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141화 (141/160)

141화. 푸둥의 비밀

레이가 우는 걸 안 건지 어쩐 건지, 대뜸 헤덴의 집무실에 나타난 푸둥은 평소보다 더 몸을 줄여 작은 강아지 크기가 되더니 레이의 품에 파고들었다.

“나 위로해 주는 거야? 고마워. 어쩜 이럴 때 딱 나타났을까.”

레이가 복슬복슬한 푸둥을 쓰다듬고 고개를 돌려 헤덴을 바라보았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이거였어요. 푸둥이 이렇게 불쑥 나타나는 거요.”

레이는 때마침 나타난 푸둥을 내세워 슬쩍 이야기의 주제를 돌렸다.

“분명 게이트는 안 썼는데. 이놈이 어찌 여길 왔지.”

헤덴은 바로 푸둥에게 관심을 돌렸다. 그에겐 아가의 이혼보다 연구 대상이 될 법한 이상 현상이 더 흥미 있는 주제였다.

“역시 이상하죠?”

하늘을 나는 아이니 하늘에서 내려오면 그러려니 할 텐데 게이트를 이용하기라도 한 것처럼 갑작스레 나타난 모양새다. 울프 드래곤의 이동에 대해 특별한 사항을 듣진 못했는데 아무래도 그 노란 머리 녀석을 불러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토마, 너 당장 노란……. 이 녀석은 또 어딜 간 게야.”

“예하, 다들 취침할 시간이잖아요. 지금 노데릭 님은 토마 님도 못 데려오실 거예요.”

“쯧쯧. 하여튼 요즘 것들은 다 게을러터져 가지고는.”

토마가 있었다면 레이에게 감사 인사를 수백 번은 했을 상황이었다.

헤덴은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차고는 물끄러미 다시 레이를 바라보았다. 눈물은 멎었지만 눈가가 촉촉한 아가 조련사는 품 안의 울프 드래곤을 강아지 쓰다듬듯 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가랑 아가 조련사는 대체 무슨 일이니.”

주제가 다시 돌아왔다. 레이는 잠시 갈등을 하다가 짧게 대답했다.

“리담에 좀 지독한 소문이 나서요. 별거 아니에요.”

“별거 아니라면서 눈물을 그리 뚝뚝 흘렸냐.”

“……소문이 진짜라고 생각만 해도 슬퍼서 자동으로 그냥 나와요.”

헤덴이 한층 짜증 나는 표정을 지었다. 아가와 아가 조련사는 여전한 듯한 모양이었다.

‘이혼은 무슨. 웃기지도 않는 별 해괴한 소문이군.’

헤덴은 소문을 훌떡 넘겨 버리고 레이 품 안의 푸둥을 바라보았다.

“이 녀석이 지금 어찌 여길 왔나.”

대신관이 기거하는 곳이다. 당연히 쉽게 외부의 출입이 허가되는 곳은 아니었다. 레이나 토마, 이곳의 신관들이나 오는 것이지 실제로 대신관의 거처에 오려면 각종 허가와 확인을 거쳐야 했다.

외부의 침입에 대비해 방어진도 설치가 된 곳이다. 푸둥을 맡게 된 후 헤덴이 푸둥에게도 출입 허락을 했다고 하지만, 이렇게 지정된 게이트를 사용하지도 않고 불쑥 나타나는 것까지 허용된 것은 아니었다. 특이한 일이 일어나는 건 분명했다.

“말도 못하는 놈이고…….”

“말은 못해도 잘 알아들어요.”

자식 자랑하듯 뿌듯하게 푸둥의 장기를 말했는데 헤덴의 표정이 영 마뜩하지 않은 듯하다.

“이놈한테 물어보란 소리냐?”

“아, 아뇨. 그건 아닌데 그냥 우리 애가 잘났다고 알리고 싶어서 그만…….”

팔불출이다. 헤덴은 지난 세월 자신과 비슷하게 늙어 온 신관들이 헤벌쭉 녹아내린 얼굴로 증손주들을 자랑하던 걸 떠올렸다. 이 경우는 손주가 아니라 짐승이긴 하지만.

“푸둥, 이리 와라. 너 내일 노란 머리 녀석 만나고 가.”

푸둥이 고개를 가로젓고는 레이를 바라보았다.

“푸둥아, 너 대체 여긴 어떻게 온 거야? 게이트도 안 썼잖아. 네가 요즘 계속 다른 곳에서 나타나니까 혹시 무슨 일이 있는지 궁금해서 그래.”

레이의 말에 푸둥이 눈을 깜빡였다.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푸둥?”

푸둥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아무도 없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고 레이의 품을 벗어났다. 뛰어난 후각으로 근처에 다른 인기척이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지만 다시금 눈으로 확인을 한 뒤 살금살금 허공을 밟았다.

“이, 이건!”

푸둥은 허공에 있는 것뿐인데 헤덴의 기색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레이는 헤덴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울프 드래곤이 하늘을 나는 건 너무 유명하고 당연한 사실이고, 심지어 그걸 방금 전에 헤덴이 자신을 모자란 사람 보듯 보며 말해 주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이런 반응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맙소사, 세상에! 이, 이게……. 하, 하하, 하.”

기함한 얼굴로 입도 못 다물던 헤덴은 이내 웃기 시작했다. 저 깊은 단전에서 올라온 진심을 담은, 순수한 기쁨의 웃음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기쁜 일인지 모르겠지만 헤덴의 얼굴에 발그레하게 열기까지 오르는 모습을 보아하니 보통 일은 아닌 듯했다.

“이런 복덩이를 봤나!”

헤덴은 기쁨 가득한 얼굴로 레이를 꽉 껴안았다.

“역시 옳았어. 맞았던 게야. 이 아이를 챙겨 두길 잘했어!”

인생 최대의 발견을 하기라도 한 것처럼 헤덴은 희열에 찼다.

“어, 저기, 저, 예하? 대체 무슨 일이신지…….”

일반인인 레이는 모르겠지만 마력과 성력으로 가득 찬 고위급의 인물이자 이 분야의 연구를 평생 해 온 헤덴은 느낄 수 있었다.

푸둥은 레이가 알 수 있게 최대한 제 표식을 남기며 하늘을 날았다. 울프 드래곤이 하늘을 나는 비밀을 인간에게 알려 준 것이다. 지고한 시절부터 지켜 온 일족의 비밀. 타 종족에게 만고의 시간 동안 털어놓은 적이 없던 비밀이었다.

실제로 타 종족에게 털어놓는다 해도 그들은 울프 드래곤처럼 하늘을 날 수 없겠지만 그래도 비밀은 비밀이다. 남들이 못한다 해도 밝히진 않아야 했다.

그걸 푸둥이 레이에게 조심스레 밝힌 것이었다. 저 인간이 자신에게 해를 가하지 않을 것이란 굳은 믿음이 있기에 행한 일이었다.

다만 레이는 너무도 인간이기에 보지 못했고 그녀 옆에 있던, 잠시간 자신을 맡아 게이트를 사용하게 했던 인간만이 눈치를 챘다.

푸둥이 밟은 곳은 하늘 다리였다. 하늘을 날기 위해 헤덴이 말한 1단계를 밟고 다니고 2단계 하늘 다리를 이용해 공간 이동을 했다. 이는 일족의 비밀이기도 하지만 후각이 더 발달하는 성체가 되기 전엔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푸둥은 정작 레이는 갸웃하고 헤덴만 좋아하는 반응을 보고는 얼른 흔적을 거두고 하늘을 걸어 레이의 품에 안겼다.

“예하, 지금 뭔지 전 전혀 모르겠어요. 대체 무슨 일이에요?”

“……푸둥이 하늘 다리를 밟는구나.”

고작 하늘 다리를 밟는다는 이유로 헤덴이 자길 껴안기까지 하면서 좋아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는 아마도 2단계, 아까 말한 게이트 하늘 다리를 이용한다는 것이란 걸 추측할 수 있었다.

레이가 추리를 마치자마자 입을 떡 벌렸다. 그리고 그게 맞는지 헤덴도 고개를 끄덕해 보였다.

“……내 새끼.”

레이가 품에 안긴 푸둥을 내려다보았다.

─이거 말하지 않을 거지? 저 사람 믿을 수 있어?

품에 안긴 푸둥의 눈이 묻고 있었다.

“예하, 지금 이건…….”

“안다. 절대 함구하마. 노란 머리나 토마나 하여튼 그 어떤 놈한테도 말 안 할 게다.”

그리고 헤덴은 그 의지를 보이려는 듯 스스로의 몸에 함구 마법을 걸었다. 실수로라도 새어 나가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레이 역시도 푸둥의 뜻을 존중해 헤덴에게 같은 마법을 걸어 달라고 요청했다.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만약 이 사실이 밝혀지면 워크산 정복자가 나타나 무슨 일이 있어도 울프 드래곤을 수중에 넣으려 들 것이며, 지금 이곳에 있는 푸둥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을.

노데릭에겐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그의 연구보다는 푸둥의 목숨이 조금 더 소중했기에 절대 조심해야 했다.

“푸둥아. 혹시…….”

레이가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2단계를 마음껏 사용하고 있으니 한국에 가게 됐던 하늘 다리를 푸둥이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처럼 움직이는 것 말고 다른 세계에 다녀와 본 적은 없어?”

레이가 말하는 다른 세계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푸둥은 본능적으로 3단계 하늘 다리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다. 아마도 자신의 가족이 묻는 건 그것이겠지.

하지만 그뿐이었다. 워낙 드물었기에 저와 같은 일족도 아직까지 밟아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건 냄새도 맡아 보질 못한 대상이기에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푸둥은 고개를 저었다.

“역시 그건 정말 기적이었구나.”

말끝을 늘이는 레이의 목소리에서 실망감이 잔뜩 묻어 나왔다.

푸둥은 이 사람을 위해 그것을 찾아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애석하게도 그건 자신이나 일족이 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푸둥, 너 나 좀 도와다오.”

헤덴이 반색하며 푸둥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 말에 푸둥은 콧방귀를 뀌는 것처럼 흥흥, 콧김을 내더니 레이에게 좀 더 자신의 몸을 묻었다. 누가 봐도 짐승이 코웃음을 치고 있는 모습에 헤덴의 이마에 빠직 힘줄이 솟았다.

“……흠흠, 네가 이곳과 워크산에서도 살 수 있게 게이트를 준 게 나다. 그 은혜를 갚아야지?”

푸둥은 영 반응이 없었다. 살다 살다 짐승한테 거절을 당하는 별 희한한 꼴을 다 본다 싶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쪽이 너무나도 매달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는 헤덴의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남들이 매달리는 꼴은 봤어도 자신이 아쉬운 소리를 하며 상대를 달래게 될 줄은 몰랐다. 하물며 짐승을 상대로 말이다.

“네가 지금 아가 조련사랑 살 수 있는 게 다 내 덕인 것은 아느냐. 나 때문에 네가 지금 그러고 살고 있는 거라고.”

저걸 설득이라고 하는 건지.

레이는 헤덴을 보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평생 누군가를 설득하고 꼬셔 내야 할 일이 없는, 사회성 제로 할아버지의 눈물겹게 메마른 설득에 결국 레이가 입을 열었다.

“푸둥아, 나도 부탁할게. 매일은 아니고 우리 푸둥이 하고 싶을 때 그때만이라도 잠깐씩 여기 연구를 도와줄 순 없을까?”

푸둥이 레이의 말에 귀를 쫑긋거렸다.

“여기 계신 분 연구가 나한테도 너무 중요한 일이거든. 여기 혼자 오기 싫다면 내가 같이 와 줄 테니까 조금만 도와줄래? 물론 네가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고.”

레이의 말에 푸둥이 고개를 까닥이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같이 와 주겠다는 말에 덥석 허락을 한 셈이었다.

허가를 받아 낸 레이가 헤덴을 바라보았다.

“우리 애기 아프게 하시는 건 아니죠?”

“생체 실험을 하는 것도 아닌데 그럴 일은 없다.”

저놈의 짐승 새끼.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 것 같더니 아가 조련사 말은 찰떡같이 주워 먹네? 이 정도면 각인이나 다름없는 거 아닌가.

울프 드래곤이 각인도 없이 저를 돌봐 준 인간의 말을 이리 잘 듣는 건 기록에도 없는, 처음 보는 일이었다. 아무튼 이번에도 헤덴의 연구를 구한 건 아가 조련사였다.

“그리고 푸둥아, 고마워. 이런 것까지 알려 줘서.”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물어볼 걸 그랬다.

‘아, 대답을 해도 난 몰랐겠구나.’

어찌 되었든 푸둥의 비밀이 밝혀졌다. 처음에 갑자기 나타난 푸둥이 스스로 놀랐던 건 아마 이제 막 하늘 다리를 쓸 수 있게 된 탓에 미숙해서 그랬던 모양이다.

대형 정보를 하나 건지고, 헤덴의 연구에 또 한 번 큰 기여를 한 레이가 대신전을 떠날 준비를 했다.

“저 가 볼게요. 음, 건강하시고 다음에 또 올게요.”

게이트를 열고 막 들어서려는 레이를 향해 헤덴이 말했다.

“소문이 진짠지 아닌지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다만 진짜가 될 것 같다면 아가 조련사 네가 차라.”

끝까지 헤덴다운 인사를 받으며 레이는 푸둥과 함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다시금 조용해진 집무실에서 헤덴은 잠시 레이가 떠난 곳을 바라보고는 자신의 연구 논문들을 꺼냈다. 오늘 밤 자기는 글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