 분홍 머리 레이디도 알아보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노 아르망 이후 세상은 느리게 조금씩 변화하고 있었다.

오늘은 날씨만큼이나 평화로운 하루였고, 여태처럼 레이는 착실하게 집정관으로서 소포니악을 관리하며 보내는 중이었다.

“집정관님?”

오늘은 새로운 인물이 레이의 관사를 찾아왔다. 관사를 자주 방문하던 이들, 레이가 동네 곳곳 돌아다니며 만났던 사람들을 대강 알고 있음에도 생소한 남자였다.

레이가 아무리 소포니악 여기저기를 돌아다닌다고 해도 만난 사람보단 만나지 못한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니 모른다고 해서 큰일인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제는 검은 머리 레이디를 아는 사람만이 아닌, 모르는 자들도 관사를 찾아올 수 있을 만큼 소포니악 사람들에게 ‘집정관’이라는 자리가 익숙해진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저는 오디라고 합니다.”

낯익은 이름에 레이는 바로 상대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필레가 맨 처음 집정관이 될 때 같이 후보자로 올라왔다던 사람이었다.

그는 제법 여유로운 생활을 누리는 자라고 사람들의 입에서 종종 거론되던 소포니악의 유지였다. 전설처럼 이름만 듣다가 실물은 처음 접했다.

필레 일로 온 도시가 시끄러웠을 때도 한 걸음 물러나 조용히 있던 사람이었는데, 관사를 직접 찾아와 집정관을 찾는 모습에 무슨 일이 난 건가 싶어 레이는 속으로 조금 놀랐다.

“무슨 일이지.”

“그게, 저희 집 일부가 무너졌는데 그걸 좀 해결해 주십사 해서 왔습니다.”

“집이 무너져?”

“예에.”

위험한 소식에 레이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라미엘과 있던 밤 시간에 소포니악에 벼락이라도 떨어진 걸까. 온갖 자연재해를 떠올려 봤지만 간밤의 소포니악은 고요했다. 진행하는 공사도 없었는데 무슨 일로 지붕이 무너진 건지 감이 잡히질 않아 레이는 추가적인 질문을 던졌다.

“다친 사람은? 어디가 어떻게 무너졌는데?”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집 지붕이 부서져서 복원이 필요합니다.”

“다친 사람이 없다니 그건 다행이네. 그런데 지붕은 어쩌다 그렇게 됐지?”

바로 자기 집으로 와서 점검을 하는 게 아니라 꼼짝도 않고 질문만 하는 레이를 보며 오디는 기분이 조금 상했다.

소포니악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어디가 무너졌다, 부서졌다고 하면 득달같이 와 줬다고 하는데 지금은 별 시답잖은 이유나 물어보며 시간을 끌고 있었다. 심지어 다른 평범한 도시 사람들도 아닌 소포니악 유지인 자신의 일인데도 말이다.

이전에는 사람들이 본인의 정체를 모르니까 착한 척을 하다가 이제는 신분이 드러나니 본성을 내보이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영 찝찝해졌다.

임시라고는 하지만 바깥일 한 번 해 본 적 없는, 말랑말랑하게 자라기만 한 여자에 수도 귀족인 자가 뭘 한다고 노 아르망에 가고 집정관 자리에 앉아 이리 구는지 그는 이해가 가질 않았다.

“와서 보시는 게 먼저가 아닐까요.”

묘하게 말끝을 끌며 말하는 걸 보니 당장 제집에 가 주질 않아 삐친 모양새다.

“무슨 연유인지 알아야 사후 처리할 것들을 지시하고 움직이지 않겠나. 폭설에 무너졌다면 제설 전문가를 불러 두고, 물에 휩쓸렸다면 젖은 것들을 치워야 하는 일꾼을 모아 두어야 하고. 이런 식으로 지금 명령을 해 두어야 자네 집이 빨리 수습이 되지. 어떠한 연유인지 모르고 현장에서 확인하고 나서 다시 관사로 와 해결책들을 찾으면 시간이 낭비되잖아.”

내가 이런 것까지 친절하게 일러 준다, 하는 마음으로 대답을 하니 그제야 아, 하는 얼굴을 한다. 저 표정이 나온 연유가 자신의 일 처리 방식을 몰라서라기보다 ‘네가 그런 것까지 신경 쓰고 있는 줄이야.’라는 느낌에 더 가까워 보여 레이는 좀 어이가 없었다.

그간 소포니악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방관만 하던 자가 기껏 찾아와 하는 짓거리가 부탁하지도 않은 업무 능력에 대한 평가라니.

“그래서 그대 집은 어쩌다가 사고가 났지?”

하지만 노 아르망에서 숱하게 겪었던 일이었고 앞으로 이런 일은 드물지 않을 테니 일일이 대응할 필요는 없었다.

“내부 공사를 하고 있는데 인부들이 작업을 하다가 지붕을 건드렸습니다. 그 바람에 지붕과 벽이 무너졌죠. 어찌나 놀랐는지, 아직도 심장이 뜁니다.”

오디의 말에 레이의 심장은 다른 의미로 벌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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