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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138화 (138/160)

138화. 내 이름은

라미엘을 떠나겠다고 한 적은 결코 한 번도 없었다. 그런 기색을 내보인 적도 없다고 여겼는데 라미엘은 불안을 내비치며 지금 매달리고 있었다.

‘내 사랑이 부족했나.’

무엇이 이 남자를 이렇게 불안하게 하는 건지 도저히 가늠이 되질 않았다. 레이는 라미엘을 바라보았다.

‘아니, 아니야. 불안이 아니라…….’

약간의 침묵 뒤 레이가 입을 열었다.

“라엘.”

최종 선택을 눈앞에 뒀다. 시간은 없고 언제까지나 이 일로 라미엘과 토론을 벌일 수는 없는 일이다.

레이는 라미엘의 대답을 듣고 나서 결정을 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잠시 소문은 접어 두고, 당신은 내가 왜 공작 부인 일과 집정관 일을 겸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동안 내가 보인 모습이 많이 부족했나요?”

추궁하는 말이 아니었다. 정말 순수하게 레이는 그에게 궁금한 것을 묻고 있었다.

그 질문에 이번엔 라미엘이 침묵했다. 머릿속을 정리하고 수런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대답을 정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레이는 잘했다. 너무 잘 해내는 그 뛰어난 능력이 문제였다. 후보에 오르면 레이의 예상대로 당선은 확정될 것이다. 그게 라미엘에겐 가장 걸리는 일이었다.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지금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저녁 시간에만, 휴일에만 온전히 함께 있는 걸 부부라고 할 수 있나. 이전처럼 당신과 나만 생각하고 싶다는 이기적인 마음이었다.

자신의 마음 기저에 깔린 진실이 그랬다. 사람들이 뭐라고 떠들든, 소문 같은 건 애초에 신경도 쓰지 않았는데 굳이 끌어와서 레이를 잡으려는 이유는 고작 이거 하나. 레이가 온전히 자신에게 속하길 바란다는 지질한 마음이었다.

이걸 레이에게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자신도 여느 남자들과 다름없이 두렵고 무서워서 당신을 잡아 두려고 한다는 사실을.

“……지금 같은 상황, 더 길게 못 버텨요. 내가 당신 없는 걸 견딜 수가 없어.”

말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말이 나왔다. 당신의 능력을 알고 있고 그걸 높이 사면서도, 그걸 위한 법안까지 상정하려면서도 정작 자신은 아직 완벽히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나만 온전히 품어 줘요.”

이런 자신의 밑바닥을 내보이는데도 두려우면서 두렵지 않은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자신의 바닥을 드러내도 괜찮은 유일한 존재기에, 자신의 하나뿐인 반려라서 절대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란 자신감과 이 일로 자신을 보는 눈이 이전과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상대 의중에 대한 두려움이 공존했다.

“이리 와요. 내 예쁜 천사.”

오라고 말을 했지만 레이는 본인이 더 가까이 다가와 라미엘을 꼭 양팔로 껴안았다.

예상이 맞았다. 라미엘은 불안한 게 아니라 그저 레이알렉시스를 너무 좋아하는 것이었다.

“일단 내가 너무 뛰어나서 미안해요.”

레이의 진심 어린 사과에 심란한데도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또 미안해요. 내가 더 많이 표현해야 했나 봐.”

언제나처럼, 평소처럼 그의 얼굴에 비처럼 가벼운 키스가 쏟아져 내렸다. 레이는 그의 마음을 확실하게 읽어 내고 다독이고 있었다.

“레이는 왜 이렇게 집정관이 되고 싶은 겁니까? 정말 그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고 싶어서가 아니잖아요.”

라미엘을 토닥이며 레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레이알렉시스 집정관은 이름이 있잖아요. 루이반 공작 부인에는 없는 내 이름이.”

레이의 말에 잠시 라미엘이 숨을 멈췄다.

가문 앞에 지워진 이름. 이는 테가푸스에서 나왔던 이야기였다.

레이가 집정관이 되고 나서 회원들은 타 도시에 눈을 돌리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지난 역사에서 지워진 여성들을 찾기 시작했다. 이런 사람들과 아내 옆에서 여성 작위를 위한 법안을 이끄는 당사자가 당신만을 갖겠다고 투정을 부리고 있는 셈이었다.

라미엘은 레이를 더 꼭 껴안고 고개를 묻었다.

“루이반이 싫은 건 절대 아니에요. 나는 이 가문도 정말 소중해요. 그건 알죠?”

끄덕끄덕.

“라엘이 말한 것처럼 나는 루이반 공작 부인이에요. 정말 대단한 위치라는 것, 알아요. 이 역할도 허투루 하고 싶지 않아요. 다만 당신이 내 사업체를 지켜 주는 것처럼 나도 내 이름을 지켜 내고 싶은 거예요. 잠깐일지라도.”

그 잠깐의 이름도 루이반의 위명에 지워지는 것 같지만 소포니악에 있으면 적어도 레이알렉시스 집정관으로 나설 수 있다. 어쩌면 자신은 온전히 자기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가문에 가려지지 않는 그 직책에 마음이 끌리는 것이리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난 그 도시가 너무 좋아요. 그게 망가지는 꼴은 도저히 못 보겠어요. 지금 내 이름이 걸려 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선에 있는데도 그 도시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게 될까 봐. 그 꼴은 도저히 못 볼 것 같아서 그래요.”

사랑하는 그 작은 도시가 적어도 자신의 손을 타고 있는 지금만큼이라도 이전과 달리 활기차게 돌아가는 모습이길 바랐다.

“약속해요. 절대 오래 걸리지 않아요. 내가 당신을 두고 어딜 가겠어요. 어떻게 가.”

레이는 지난번에 말하지 못했던 계획을 라미엘에게 차근차근 들려주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수도 있는 기간의 계획.

“……어쩌면 원래 계획된 예정보다 빨리 끝날 수도 있고요.”

집정관이 되고 사퇴를 하겠다니. 번거로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레이는 하겠다고 한다.

법으로 정해진 바는 없지만 기록에 남아 있는 집정관의 사퇴는 최소 1년 임기를 채우고 나야 가능했다. 지금 생활을 앞으로 1년 동안 연장하겠다는 셈이었다.

“그렇게 해서 레이 당신에게 남는 건 뭔가요.”

“많이 남죠. 정식 여자 집정관이고, 차기 집정관도 그럴 거예요. 이건 앞으로 리담에서 중요한 선례가 될 거고, 또 지금 같은 공작님 투정을 언제 보겠어요?”

라미엘이 더 꼭 레이를 껴안았다. 레이는 그를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내가 앞으로 소포니악을 편히 바라볼 수 있다는 거예요.”

소포니악을 향한 애정이 레이를 움직이게 하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자신을 향하는 레이의 마음과 도시를 향하는 레이의 마음은 서로가 전혀 다른 성질의 애정이었지만, 기실 라미엘은 그마저도 갖고 싶었다. 다른 일에 신경 쓰지 않고 자신처럼 온전히 하나로만 향하는 애정을.

매달려도 소용없고, 그랬기에 더 간절한 레이의 일부. 그렇지만 이런 부분이 있기에 레이가 빛나는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이런 사람이다. 본인의 주변도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 이 사실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는데, 알면 알수록 욕심이 나는 이라 잠시 눈이 멀었나 보다.

“도시는 원래 살던 사람들에게 돌려주고 외부인은 빠져야죠.”

온전하게 자신의 이름으로 서 보고 싶다는 최초의 여성 집정관은 애정 있는 대상을 향해 반짝이는 사람이었다. 이 빛을 잠시의 욕심 때문에 거두려고 했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레이를 어떻게 더 말릴 수 있겠어요.”

우리 공작 각하가, 이 대단한 루이반 공작이 매달리는 모습은 아마 다신 보지 못할 것이다. 저만을 바란다는 애정이 불안하게 흔들리지 않도록 이것에도 역시 최선을 다하고 싶다.

“나 당신 거야. 라엘 말대로 우리 계약도 남았잖아.”

아직 명시한 계약 기간인 1년이 다 지난 건 아니었지만, 절대 서로에게 반하지 않는다는 마지막 항목에서 이미 서로가 위반자였다.

“라엘, 유책임자는 상대에게 완수금 두 배 지불인데 우리 누가 먼저 반했죠?”

“레이 아니었나요? 결혼식 날, 제대로 고백받은 것 같은데.”

“그, 그건……. 라엘이야말로 나한테 반해서 마린의 거미줄 사 준 거 아닌가. 누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한테 그런 거금을 써요?”

그저 농담처럼 지난 시간을 더듬어 보는 것뿐, 순서와 감정의 크기를 따지는 것도 모호하고 불필요한 일이었다. 자연스레 서로에게 조금씩 스미고 빠져들었다.

“우리 서로에게 위약금 지불해야겠는데요. 둘 다 반했으니까.”

레이의 말에 라미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은 이미 실효됐지만 둘을 이어 준 최초의 약속이니 일단 그대로 두고, 계약이 종료되는 날 계약서를 꺼내 보기로 했다.

“앞으로 라엘 마음에 조금이라도 불안이 스미면 바로 이야기해요. 당신이 흔들리면 내가 더 아프니까.”

잔잔하게 다독이는 레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라미엘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

소포니악에 희소식이 생겼다. 레이알렉시스 집정관이 정식으로 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이었다.

소포니악 사람들 사이에 앞으로도 루이반의 가호를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가 치솟았다. 이대로 루이반 공작령이 되는 게 아니냐는 헛소리도 종종 나올 정도로 루이반이라는 이름이 소포니악을 거세게 흔들고 있었다.

레이는 오로지 소포니악을 위해 ‘레이알렉시스’로 나왔으나 이 도시도 레이 너머의 루이반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사람들이 거는 루이반이라는 기대치에 지금까지 소포니악을 열심히 이끌어 온 레이의 노력과 능력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이는 레이가 가장 염려하던 부분이었다.

그래도 집정관으로 함께 지내 온 시간이 있으니 자신의 능력을 알아봐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임시였기 때문에 루이반을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이었고, 정식으로 후보에 지원하자 사람들은 레이를 지난 임시 임기를 잘 이끌어 온 집정관이 아닌 루이반 공작 부인으로 보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상대 후보인 오디만이 루이반과 레이를 따로 보려 애쓰고 있었다.

“루이반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거잖아. 사람을 보라고! 사람을!”

다만 오디는 레이가 루이반 덕에 임시 집정관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뿐이고, 추천에 루이반을 이용한다며 길길이 날뛰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 긍정적인 시각은 아니었다.

루이반 때문에 임시 집정관이 되었다는 시선과 앞으로 이 도시가 루이반 덕을 보겠다는 희망의 시선 두 가지가 집요하게 레이에게 따라붙었다. 전자는 대강 예상할 수 있는 부분이었지만 후자는 예상보다 훨씬 더 당황스러웠다.

레이가 집정관이 되는 건 좋은 일이지만 만약 루이반 덕분이라는 기록이 남는다면 그건 앞으로의 일에 좋은 선례가 되지 않는다. 여성도 잘할 수 있다는 기록이 생기는 게 아니라 여성도 정치에 가담을 시키는 루이반이라는 대단한 가문만 남게 될 건 불을 보듯 뻔했다.

여성인 레이알렉시스가 오롯이 실력으로, 순수한 지지로만 정식 집정관이 되기 위해서는 루이반이라는 꼬리표를 떼어 버려야만 했다. 레이를 믿어 주고 라미엘의 법안을 지지하는 이들을 위해 그래야 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은 보이질 않았다. 일단 버텨 보면 훗날 달라지지 않을까, 하고 희망적인 가정을 해 봐도 그건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기에 애석할 따름이었다.

집정관 추천일까지 앞으로 남은 시간은 고작 10여 일. 뭘 할 수도 없는 시간이었다.

“그냥 포기하려고요.”

레이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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