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공작 부부의 이혼
루이반 공작은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는 헛소문이라고 일축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루이반에서 이혼 서류가 발견됐다는 이야기가 나온 뒤, 단 하루 만에 온 수도를 뜨겁게 달군 이혼 소문에 대해 그 어떠한 공식적인 조치도 취하지 않았으며 거의 방관하듯 사태를 전망했다.
소문이 이렇게 떠들썩한데도 여전히 루이반 공작 부인은 소포니악에 있었으며 꽤나 껄끄러운 온갖 소문이 들려오는데도 별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황실에선 혹시 별말씀 없으신가요?”
만나는 사람마다 대화 주제는 루이반의 안부였다.
“원래 이혼이 확정되기 전까진 절대 외부에 발설 안 하잖아요.”
귀족들은 혼인하기는 쉬워도 이혼하기는 어렵다. 이혼 서류를 황실에 올리고 승인이 될 때까지 최소 한 달에서 세 달 이상은 걸렸다.
혼인 땐 서로의 혼약서만 있으면 됐지만 이혼할 땐 재산 분할이나 유책 사유 등을 확인하기 위해서 여러 사항을 체크해야 했기 때문이다. 황실이 검토한 뒤 최종적으로 당사자 둘을 불러 확인한 뒤에야 이혼은 완료되었다.
귀족들의 혼인은 가문과 가문의 일이다 보니 이혼은 확정이 되기까지 황실에서 절대적으로 함구하는 영역이었다.
보통은 이혼 과정이 시작되면 부부가 별거를 하고 상대방 책임으로 몰기 위해 서로를 비난하는 경우가 많아 분위기로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당사자들이 입을 다물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알 길이 없었다.
“이미 서류가 올라가 있을 수도 있죠.”
“이혼 서류를 본 건 확실하대요?”
대답하는 이가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말했다.
“루이반 하녀가 빨랫감 사이에 떨어진 이혼 서류를 봤다나 봐요. 하필 그 하녀가 글을 읽을 줄 아는 애라서…….”
“세상에, 그럼 루이반에서 흘러나온 거란 말이에요?”
사람 관리 철저하기로 유명한 가문에서 직접 나온 소문이라는 말에 다들 이혼을 확신했다. 관리가 허술해졌다는 건, 평소처럼 관리하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귀족의 이혼은 치열하다. 특히나 가문이 크고 가지고 있는 것이 많을수록 더더욱 지저분해지고 장기화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루이반이니 오죽할까.
앞으로 벌어질 일은 잔잔하던 라비던에 그야말로 흥미로운 안줏거리였다.
그 와중에 열린 황실의 큰 행사에 루이반 부부는 따로 오는 모습을 보였다. 연회장에서는 평소처럼 애정 가득하고 친한 모습을 보였지만 이건 누가 봐도 눈속임일 게 뻔했다. 이혼 소문이 났는데 같이 올 생각도 않고 따로 와서 친한 척이라니.
귀족뿐만이 아닌 라비던의 모든 이들이 모이기만 하면 쉬쉬하지도 않고 루이반 이혼을 이야기하는 탓에, 당연하게도 수도로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많은 헬라에도 그 소식이 전례 없이 빠르게 흘러들어 오게 되었다.
***
모두가 잠자리에 들기 시작하는 조금 늦은 시간이었지만 이 시간에 본인 연구를 끝내는 헤덴을 만나기에는 지금이 적격이었다.
“예하, 괜찮으세요?”
레이는 푸둥 때문에 오랜만에 대신전을 찾았다. 툭하면 푸둥이 허공에서 나타나곤 하는 걸 보아 아무래도 게이트 설정에 이상이 있는 듯했다.
푸둥이 아무리 드래곤이고 하늘을 통해 이동한다고 하지만, 실내에 갑작스레 나타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늘을 걷다가 창문을 통해 실내로 들어오는 게 더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푸둥은 갑자기 실내 공간에서 뿅, 하고 튀어나왔다.
“불쑥 찾아와선 그게 무슨 소리냐.”
오밀조밀 귀염상 얼굴엔 여전히 주름 하나 보이지 않았고 투덜거리는 말투 역시도 그대로였다. 헤덴은 별 이상이 없어 보였다.
“푸둥이 게이트가 자꾸 이상하게 열려서요. 혹시 어디 편찮으신 건 아닌지 걱정이 돼서 와 봤어요.”
레이의 말에 헤덴은 별 희한한 소릴 다 듣는다는 얼굴을 했다.
“별일 없으셨구나.”
“푸둥 게이트라니. 그 녀석 게이트 안 쓴 지 꽤 됐는데?”
“네?”
“그 짐승이 울프 드래곤인 걸 잊었느냐. 하늘을 나는 놈인데 무얼 그리 놀라. 개랑 같이 키운다더니 진짜 개라고 믿는 건 아니지?”
상대를 한껏 바보 취급하는 저 눈빛을 보니 헤덴은 여전했다.
‘그래. 아마 헤덴 예하는 나보다 더 오래 사실 텐데 내가 별 걱정을 다 했네.’
그런데 푸둥은 어떻게 갑자기 허공에서 툭툭 나타나는 걸까. 하늘을 나는 거지 공간을 가르는 게 아닐 텐데.
그런데 레이가 궁금한 걸 묻기도 전에 헤덴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부르려고 했는데 어쨌든 잘 왔다.”
“저를요?”
“하늘 다리 연구에 큰 성과가 생겨 네게도 알려 주려고 하던 참이었다.”
이전에 했던 약속이라 새카맣게 잊고 싹 무시하고 있을 줄 알았다.
“……이세계 연구 결과에 성과가 나오면 저에게도 모두 알려 주세요.”
놀랍게도 헤덴은 레이가 말해 달라던 그 약속을 지키는 모습이었다.
본래의 헤덴이었다면 진즉 잊어버리고 끝났을 일이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주요 연구 자료가 레이가 준 흑단 같은 머리카락이다 보니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어떤, 어떤 일인데요?”
레이가 반색하며 눈을 빛내자 헤덴이 피식 웃었다.
“하늘 다리에 색을 입혔어.”
“네에에?”
그게 가능한 일인가. 하늘 다리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데다가 그 수는 무수히 많다고 했다. 그중 이세계로 가는 입구는 몇 개 되지도 않고 그마저도 고정된 위치가 아니라 계속 움직인다고 했다.
그래서 최고난도의 어려운 연구가 하늘 다리라고 들었는데, 그 형체도 없는 것에 색을 입혔다니. 말을 듣고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세계 추적은 아직 못 끝냈고, 대신 2단계 게이트형 하늘 다리에서 공조하는 것 한 쌍을 찾는 데 성공했단다.”
“게이트요?”
헤덴은 잠시 ‘내가 이것까지 설명을 해 줘야 하나?’ 같은, 짜증이 설핏 지나간 표정을 했지만 이내 차근히 설명을 했다.
하늘 다리엔 세 종류가 있다.
하늘에 디딤돌처럼 존재하는 보통의 하늘 다리, 특정한 한곳을 밟으면 다른 한쪽으로 공간 이동을 할 수 있는 한 쌍으로 이루어진 게이트형 하늘 다리, 그 게이트형 하늘 다리의 최종 형태인 이세계를 연결하는 하늘 다리의 세 가지였다.
보통 세 가지를 단계로 구별해 부르는데 2단계가 게이트형, 3단계가 이세계였다. 당연하게도 1단계 보통의 하늘 다리가 대부분이고 2단계는 지금까지 확인된 하늘 다리의 약 10퍼센트 정도, 3단계는 비교적 최근에 이세계 통로가 있다고 확인이 된 정도여서 숫자 파악이 정확히 되진 않았지만 극히 드문 경우라고 했다.
“투신자살을 시도했지만 살아난 경우는 하늘 다리에 한 번 걸린 경우야. 한 끗 차이로 누군 떨어져 죽고 누군 살고 하는 게지.”
“예하, 예시가 너무 과격하세요.”
“……절벽에서 떨어졌는데 어떤 놈은 팔 하나 안 부러지고 멀쩡한데 어떤 놈은 죽, 온몸이 다 부서지더라. 어라, 이건 아가 조련사 네 얘기 아니냐.”
사냥제 때의 실족을 기억해 낸 헤덴이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과 케이틀린은 긁힌 상처를 빼면 온전했다. 아마 떨어지면서 나뭇가지 말고도 하늘 다리에 몇 번 걸러져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수시로 계속 위치가 바뀌는 탓에 그걸 잡아 두느라 몇 년을 고생했는데 이제 표식을 남겨 본 셈이지.”
“저도 볼 수 있는 거예요?”
이 녀석이 준 머리카락으로 연구에 박차를 가하게 됐으니 이 정도 성의는 보여야 할 것 같다는 인도적인 차원은 아니었다. 극비에 극비인 사실이지만 이전에 약속한 것도 있고, 언젠가 또 도움을 받게 될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계산이 깔려 있어 밝히는 것이었다.
“……이리 오거라.”
신기하고 또 신기했다.
헤덴이 보여 준 2단계 하늘 다리는 형태가 없었지만 색이 보였다.
여러 선들이 복잡하게 얽히고 연결된 커다란 유리 공간 안에는 아주 희미하고 옅은 보랏빛 허공 두 덩어리가 둥둥 떠 있었다.
보랏빛 허공이라고 하니 이상하지만 이런 말 말고는 표현할 길이 없는, 특이한 광경이긴 했다. 허공인데 집중해서 자세히 보면 특정 부분이 희미한 보라색으로 보였다.
“하늘 다리 간의 연결성을 연구하다 보면 이세계의 연결점도 찾을 수 있겠지.”
헤덴의 말에 레이의 심장이 콩콩 뛰었다. 분명 먼 훗날의 일이 될 텐데 그래도 조금의 희망이 있다는 사실에 기대가 되었다.
“예하,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이전에 미처 못 여쭤봤던 건데. 제가 그곳에서 10년이나 살다가 왔는데 여기서 시간이 전혀 흐르지 않았어요. 기껏해야 몇 시간 정도였는데…….”
헤덴의 표정이 당장 대답을 했다. 내가 말을 한들 네가 이해할 수 있겠니, 하고.
“……네. 제가 이해는 못 하겠지만 그래도 알고 싶어요.”
레이의 대답에 헤덴이 한숨을 탁 쉬고는 말을 이었다.
“네 수준에 맞게 ‘아주’ 쉽게 설명해 주마. 이세계라는 건 이곳과 평행한 또 다른 균형의 시공간 축을 기준으로……. 됐다. 흐음, 네가 사는 공간은 가로에 있고 네가 다녀온 세계는 세로로 있는 거야. 이건 이해가 가냐.”
레이의 표정을 보고 헤덴은 더더욱 간략하고 쉬운 예시를 만들어 냈다.
“예.”
“그 가로축과 세로축이 서로 만나는 지점에 무수히 점을 찍어 봐. 선이 하나 나오지.”
‘무수한 점? 선이 나와?’ 레이의 표정을 보고 한숨을 쉰 헤덴이 허공에 선을 그렸다. 가로와 세로 두 개의 선은 한글 니은 자 모양으로 생겼고 헤덴은 그 니은 안에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위로 향하는 대각선을 하나 그었다.
다행스럽게도 그 그림은 낯이 익은 모양새였다. 한국에서 살 때 유주가 자료 조사를 하느라고 샀던 책에서 봤던 그래프의 형상이었다.
“하늘 다리가 이 선인 셈이야. 두 세계가 만나는 곳. 네가 세로축에서 살다 왔으니 가로축은 큰 변동이 없는 거고, 반대의 상황도 마찬가지란다.”
가로축이 두 칸 움직일 때 세로축은 한 칸 움직인다. 반면 세로축이 두 칸 움직일 때 가로축은 한 칸을 움직인다. 아주 단순화한 예시였다.
“서로 아예 영향이 없는 건 아닌데 한쪽의 시간이 많이 흘렀다고 다른 쪽 축을 움직이지는 않는다는 거지.”
이 이상으로 쉽게는 설명할 수 없다는 헤덴의 완고한 의지가 느껴졌다. 그리고 레이는 대강은 알아들었다.
‘하여튼 두 세계의 시간이 달리는 방향이 다르다 이거지.’
레이가 어찌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제 나름으로 뭔가 알아들은 모양인 듯해 헤덴은 설명을 끝냈다.
“나가자. 이곳은 사실 너한테도 보여 주면 안 되는 곳이었어. 토마 녀석도 못 본 거니 입 꼭 다물거라.”
“세상에, 정말요? 감사합니다. 절대 말 안 할게요.”
“그런데 너 말이다.”
다시 집무실로 돌아가는 길에 헤덴이 말했다.
“아가랑 헤어졌냐.”
“예?”
“라비던에 다녀온 4부 녀석 하나가 호들갑을 떨던데. 이혼한다며?”
예상치 못한 어택이었다.
헤덴은 가십을 들어도 바로 흘려보낼 사람이고 그런 쪽엔 관심도 없을 터였다. 그런 그가 그 누구도 묻지 못하고 있는,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하자 레이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가가 그랬을 리는 없겠고, 네가 헤어지자고 한 거지?”
확신에 찬 헤덴의 목소리에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라미엘이 이혼하자는 말을 꺼내자마자 놀랐던 기억이 살아나서 손쓸 틈도 없이 눈물부터 쏟아졌다.
갑자기 레이가 울음을 터트리자 헤덴은 화들짝 놀란 얼굴을 했다. 절대 놀랄 일 없을 사람의 당황한 표정에 레이도 놀랐다.
“진, 진짜인 게야?”
“흐윽.”
라엘 그 나쁜 놈은 사정을 먼저 말하고 결론으로 가야지, 결론부터 말하고 사정을 나중에 말해서 사람을 놀라게 해!
라미엘이 설명부터 잘 했다면 이혼 소리에 놀란 기억이 되살아나 이렇게 눈물을 찔찔 짤 일은 없을 것이다.
“네가 찬 거지? 응? 네가 버린 게 맞지? 설마, 아가 놈한테 자존심 상하게 까이고 온 게냐!”
자존심 상하게 까이다니요. 대체 예하가 아는 아가는 어떤 놈이고, 저는 대체 어떤 놈인 겁니까.
일반인과는 다른 예상외의 반응에 레이의 눈물이 쏙 들어가려는 찰나.
“이 짐승 놈이 왜 여길 와?”
푸둥이 레이 앞에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