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레이, 우리
처음으로 관사에 온 라미엘은 커다란 책상을 사이에 둔 맞은편의 레이를 바라보았다.
라미엘이 소포니악에 오면 더더욱 있지도 않은 루이반의 영향력이 커질 것 같아 부르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소포니악이 기정사실이라도 된 것처럼 루이반을 들먹이니, 라미엘이 모습을 드러내든 말든 상관이 없을 것 같아 레이는 이번 기회에 그를 정식으로 초대했다.
레이가 머무는 곳에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던 그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해가 넘어간 늦은 시간에 최대한 조용히 찾아와 레이를 만났다.
관사엔 레이 혼자였다. 도베는 퇴근했고 케이와 엘은 라미엘이 오고 나서 자리를 비켰다.
보고로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인 레이의 관사는 루이반 집무실에 비할 바 없는 소박한 공간이었지만 책상만큼은 뒤지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크기였다.
“레이 입에서 처음으로 듣는 소리군요.”
라미엘의 말에 레이가 책상을 빙 돌아 그 옆으로 와서 앉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놓는 법이 없던 레이가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인지 포기를 외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수가 없어요. 뭐, 내가 루이반인데 어쩔 수 없잖아요. 물러날 때까지 최대한 루이반과 이곳의 일은 별개라는 걸 알려야 하겠죠.”
루이반이 보통 가문이 아니란 걸 알았지만 매일 새삼 확인하는 기분이었다. 제 이름으로 나서고 싶단 소망으로 집정관에 올랐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더 루이반의 그림자가 진해졌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수가 없으니 이번만큼은 어쩔 도리가 없다.
“레이, 당선은 확실해요?”
장난스러운 물음에 레이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럼요. 소포니악이 루이반 공작령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생길 지경이에요.”
“레이가 날 버리고 갈 만큼 레이알렉시스로서 하고 싶던 일인데 지금 루이반이…….”
라미엘의 말에 레이가 질겁했다.
“어머, 어머. 라엘, 무슨 소리예요. 버리긴 누가 버렸다고.”
레이가 라미엘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당신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아이, 진짜 루이반 공작 각하 이런 분 아니신데.”
“어떤 분이신데요?”
“버려질 일 같은 건 당연히 없지만, 혹시라도 버려진다면 당장 주인을 찾아와서 네 거니까 가져가라고 할 분이세요.”
라미엘이 작게 소리 내 웃었다.
“……그럼 당신은? 레이는 내가 헤어지자고 하면 어떨 것 같아요?”
지난번에 투정을 부린 이후 레이가 부쩍 자신을 신경 써 주고 있는 걸 라미엘도 알았다. 지금 관사에 오게 된 것도 그 일환이었다.
흔들림 없이 자신을 잘 품어 주는 이에게 아직 덜 자란 아이처럼 다른 것에 대한 애정까지 달라고 졸라 대 상대를 당황하게 만들고는, 그 여파로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자신을 챙기게 만들었으니 여간 미안한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그런 못돼 먹은 소릴. 상상도 하기 싫으니까 그런 말 꺼내지 마요. 내가 어떻게 당신을…….”
이 남자가 정말. 내가 소포니악을 좋아한다고 해서 이런 말을 할 정도로 돌아 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레이는 가정으로나마 헤어짐이란 단어를 꺼낸 라미엘을 조금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혹시나 자신이 믿음을 더 주지 못했나, 하는 작은 후회의 빛이 그녀의 눈에 어렸다.
레이를 이렇게 겁먹게 만든 건 전부 라미엘 자신이다. 그러니 자신도 앞으로 레이가 불안해하지 않도록 열렬히 마음을 표현해야 했다.
“레이에게 소포니악을 위한 계획이 있는 것처럼, 내게도 당신에 대한 계획이 하나 있어요.”
그날 이후 라미엘은 레이가 온전히 본인 이름으로 설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레이가 마음먹고 하고자 하는 일이다. 어설프게 완성하기보단 완벽하게 잘 해내고 돌아와야 레이는 마음에 티끌 한 점 남기지 않을 것이기에 고심 끝에 어렵게 내린 결론이었다.
이 계획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부터가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지금 자신과 레이를 둘러싼 상황을 이용해 앞으로 남은 짧은 시간 단숨에 루이반을 지울 수 있는 길이자, 루이반의 이름을 떼기 위한 단 하나뿐인 유일한 방법이었다.
“……레이, 우리 이혼할까요.”
***
라비던 귀족들에겐 루이반 공작 부인이 소포니악 집정관이라는 놀라운 사실 외로 떠오르는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
임시라고 해도 그녀는 엄연히 노 아르망에 참가한 소포니악의 집정관이다. 그렇다는 건 공작 부인은 현재 소포니악에 머무르고 있다는 말이 되는 셈이다.
누군가 대놓고 이 주제를 꺼내진 않았지만 언젠가 분명 물꼬를 틀 말이었고, 그게 지금이었다. 황실에서 휴일을 언급하자 자연스레 루이반 공작 부부의 일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바 후작가 티파티에서 요즘 가장 뜨거운 주제이며 다들 말하고 싶던 루이반이 거론되었다.
“그런데 이번에 루이반 공작 부인이 아예 정식 집정관을 하겠다는 소문이 있던데.”
“세상에. 그럼 정말 별거…… 아닌가요?”
모두가 생각은 했지만 입 밖으로는 꺼내지 못한 단어였다. 하지만 지금 이야기를 들어 본다면 이만큼 딱 맞는 단어도 없다.
루이반 공작 부인은 공작과 따로 떨어져서 살고 있다. 휴일에는 만나는 것 같지만 일주일에 고작 하루만 같이 있는 부부는 리담에서 전례 없던 특이한 상황이었다.
“한 달에 네 번만 함께 있는 부부…… 인 거죠?”
“그걸 부부라고 할 수 있나요?”
처음에야 꺼내기 눈치 보이던 별거란 말이 한 번 꺼내니 뒤로는 자연스레 나왔다.
“별거 중인 걸 숨기려고 휴일에 오는 걸까요?”
“별거가 어떻게 숨겨지겠어요. 공작 부인이 집정관이라는 사실이 확실한데.”
“그것도 그러네요. 아, 이럴 때 하필 마그스너 영애가 공석이네요.”
본디 일곱이 모였어야 하는 티파티는 가장 먼저 초대장을 받은 케이틀린이 참석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고사해서 여섯이 모인 상태였다.
“마그스너 영애요?”
“네. 루이반 공작 부인하고 꽤 친분을 쌓은 모양이더군요.”
이 자리에는 케이틀린을 절친이라 여기는, 일명 케이틀린 수호대 세 명도 있었다.
그들이 마그스너 영애와 친분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시선을 보냈다. 너희 뭐 정확한 걸 들은 게 없니, 하는 눈빛이다.
“최근엔 저도 마그스너 영애와 자주 만나진 못해서…….”
스태너스 백작 부인, 클레어의 말에 그녀 옆에 앉은 두 사람도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틀린은 툭하면 파티를 고사했고, 저택에 없었다. 이번 노 아르망에 초대된 사람들이 그곳에서 케이틀린을 만났다고 했는데 그뿐이었다. 요즘 사석에서 마그스너 영애를 봤다는 자는 없었다.
케이틀린이 주최하는 티파티 단골 초대 손님이자 그녀의 절친이라 자부하는 클레어와 조아나, 바바라 셋은 최근 부쩍 소원해진 케이틀린에게 조금 서운해하던 차였다.
“혹시 라미엘 님의 법안 발의 이후 아닌가요?”
“마그스너 후작가에서 유일하게 찬성했잖아요.”
“유일한 지지자네요?”
“공작 부인과는…… 별거 중이시고 마그스너 영애는 유일한 루이반 공작의 지지자이며, 요즘 자주 안 보이고. 이건…….”
이바 후작 부인의 말에 다들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어머, 그건 너무 가신 것 아닐까요.”
“설마요. 그럴 리가.”
“공작 각하 결혼 전에 두 분이 워낙 유명했던지라 제가 실언을 했네요.”
다들 입 밖으로 소리 내어 표현만 안 했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일단 말로는 말렸지만 이건 그저 시늉일 뿐, 오랜만에 흥미로운 가십 거리가 생겨 흥이 올랐다.
이는 비단 여기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만 오가는 말이 아니었다. 다들 알게 모르게 슬쩍 루이반 부부의 별거를 조금씩 입에 올리고 있었다.
“루이반 부부야 서로 열렬한 걸로 유명한데 무슨 일이 있겠어요?”
“그렇게 열렬한데 왜 부인이 소포니악에서 사는 걸 말리지 않으셨을까요.”
“그야 좋아하니까 안 말리신 게 아닐까요?”
“그건 말이 안 되죠. 좋아하면 옆에 둬야지, 지금 별거하는데?”
“임시로 하는 일이니까 잠깐 동안은 괜찮은가 보죠.”
그때 조아나가 목소리를 낮추고 부채로 입을 살짝 가리듯 하며 말했다.
“전에 그 소문 잠깐 돌았었죠? 공작 각하께서 작위를 받으려고 일부러 한미한 가문 영애와 계약 결혼을 했던 거라고.”
조아나의 말에 모두가 기억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맞다. 분명 공작의 결혼 때 저런 말이 있었다.
“아, 맞다! 저번에, 저번 태자비 전하 임신 축하로 봄맞이 연회 때, 보베 후작 부인께서 그 두 분께 후계를 물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지목당한 보베 후작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때 두 분이 후계에 별생각이 없어 보이시길래 빨리 말을 거두긴 했었죠.”
“루이반은 손이 귀하지 않나요? 지금도 남아 있는 그럴싸한 혈육이 있는 것도 아닌데…….”
“사이가 좋은데 2세 소식은 없고. 별거까지. 이거 정말 이상하긴 하네요.”
모두에게 잊혔던 소문은 좀 더 확신이 붙어 다시 살아났다. 다들 조심하는 주제였기에 지난날처럼 대놓고 표면에 떠오르진 않았지만, 루이반 부부 계약 결혼설은 다시금 귀족들 사이를 조금씩 떠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소문은 이내 한 가지 사실이 드러나면서 일파만파 퍼졌다.
루이반 공작 부부가 이혼 서류를 준비했다는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