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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134화 (134/160)

134화. 진상

“내부 공사? 무슨 특별한 사정이 아니고?”

지금 자기 집 공사하다가 지붕 무너진 걸 나보고 해결해 달라고 꾸역꾸역 찾아온 거 맞지?

레이는 어처구니없는 문의에 혈압이 올라 심장이 뛰었다.

“특별한 사정이요?”

“산사태라든가, 벼락을 맞았다든가 그런 일.”

“그냥 공사하다가 그런 일인데. 이유를 아셨으니 이제 와 보시는 건 어떠신지…….”

“내가 안 가 봐도 될 것 같은 일이네.”

레이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집무실 안에서 함께 출동 준비 중이던 케이와 엘도 오디의 말을 듣고는 자연스레 다시 레이 근처 지정석에 앉았다. 도베 역시도 별 시답잖은 소릴 다 하고 있다는 얼굴로 멈췄던 서류 작업을 이어 나갔다.

“제가 여기까지 와서 부탁하는데 안 오신다고요?”

“대단한 행차하셨다고 내가 칭찬이라도 해 줘야 하는 건가?”

“예에?”

시큰둥하다 못해 서늘한 레이의 대꾸에 오디가 미간을 찌푸렸다.

“별것도 아닌 일이군. 돌아가서 공사하는 사람한테 부서진 부분을 보상하라고 해.”

레이의 말에 오디는 황당하단 표정을 지었다.

“소포니악 길 정비하고 빈민가 집도 싹 고쳐 주셨다면서요.”

“그랬지.”

“그런데 왜 제 집은 안 고쳐 주시는 겁니까? 제가 잘산다고 차별하시나요? 저도 소포니악 사는 사람인데.”

무슨 논리냐. 당최 이해가 안 가는 발언이었다.

“집정관님이, 아니 공작 부인께서 루이반의 돈까지 써 가면서 빈민가 구석 집들을 다 지어 준 걸 압니다. 이 사실은 소포니악에 모르는 자가 없겠지요. 그런데 어찌 저는 안 된다고만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뭐야, 이거. 지금 공짜로 자기 집 망가진 거 고쳐 달란 소리지?

“자네가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 내가 한마디 하지. 당신 집을 망가뜨린 건 당신의 일꾼이지 소포니악이 아니야.”

“예?”

“도시민들이 소포니악에서 하는 일이나 감당 못 할 재해 때문에 피해를 봤거나, 빈민가 사람들처럼 도시 자체에서 낙인찍고 차별하는 약자들은 도시 차원에서 돌봐야 하는 책임이 있으니 한 거야.”

“저, 저도 돌봐야…….”

“그대는 그대 집을 수리하겠다고 부른 일꾼이 저지른 실수니 그 일꾼들한테 보상을 요구해야지 왜 그걸 여기 떠넘기고 있지? 소포니악이 자네 집 공사를 위해 세금을 써야 하나? 그 이유는 뭐지?”

“그건 제가 소포니악에 살…….”

“네가 개인적으로 저지른 일에 세금을 쓰라고? 지금 나보고 필레가 되란 말이야?”

필레 소리에 오디의 입이 다물렸다.

“그리고 루이반 돈? 헛소리 마. 그거 다 내 돈이야.”

오디는 지금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그저 레이가 요청을 거절했다는 사실만 알아들었다.

‘자기 돈이면 루이반 돈이지 저게 무슨 헛소리야. 빈민가 놈들이 지지해 주니까 없던 집도 지어 주고, 난 지지 안 한다고 수리조차도 안 해 준다 이 말이지?’

마음속은 이랬지만 내색을 할 순 없었다. ‘루이반’ 공작 부인이시니 뭐든 제멋대로일 터다.

‘루이반 공작령이 어마어마하다던데 이 정도 소도시는 밀어 버릴 수도 있으니 내가 참아야지.’

마음이 상한 오디는 인사도 없이 관사를 벗어났다.

“소포니악이 시끄러운 동안 내내 얼굴 한 번 안 비치다가 나와서 헛소리만 하다 가네.”

마음속으로만 생각했다고 여겼는데 목소리가 되어 튀어나왔다. 황당한 일에 입이 먼저 반응을 하나 보다. 그 말을 들은 케이가 말했다.

“공사 이야기도 거짓 핑계 아닐까요? 자기 집 공짜로 고쳐 보려고 슬쩍 던져 보러 온 것 같아 보입니다. 제가 알아볼까요?”

“케이 추측이 맞을 것 같은데. 굳이 알아볼 필요가 있을까.”

레이의 대답에 도베도 한마디 거들었다.

“저도 집정관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누울 자리 보고 슬쩍 발 한번 뻗어 본 것 같은데 저런 사람들 일일이 상대하시면 끝도 없을 겁니다.”

조이먼 직속 헬라 행정 부서에서 몇 년이나 일을 해 온 도베니 이와 관련한 일에선 그의 말이 맞을 것이다. 케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

“나 참. 차별하는 거야, 뭐야.”

예상 못 한 레이의 반응에 씩씩대던 오디는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루이반 대저택에서 밥 한 번 먹은 걸 여기저기 자랑하던 동네 사람들을 떠올리자 더더욱 기가 막혔다.

‘자기편 만들겠다고 루이반까지 들먹이더니.’

자신이 집정관 본인 편이 아니라고 차별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필레가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간 이후 집정관이나 해 볼까 하던 일말의 마음이 싹 가셨는데 저 꼴을 보니 그냥 자신이 나섰어야 했다.

“오디, 오랜만이네.”

“어어, 그래.”

“어디 다녀오는 길인가?”

“집정관한테, 아아. 자네도 그쪽 편이지?”

“편? 무슨 편?”

“아니, 뭐……. 그런데 루이반 말이야, 자네도 다녀왔는가?”

“물론이지. 알렉스 님 구하러 갔다가 좋은 경험하고 왔지 뭐야. 저택이 성이야, 성. 생전 그렇게 큰 데는 처음 봤어. 그 거대한 곳에서도 우리처럼 휴일을 두고는…….”

오디는 경험담을 들으며 저 대단하다는 공작 부인이 루이반 공작 덕분에 소포니악에 군림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문을 듣자 하니 노 아르망에서 남편을 예시 삼아 휴일로 큰소리 좀 쳤다는데, 결국 루이반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여자다.

심드렁하게 이야기를 듣던 오디가 한마디 했다.

“좋은 건 죄다 루이반에서 나온 거네, 그렇지 않나?”

“그 덕에 우리도 혜택을 보고 있는 거니 좋지 않은가. 아이고, 지금 이럴 때가 아닌데. 그럼 난 이만 먼저 가네.”

남자가 사라지고 나서 오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집으로 곧장 돌아가지 않고 여기저기를 기웃대며 비슷한 이야기를 물었다.

웬만해선 마을 사람들과 잘 교류하지 않던 오디가 신기한지 사람들은 루이반 칭찬과 그간 있었던 이야기를 해 주느라 여념이 없었다. 소포니악이 루이반 덕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럼 그렇지.”

소포니악의 임시 여자 집정관은 루이반 덕분에 그 자리에 잠깐 앉아 본 것이다.

오디는 코웃음을 치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집정관 선거에 정식으로 나설 계획을 세웠다.

***

노 아르망에서 논의된 휴일이 여덟 개 도시에 공식 선포되었다.

생각보다 빨리 시행된 안건에 레이는 놀랐다. 적어도 내년쯤에나 공식 지정할 줄 알았는데 파칸끼리 회의를 몇 번 거쳤다더니 노 아르망 이후 한 달이 채 되기 전에 시행이 확정됐다.

이로써 소포니악뿐만 아니라 수도를 제외한 온 도시에 휴일이 생겼고, 이 상황을 보고받은 황실도 라비던에 휴일 지정을 검토해 보겠다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전국 여덟 개 도시의 첫 휴일이 지나고 두 번째 휴일을 맞이한 현재. 루이반에 무언가가 속속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저것들이 다 편지라고?”

저택 입구의 홀을 지나 커다란 포대를 안고 집사들의 작업장으로 향하는 하인을 보며 레이가 윌포프에게 물었다.

“예, 그렇습니다. 양이 조금 많아 아직 정리 중입니다. 마무리되면 바로 올리겠습니다.”

루이반으로 온 건 수많은 편지였다. 공식적으로 쉴 수 있게 된 하루가 얼마나 좋은지, 이런 날을 만들어 준 것에 대한 감사를 표한 글이었다. 레이를 직접 만날 수 없으니 멀리서 사람들과 각 도시들이 편지로라도 감사를 전하는 중이었다.

그냥 하루 쉬는구나, 하고 좋아하고 넘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직접적인 감사를 받게 될 줄은 몰랐다. 다만 약간 걸리는 점이 있다면 이 모든 편지들이 루이반으로 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하긴 소포니악 관사로 보내는 것보다 이쪽으로 보내는 게 더 낫겠지.’

워낙 거대한 가문이라 오가는 소식도 많은 루이반은 하루도 쉬지 않고 우편이 오간다. 반면 타 도시와 교류가 드문 편인 소도시 소포니악은 우편부가 자주 오는 곳이 아니니 빠르게 소식을 전달하기 위해선 루이반이 더 나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소포니악으로 발신했다면 우편부가 자주 왔을 텐데,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우편이건 물자건 외부에서 자주 드나드는 일이 있어야 소포니악이 더 눈에 띌 테고, 사람들 눈에 익으면 도시민들도 늘어나고 그에 따라 여러 시설도 유치할 수 있게 되는 순환이 이어질 수도 있을 터다. 그것이 죄다 루이반으로 와 버리니 아깝긴 했다.

“확인되는 것부터 조금이라도 먼저 올려 줘.”

“네, 알겠습니다.”

머지않아 레이와 라미엘이 있는 집무실로 윌포프가 편지 한 움큼을 올렸다.

생글생글한 얼굴로 은쟁반에 놓인 편지들을 하나씩 집어 보던 레이의 표정이 편지를 읽을수록 조금씩 흐릿해졌다.

이는 라미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아예 예상을 못 한 건 아니었지만 설마 전부가 그럴까 했는데 상황을 보니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윌포프, 편지 전부 가져와 봐.”

레이의 명에 윌포프가 대답을 하고 집무실을 벗어났다. 독극물이나 가주의 목숨을 노릴 특수 장치가 없는지만 확인을 마치고 급히 올라온 편지 한 무더기를 레이와 라미엘은 고요 속에서 읽어 내렸다.

“……하아.”

수많은 편지 중 단 한 통도 소포니악이나 레이를 언급하는 내용이 없었다. 전부 위대한 루이반을 향한 찬사뿐이었다. 라미엘이 거론되기도 했으나 레이에 내한 언급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되게 서운하네.”

답답한 속을 풀어 보려 입 밖으로 감정을 내뱉었지만 이게 정말 서운한 감정이 맞는 건지도 모르겠다.

내 업적이, 내가 한 일이 루이반이라는 한 단어로 지워졌다. 레이알렉시스가 생각해 내고 시행한 결과가, 노 아르망에서 싸우다시피 하고 건져 낸 일의 마무리가 전부 루이반 찬가가 되었다.

대중의 칭찬을 듣기 위해 시행한 일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루이반 소속이 아닌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말끔히 본인 이름이 지워져 있으니 레이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씁쓸한 얼굴을 차마 감추지 못하고 라미엘을 보니 그 역시도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는 듯했다.

라미엘은 아내의 공이 오롯이 자신의 이름과 가문의 이름으로 변한 광경을 보고 죄도 없는데 죄책감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도시들에 일일이 이건 레이알렉시스가 한 일이라고 말하는 것도 우스운 노릇이고, 그래 봐야 어차피 레이알렉시스가 루이반 아니냐고 반문한다면 할 말이 없다.

같은 성을 쓰는 가족의 업적을 축하해야 하는데 아내의 이름만 쏙 빠진 찬사를 보고 있자니 기분이 조금 가라앉았다.

“아마 지금만이 아니었을 거예요.”

리담의 역사에서 지워진 이름이 자신 혼자만일 리가 없다고 레이는 생각했다. 그들도 아마 이런 식으로 자신의 이름 대신 다른 이의 이름이 올라갔거나 아예 지워졌을 수도 있다.

“내가 무슨 말을 해야…….”

“괜찮아요. 당신이 뭔가를 할 필요는 없어요. 라엘이 그런 것도 아닌걸요.”

속상하고 찝찝한 기분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앞으로 또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을 거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레이는 느릿한 손길로 편지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혹시 소포니악 사람들도 내가 루이반 공작 부인이기 때문에, 루이반이 적극 추진했다고 생각해서 휴일을 받아들였던 걸까.

마음이 수런거렸다. 레이는 진정하기 위해 라미엘의 품에 파고들었다.

“레이, 내가 그 흰 옷을 입을까요, 아니면 지금 입고 있는 옷을 전부 벗을까요.”

라미엘의 깜찍한 말에 레이의 웃음이 터졌다.

질척이는 기분에 허우적대는 레이를 위해 그가 내민 카드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내세운 위로였다. 농담 같아 보이지만 반쯤은 진심이 담겨 있을 그런 위로.

소중히 간직해 둔 월급처럼 남들은 상상도 못 했을 루이반 공작의 레이 맞춤형 위로에 마음의 술렁임이 잦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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