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135화 (135/160)

135화. 델마의 정체

레이는 오늘 업무가 끝이 났음에도 소포니악을 떠나지 않고 산책을 나섰다.

나흘 전부터 레이는 업무를 마치면, 아주 느릿한 걸음으로 온 도시를 천천히 돌았다. 구역을 정해 놓고 구석구석을 살폈는데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지금,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점검해 두기 위해서였다.

“아, 여기도 추가로 보수해야겠네.”

도시 곳곳 제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는 짧은 임기 동안 죽어라 일한 노력의 흔적이자 레이가 도시에 품는 애정의 방증이었다.

이곳저곳 아쉬움만 가득했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후임자를 위해 더 잘 해 놓을 수 있는데, 턱없이 짧았다. 레이가 마음속으로 정해 놓은 차기 후보는 입지가 다소 약한 사람이다 보니 더더욱 그를 위해 더 잘 해 놓고 싶었다.

“잘 정리해 둬야겠다.”

후임자가 자신이 남긴 것들을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역시도 이곳의 사람이니 제가 남긴 것들을 잘 보면 필요한 것들임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소포니악은 작고 소박하지만 정이 있고 편안한 도시였다. 레이는 이곳의 정경이, 분위기가 참 좋았다.

비단 자신이 집정관이고 사람들에게 호의를 받아서만은 아니었다. 멋진 노을을 선사하는 숨겨진 동산에서 따뜻한 선물을 안겨 주는 이들까지 모든 것을 사랑했다. 애정이 담겼기에 더더욱 소중한 도시였다.

“라엘. 있죠, 나 여기가 너무 좋아요.”

오늘 살펴보기로 정한 구역을 확인하고 레이가 통신기로 라미엘을 찾았다.

오늘은 그가 헬라에서 테가푸스 회원들을 만나는 날이었다. 라미엘이 헬라에 오면 으레 그랬듯 부부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무언의 약속이었기에 레이는 라미엘을 찾았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뉘엿하게 넘어가는 해를 보며 불쑥 사랑을 고백했다.

“소포니악이 정말 좋아요. 이 작은 도시가 왜 이렇게 애틋한지 모르겠어요.”

라미엘은 이미 알고 있는 일이었다. 레이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다른 색으로 도시도 소중히 여겼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다.

[당신 마음이 거기 담겨 있으니까.]

“……마음.”

라미엘의 말을 듣고 나니 뭔가 몽글몽글한 것이 굴러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말을 해 주는 라미엘의 표정이 눈에 보이는 듯 선명했다.

“내 마음 지분 압도적인 1순위님, 조금만 기다려요. 금방 갈 거니까.”

[네. 서두르지 않아도 되니까 일 다 마치고 와요.]

레이는 베르니에서 기다리고 있는 라미엘과 이야기를 마치고 마차를 타기 위해 부지런히 소포니악을 빠져나갔다. 휴일 전날이면 매번 이 루트였다.

마차를 탈 수 있는 곳은 라 헬라와 소포니악의 경계쯤에 있었는데 이곳에서 레이는 의외의 인물을 만났다.

“델마?”

“어라? 알렉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여기서 만나긴 처음이네요. 어디 가세요?”

“네, 본가에 좀 다녀오려고요. 아버지께서 자꾸 성화를 부리셔서.”

델마는 수도로 가기 위해 헬라 역으로 가려고 마차를 타러 왔다고 했다.

“휴일이 있으니까 정말 좋네요. 일정 조절이나 사람들 문제 같은 것들 신경 쓸 것 없이 제 시간을 가질 수 있다니.”

“그렇죠? 앞으로 휴일을 조금씩 더 늘려야 할까 봐요. 다음 노 아르망에 휴일 하나 더 만들자고 제안할까요?”

“하핫! 그럼 정말 좋죠. 휴일을 아예 닷새로 늘리는 건 어떠십니까? 이틀만 일하게.”

델마의 말에 레이가 웃었다. 솔깃한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델마 가족 이야기는 처음 듣네요. 가족들이 헬라에 함께 있는 게 아닌가 봐요?”

레이의 질문에 델마가 머리를 긁적였다.

“네, 제 가족들은 모두 수도에 있어요. 저만 여기 와서 살고 있습니다.”

의외의 사실이었다. 레이는 델마가 당연히 가족과 함께 헬라에 살고 있으며 이곳 토박이일 줄 알았다.

“우리 공통점이 있네요.”

“그러게요. 사실 오늘 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 가면 잔소리만 듣다 올 게 너무 뻔하거든요.”

가기 싫어서 몇 번이나 고사했더니, 더 이상 말 안 들으면 직접 찾아온다고 해서 이번 휴일에 가기로 했다는 델마는 정말로 싫은지 벌써부터 질린 얼굴을 했다.

“무슨 말을 할지 너무 뻔해서 벌써부터 지치네요. 하아. 가족들은 좋은데 결혼 소리 하면서 여기 일까지 탐탁잖아 하는 말 듣는 건 좀 지겨워서요.”

요즘은 라 헬라 사람들도 델마의 결혼을 가끔 물어서 식겁한다고 했다.

“델마, 혹시 결혼 생각이 없어요?”

“아뇨. 그건 아니고…….”

델마도 저처럼 결혼이 싫어서 그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 그가 살짝 붉은 얼굴로 소곤거렸다.

“전 그, 사실, 공작 부인처럼, 음, 제가 좋아하는 사람하고 결혼하고 싶은데 부모님께서 자꾸 제 짝을 찾아 주려고 하셔서…….”

이 남자, 순정이 있네. 연애결혼을 하고 싶어서 여태 혼자였다는 거잖아. 그럼 연애는 좀 많이 했으려나.

델마의 고백 아닌 고백에 살포시 웃음이 나오려 했다.

“그럼 지금 델마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거예요?”

“애석하게도 그건 아닙니다.”

일이 바빠서 연애할 시간도 안 났고, 이제는 라 헬라 사람들이 너무 큰 관심을 주는 통에 부담스러워서 뭘 못 하겠다며 델마가 슬픈 얼굴을 했다. 레이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은 어떻게 만나게 되신 겁니까.”

로맨티시스트 델마에게는 열렬히 사랑하고 연애해서 결혼한 커플로 유명한 루이반 부부가 굉장히 부러운 존재였나 보다. 물어보는 눈이 반짝이는 듯했다.

“엄청 특별하진 않았어요. 그냥 연회에서 우연히 만났다가…….”

그때 마차 한 대가 근처에서 멈춰 섰다. 사람이 있는데 왜 이렇게 가까이서 마차를 세우는지 의아해할 때, 마차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델마의 인상이 와작 구겨졌다.

“아, 이런.”

마차에서 내린 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그렉!”

환하게 웃는 남자와 달리 델마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이상하다. 저 남자는 분명…….’

확실하게 기억이 나는 건 아니지만 분명 레이가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맞다면 왜 여기에 있는 것이며 어째서 델마를 보고 알은체를 하는 것일까.

이즈만 백작의 첫째 아들이자, 후계로 지정된 자다.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조만간 백작위를 받을 것이라고 했었다.

“이 녀석, 오랜만이다!”

델마와 포옹을 하는 차기 백작의 얼굴엔 반가움이 가득했다.

‘그런데 방금 그렉이라고 하지 않았나? 사람을 착각한 모양인데.’

“좀 놔. 무슨 짓이야.”

델마가 자신에게 들러붙은 차기 백작을 떼어 내고 있었다. 익숙한 모습이었다. 저보다 덩치 좋은 델마의 손짓에 툭 떨어진 차기 백작은 서운한 얼굴로 오랜만인데 이 정도도 못 하냐며 투덜거렸다.

‘아, 눈 마주쳤다.’

그때 차기 백작과 레이의 눈이 마주쳤다. 차기 백작은 잠시 놀란 얼굴을 하더니 바로 인사를 건넸다.

“루이반 공작 부인 아니십니까. 이런 곳에서 뵙게 될 줄 몰라 인사가 늦었습니다. 텔벗 이즈만입니다.”

“저 역시도 이런 곳에서 차기 백작을 만날 줄 몰랐습니다.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레이의 눈이 솔직하게도 델마와 텔벗을 오갔다. 그 눈빛을 읽은 텔벗이 바로 소개를 했다.

“아, 이 녀석은 제 동생입니다.”

“네에?”

이게, 이게 무슨 소리야? 동생이라니?

“동생이요……?”

친동생은 아니겠지? 그냥 친한 아우라는 의미로 동생이라고 한 거겠지?

지진이 난 레이의 눈동자를 보고 델마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조금 어색한 표정으로 그가 말했다.

“정식 소개가 많이 늦어 죄송합니다. 저는 그렉 델마 이즈만이라고 합니다.”

“델마가 이름이 아니라…….”

“네. 처음 헬라에 왔을 때 여기 분들이 잘못 아시고 다들 그렇게 불렀는데, 나중에도 바꿔 부를 생각을 안 하더라고요. 이제는 델마가 제 진짜 이름인 줄 아세요.”

“안 어울리니까 재밌어서 절 델마라고 부르는 거죠. 레이디께선 그ㄹ…….”

예전에 델마가 자신을 편하게 불러 달라고 했을 때, 그때 그렉이라는 이름을 말하려던 거였구나!

“잠깐, 잠깐만. 이즈만이면…….”

레이의 질문에 델마가 멋쩍은 얼굴로 웃었다.

차기 백작인 텔벗과 진짜 형제이며 이는 즉, 델마가 귀족이었단 이야기다. 이즈만가의 차남이 귀족 사회에 얼굴도 보이지 않고 다른 도시에서 살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가까운 곳에, 심지어 집정관으로 있을 줄은 꿈에도 상상 못 했다.

“어, 혹시 모르셨던 거니?”

놀란 레이의 얼굴을 본 텔벗이 조금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이 녀석아, 네가 우릴 노 아르망에만 초대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잖아!”

식구들을 하나도 초대 안 해서 다들 얼마나 서운해했는 줄 아냐며 텔벗이 다시금 델마에게 잔소리를 시작했다. 이러니까 안 부른 거라고 응수하는 델마를 보니 사이가 참 좋은 형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온다고 하고 안 온 게 몇 번이나 돼서 직접 데리러 온 겁니다. 또 안 올 줄 알고요. 이 녀석은 수도에 행사 있을 때만 모습을 보이는지라.”

델마의 머리털을 쥐어뜯듯 하던 텔벗이 손을 놓고 레이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하다못해 대연회라도 참석했어야 했다며, 집정관이 된 이후 처음 3년만 행사에 꼬박 얼굴을 비쳤지 그 이후론 수도에도 잘 안 온다고 말을 덧붙였다. 재작년부터는 가족 행사 외에는 대연회에도 안 왔다고 했다.

“간다고 했잖아. 이러니까 내가 말을 못 하는 거야.”

보시다시피 가족들이 하도 극성이라서 델마는 가족에 대해 입도 벙긋 안 했다고 했다.

“그리고 말을 하면 라 헬라 사람들이 아무래도 불편해할 것 같기도 했고, 또 작위를 받은 후계도 아닌데 굳이 말을 할 필요성을 못 느꼈어요. 본의 아니게 정체를 감추고 있게 됐네요.”

정체를 감춘다는 말이 좀 그런가. 내가 뭐 대단한 존재라고, 하며 그는 조금 떨떠름한 얼굴로 웃었다. 결혼 닦달을 한다는 델마, 아니 그렉의 부모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귀족들은 정략혼이기에 대부분 스무 살 즈음 일찍이 결혼을 한다. 결혼이 아니라면 약혼이라도 하기 마련인데, 스물다섯의 나이에 결혼도 약혼도 안 했으니 조바심이 날 법도 했다. 스물넷의 레이알렉시스도 그렇게나 늦됐다고 쪼였는데 그렉은 오죽할까.

“그런데 델마, 아니 그렉이 여기서 이렇게 사는 데에 이즈만에서 반대는 없었어요?”

레이의 질문에 텔벗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워낙 제멋대로인 녀석이라서요. 음, 사실 집정관에 덜컥 추천될 줄은 몰랐지만 보아하니 집정관 일도 썩 잘 해내고 있는 듯해서 나쁘진 않습니다.”

텔벗은 그렉이 제멋대로에 결혼도 안 해 속을 썩이는 집안 골칫거리라고는 하지만 그를 뿌듯하게 보고 있었다. 타지에서 집정관으로 좋은 평판을 얻고 있는 동생을 자랑스러워하는 눈빛이었다.

“……귀족, 이잖아요.”

수도 귀족이 라비던에서 생활 안 하고 헬라에서 집정관으로 살고 있는데, 이게 정말 괜찮은 거냐고 레이는 묻고 있었다.

“네, 귀족이죠. 그렇지만 그렉은 집정관이기도 합니다.”

별거 아니라는 듯, 귀족이 집정관인 게 뭐가 어떠냐는 말투였다. 레이는 저도 모르게 텔벗의 눈을 바라보았다.

“공작 부인께서도 지금 같은 길을 걷고 계시지 않습니까.”

같은 길. 정말 같은 길일까.

‘같은 귀족이고 집정관이니까 같은 게 맞는 거지?’

임기 끝 무렵이라 별게 다 예민해지나 보다, 하고 생각하며 레이는 잠시 스며드는 작은 위화감을 떨쳐 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