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선택 (1)
“레이, 늦었네요.”
베르니에 도착하니 입구에서 라미엘이 가장 먼저 레이를 맞이했다. 자연스레 팔을 벌리며 다가가니 그가 레이를 품에 꼭 안는다.
“오는 길에 라 헬라 집정관을 만나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느라 늦었어요.”
세 사람은 한 마차를 타고 왔다. 가는 길이니 모셔다드린다며 레이를 베르니에 내려 주고 그들은 역으로 향했다.
“라 헬라 집정관 이름이 뭔지 알고 오는 길이에요.”
“델마가 아니었나요?”
“그렉 델마 이즈만이에요.”
“이즈만? 라 헬라 집정관 성이 이즈만이라고요?”
끄덕끄덕.
“……그 집안 돌연변이라고 하던 차남이 라 헬라 집정관이었던 거군요.”
라미엘은 이해도 빨랐다. 이즈만이란 성 하나에 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밖으로만 나도는 막내아들 때문에 골치라고 하면서도 이즈만 백작은 수도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 막내아들을 두둔하는 눈치였다. 이런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형제가 전혀 안 닮아서 예상도 못 했습니다.”
“맞아요. 나란히 있는데 체스말 같았어요. 하얗고 검고. 체형도 완전히 다르고.”
검게 그을린 피부에 건장한 체격의 델마에 비해 그의 형인 텔벗은 하얀 피부에 가느다란 체형이었다. 전형적인 무인과 문인의 모습이었다.
“어, 말하고 보니 우리 이야기 같네요. 하얗고 검고 체형도 완전 다른데.”
레이의 말에 라미엘이 작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가 열아홉에 집정관이 되고 이번에 연임까지 했으니까 제법 오래 수도를 떠나 있었네요.”
최소 열아홉 전에 헬라에서 있었기에 사람들의 눈에 익어 집정관에 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렉은 사교계에 얼굴을 비치기만 하고 그대로 헬라로 내려와 살았다는 말이 된다.
막 데뷔한 수도 귀족이 혼자 헬라로 와 집정관을 했다. 루이반 공작 부인이 집정관을 하는 것보다 이즈만 백작가 차남이 더 특이해 보였다.
“어떻게 수도에 그렇게 조용할 수가 있었을까요.”
“이즈만가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여기저기 하고 있지는 않으니 물어보기 전엔 모를 수밖에요.”
작위를 받지 않는 가문의 차남 소식은 결혼 때에나 귀족 사회에 말이 나오게 되니 조용히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수도 귀족은 수도 소식에나 빠삭하지, 그 외 도시는 관심을 갖고 지켜보지 않는 한 웬만한 일이 아니고선 타 도시 소식을 접하지 않았다. 레이도 재판 때문에 알려진 것이지 만약 필레의 일만 아니었다면 그녀 역시 조용하게 넘어갔을 것이다.
그 일로 일각에서 조금 잡음이 있다는 것을 라미엘은 파악하고 있었지만, 이제 곧 레이의 임기가 끝나니 그 잡음은 소문 따위로 몸집을 키울 새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검은 레이디, 이제 집으로 돌아갈까요?”
라미엘의 권유에 레이가 대답했다.
“네, 하얀 천사님. 가요. 우리 보금자리로.”
***
관사에서 일정을 확인하던 레이가 잠시 멈칫했다. 정말로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 조만간 후보를 올리고 추천을 해야 한다.
“아직 살짝 부족한데.”
주어진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차기 집정관 후보를 정하긴 했지만 아직 인지도를 쌓아 두지는 못한 상태였다.
어떻게 해야 남은 시일 안에 사람들 눈에 남을 후보로 올릴 수 있을까. 마음이 초조해졌다.
레이가 선정한 후보 기준은 단순하면서도 명료했다.
‘제대로 된’ 민원을 넣은 자.
오디같이 자기 돈 아끼는 심부름센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뭐든 도시민에게 베풀라고 요구하는 건 민원이 아니라 단순한 진상일 뿐이다.
민원이라는 건 도시가 하는 일에 관심이 많은 자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요구 사항이다. 자신의 일과 도시의 일을 정확하게 구별할 줄 알고 무엇이 도시가 하는 일인지를 파악하고 있다는 건 행정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는 말이 된다.
그렇기에 레이는 자주 관사를 찾았던 세 사람 중 가장 명료한 관점을 가진 사람을 후보로 세우려 하는 중이었다.
필레 이후 다들 몸을 사리느라 집정관이란 직책에 질색을 했기에 설득을 잘 해야 했다. 이 도시가 다시 필레 같은 사람을 만나 고생하는 꼴은 죽어도 볼 수 없었다.
‘브리가 나섰으면 좋겠다.’
레이가 관사를 나섰다. 후보군 세 명 중 가장 가능성이 높은 이는 ‘브리’라는 사람으로,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넉넉한 인심의 소포니악 토박이였다.
브리는 양성소 수업이 자리를 잡고 일반인 등록을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자신의 두 딸을 수업에 등록시켰고, 헬라 외 도시의 소식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곤 했다.
이만큼 좋은 후보는 없기에 그간 브리가 나서게 하려고 조금씩 작업을 해 뒀는데, 오늘만큼은 의중을 묻고 확답을 받아 둬야 했다.
“제가 할 수 있을까요.”
브리는 레이의 제안에 처음엔 무척 놀랐다가 차분한 설득에 반쯤 넘어온 상태였다.
“아시다시피 저는 그냥 아이 엄마고…….”
“집정관은 브리 같은 사람이 가장 잘 어울려. 내가 만난 소포니악 사람 중에서 브리만큼 명확하게 이 일을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어.”
레이의 말에 브리는 잠시 주저하다가 말을 이었다.
“오디가 집정관에 나서려고 한다는데요. 저는 그 사람처럼 재산도 없고 여잔데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
“오디가 뭘 한다고?”
오디가 최근 도시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인지도를 쌓고 있다고 했다. 지역 유지로 유명하나 도시 일에는 내내 조용하기만 했던 자가 이번 기회에 열심히 자신을 알리고 다니는 중이라고.
마뜩한 후보자를 떠올리지 못하던 소포니악은 휩쓸리듯 오디에게 힘을 주고 있는 상황이었다.
오디가 은밀하게 돌아다닌 탓에 레이가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후보를 키울 것만 신경 썼지 누군가가 뒤에서 조용히 수작을 부리며 다닐 줄은 몰랐다.
다들 집정관 자리를 달가워하지 않아 예상하지 못한 후보가 나올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갑자기 오디가 튀어나왔다.
레이는 양해를 구하고 브리의 집을 나왔다.
‘큰일인데.’
브리의 인지도가 오디에 비해 너무 약하다. 이대로 가면 보나 마나 당선은 오디가 될 터인데 그 사람은 안 된다. 그는 소포니악을 필레 시절처럼, 이전 상태로 돌려놓을 자다.
그 오랜 시간 도시에 무슨 일이 있어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필레가 내쫓기는 상황에서도 침묵했던 자다. 사건이 모두 일단락되고 상황이 안정되고 나서야 모습을 드러내선 세금으로 자기 집을 고쳐 달라 말하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하루아침에 개과천선해서 이 도시를 위해 애쓸 일은 결코 일어날 리 없다.
‘이제 겨우 수습되어 가는데 다시 되돌릴 순 없어.’
이 도시에 애정이 조금만 덜했어도 이렇게 가슴 철렁한 기분이 느껴지진 않을 것이다. 몇 개월간 겨우 틔워 낸 움이 작은 꽃봉오리가 되기도 전에 짓밟히는 기분이다.
잠시 길에 서서 고민을 하던 레이는 빠른 걸음으로 관사로 향했다.
***
며칠 동안 레이는 역대 도시 기록물을 샅샅이 뒤졌다. 조이먼까지 찾아가서 도시 기록을 살피던 그녀는 오디를 막을 한 가지 방법을 찾아냈다.
‘임시가 아니라 정식으로.’
지금 현재로서 오디의 당선을 막을 수 있는 건 오직 본인뿐이다. 능력도 인지도도 월등했다.
두근두근. 심장이 뛰었다.
그 누구에게도, 라미엘에게도 아직 말하지 못한 일.
노 아르망 때, 레이는 집정관이 되고 싶다고 자각을 했다. 정식 집정관이 되어서 임시라고 자신을 무시하던 자들에게 보란 듯 다음 노 아르망에 참석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공작 부인이라는 지위가 걸려 차마 내뱉지 못하고 마음속에서 이내 지워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생각일 뿐, 한편에 살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라엘.”
섣불리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일은 아니기에 함께하는 이에게 반드시 소식을 전해야 한다. 이 계획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기에 결심을 알리는 데엔 준비가 필요했다.
정식 집정관을 뽑는다는 공고가 소포니악 도시 한가운데 붙었다. 지원자들은 후보 등록을 하라고 알리는 필경사는 바로 티아였다. 양성소 1호 필경사의 탄생이었다.
가장 먼저 양성소를 졸업한 그녀는 소포니악 고정 필경사로 취업을 했다. 티아와 함께 수업을 시작했던 나머지 사람들도 곧 졸업을 앞두고 있었고, 가까운 라 헬라나 헬라 역 등에 필경사로 속속들이 취업문을 두드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간 쌓아 온 것들의 결과물이 보이기 시작하자 더더욱 이 일에 보람이 느껴졌다. 앞으로의 목표는 이 작은 도시 소포니악에 글을 모르는 이가 없도록 하는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집정관이라는 과제를 해내야 했다.
“라엘. 할 말이 있어요.”
평소보다 일찍 루이반에 온 레이는 자신의 선택을 알리기 위해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하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 심상치 않은 기운에 라미엘은 자세를 좀 더 바로잡고 앉아 레이의 말을 기다렸다.
한참 동안 말을 않던 레이는 이내 결심한 듯 눈빛을 굳히고 그와 마주했다.
“나 소포니악 집정관, 하고 싶어요.”
요 며칠간 레이는 무언가에 골똘히 파묻혀 있었다.
레이가 선정한 후보보다 인지도가 높은 다른 이가 등장했는데 그가 영 신통치 않다는 건 알았다. 그 일로 레이가 제법 골머리를 썩을 건 알았으나 이런 결과물을 들고 올 줄 라미엘은 상상하지 못했다.
“그 오디라는 사람, 해결이 안 된 겁니까.”
“네. 날 만나지도 않고 내내 피하더니, 몰래 후보 신청을 해 버렸더라고요.”
“……그래서 당신이 나설 수밖에 없다?”
언제나처럼 웃으며 당신 하고픈 대로 하라고 말하는 라미엘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굳은 얼굴의 그를 바라보게 될 줄은 몰랐다.
반대. 자신의 선택에 대해 선명히 떠오르는 반대였다.
“네. 일단은요.”
“그 일단이 5년인 건 알고 하는 소립니까.”
집정관 임기는 5년이다. 5년 동안 지난 3개월 동안 그랬던 것처럼 휴일에나 함께 있는 채로 지내야 한다는 말이다.
“내가 지난 기록을 찾아봤는데…….”
“레이.”
라미엘이 단호한 음성으로 레이의 말을 끊고 그녀를 불렀다.
“네.”
“그들은, 소포니악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뭘 할 생각이 없습니까. 모두 레이알렉시스한테 매달려 당신의 선의만 바라는 건가요?”
“그건…….”
라미엘이 레이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제법 길어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당신이 필요한 건 그들뿐만이 아니야. 나도, 루이반도 당신이 필요해.”
라미엘의 말에 레이는 잠시 눈을 감았다. 눈앞의 천사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손으로 살며시 뺨을 감싸는 게 느껴졌다.
“이 이야긴 나중에 다시 해요. 지금은 내가 준비가 안 된 것 같으니.”
라미엘이 한발 물러섰다.
“당신이 루이반 공작 부인이란 걸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한발 물러난 게 아니란 걸 레이는 알았다.
“……잊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