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두 개의 목소리
신종 광물, 자연 에너지로 마력을 채울 수 있는 제로석과 그 이용에 대한 황실 공지가 내려왔다. 벼락을 동반하는 일이기에 먼저 시범적으로 운용하는 곳을 선정한 뒤 차후에 전체에게 판매를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 일은 수도 각계각층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파칸들을 통해 각 도시에도 전해졌다. 미디어 같은 전달 매체가 없어 인편으로 전달되는 소식은 타 도시까지 다소 시간차를 두고 퍼졌다.
가장 먼저 소식을 들은 수도 귀족들은 제로석의 존재와 그 소유자에 대해 놀라야 했다. 이는 르아넬로가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이혼 소문을 낼 때, 레이는 르아넬로에 조만간 시끄러운 소리가 들릴 텐데 무시하셔도 된다고 편지로 살짝 귀띔을 해 뒀었다. 충격 방지용이었다.
그러나 소문은 생각보다 거셌고, 거기에 제로석 이야기까지 나오니 르아넬로 부부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일단 루이반으로 편지를 보내 소문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고, 지금 황실에서 발표한 제로석에 대해 물으면서 조만간 만나자는 내용까지 적어 넣었다.
그런데 르아넬로에 도착한 답장은 루이반이 아닌 소포니악에서 보내온 소식이었다.
본인과 공작님은 괜찮으며 제로석은 그때 르아넬로에서 산 광산이 맞다는 레이의 답장을 보고 나서야 부부는 조금이나마 안심할 수 있었다.
당사자가 아니라고 하니 아닌 게 맞다. 소문은 소문일 뿐이었다. 루이반 부부의 사이가 워낙 좋으니 누군가가 질투해서 그딴 소문을 만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진실이었다면 딸아이는 앓아누웠지 이렇게 멀쩡하게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별거는 소문이 아니기에 이와 관련한 말을 직접 나눠 보고 싶었지만, 레이가 워낙 단호하게 나중을 기약해서 더는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딸에게 헐값에 넘긴 엄청난 자원을 알고 아쉬운 탄식을 해야 했다.
부모님 만나는 것을 보류한 레이는 검지로 가볍게 볼을 긁적였다.
“이거 완전히…….”
귀족 간에 도는 소문을 듣자하니 자신에게 그야말로 제대로 다시 낙인이 찍힌 듯했다. 고작 소포니악 집정관 일을 하겠다고 그 대단한 남편을 버렸다나.
그 와중에도 라미엘은 이혼이 아니며 여전히 아내를 사랑하고 있음을 밝혔다. 기존처럼 그가 계속 레이에 대한 애정을 표하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믿질 않았다. 애정을 말하는 라미엘의 곁에 상대가 없으니 도통 믿을 수 없다는 분위기였다.
“처음 계획대로 아냐?”
지금 상황만 보면 계약을 달성한 셈이었다.
부인을 사랑해서 다른 여자는 못 만나는 라미엘과 그런 공작을 버려두고 제 살길 찾는 마녀. 심지어 부모님께 편지로 사실을 알리고 수도를 떠나 사는 것까지 완벽하게 일치했다.
“이따 라미엘 만나면 얘기해 줘야지. 우리 계약대로 됐다고.”
당연히 오늘 밤도 라미엘과 함께인 일정이다.
레이는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자료 정리를 위해 다시 서류에 코를 박았다. 15년짜리 짐 덩이는 아직도 다 치워지지 않아서 할 일은 늘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후임이 와도 바로 알아볼 수 있도록 자료 정리도 해야 하고, 이제 제로석까지 본격적으로 관리해야 하니 오늘도 부지런히 일해야 했다.
***
법안을 위한 임시 회의가 열렸다. 임시회는 여름 연회를 겸하는 일정이었다.
머지않아 황녀를 공개하는 대형 연회가 있어 기존에 열던 여름 연회를 소규모로 줄였고, 지난 회기 제시된 법안의 중간 점검을 위한 임시회를 여는 김에 두 일정을 하나로 만들었다.
이러한 행사에 루이반 공작은 또 혼자 나타났다. 이번엔 따로 와서 함께 있는 것도 아니고 오롯이 그 혼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호사가들이 입에 올리기 좋은 거리였다.
“꼴좋네요. 그렇게 퍼 주더니 결과가 고작 배신이야?”
“이제 루이반 공작 각하는 본인 법안은 꼴도 보기 싫겠습니다.”
“고작 그 손바닥만 한 수도 바깥 도시 집정관을 하겠다고 루이반을 버리다니. 그것참.”
“오늘 임시회는 아주 할 만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전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때다 싶어 달려들어 물어뜯는 사람들 사이에 다른 목소리도 들렸다.
“제로석 사업을 공작 부인께서 독점으로 담당하시는 거죠?”
“아직 다른 곳에서 발견된 적 없으니 그렇겠죠.”
“킹크랩 사업 휴식기가 되자마자 제로석까지 쥔 거네요.”
고작 소도시 집정관 자리라고 비하하고 있지만 집정관은 도시민의 추천을 받아 오르는 자리다. 외지인이 쉽게 될 수 있는 자리는 아니란 말이었다. 그럼에도 루이반 공작 부인은 그걸 해냈고, 심지어 돈길만 걸을 대단한 사업체도 두 개나 본인 이름으로 가지고 있다.
심지어 최근 소포니악의 분위기가 좋아졌다고 헬라에 소문이 자자했다. 이사가 눈에 띄게 드문 리담에서 소포니악은 신규 도시민 유입이 늘어나고 있다고도 했다.
소포니악 집정관인 루이반 공작 부인이 날개라도 단 듯 훨훨 날며 능력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레이알렉시스가 이혼을 한 건지 당한 건지 모르겠으나, 이혼한 여자들의 기존 행보와는 극도로 다른 양상을 보인다는 것은 확실했다.
루이반 일에 대해 아직까지도 마냥 투덜거리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런 중에도 레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조금 더 자요.”
[……아니에요.]
졸음이 잔뜩 묻어나는 레이의 목소리를 듣자니 안쓰러움이 몰려왔다.
회의 시작 전, 라미엘은 회의장 근처의 인적이 없는 복도에서 레이의 연락을 받았다.
제로석 시범 운영 발표 이후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관심과 의뢰에 레이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와중에 소포니악이 관리하는 닭들이 폐사하는 문제가 생겨 그걸 해결하기 위해 보름이 넘게 고생을 했다.
지난번 닭 요리를 먹고 잘못됐던 일의 연장선이었던 듯 겨우 원인을 찾았는데, 어이없게도 필레가 사 놓고 간 사료가 문제였다. 본인 집을 사느라 세금이 부족하니 싸구려 사료를 잔뜩 사서는 창고에 처박아 두었고,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아서 변질된 것을 모르고 닭들에게 먹인 것이 원인이었다.
이 일을 해결했으니 레이가 이번 연회에 꼭 함께 가겠다고 했는데, 일을 마치고 그대로 쓰러지듯 잠들어 버리는 모습을 보고 차마 데려올 수 없었다.
“소규모 연회니 당신이 꼭 올 필욘 없어요. 나도 연회는 내키지 않지만 회의가 있어서. 다녀올게요.”
“미안해요, 내가 같이…….”
말을 하다가 레이는 다시 눈을 스르르 감았다.
어지간히도 피곤해 보이는 아내의 모습에 라미엘은 감옥에 처박혀 있는 필레를 다시 끌어내 능지처참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떼었다.
레이는 루이반 부부 침실에서 곤히 자다 라미엘이 나가기 직전에 겨우 일어났다.
[라엘, 오늘 회의 괜찮겠어요?]
“네. 싸워 볼 만하겠습니다.”
레이가 보여 준 능력, 테가푸스 회원들의 활동들을 다 취합해서 자료화했다. 아직도 여자들이 뭘 할 수 있겠냐며 비하하는 회의장 남자들에게 보여 줄 자료였다.
[내가 온 마음으로 응원할게요.]
레이의 응원을 받으며 라미엘은 회의장으로 들어갔다.
임시 회의였지만 성과는 확실했다.
이전에 그 누구도 찬성하지 않던 법안에 손을 들어 주는 이들이 늘었다. 첫 번째 찬성자는 예상했던 대로 진즉 제로석을 알고 있던 몬순 공작이었고 태자를 따라 눈치껏 찬성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하나의 목소리만 내던 회의장에 두 개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여자들은 감성적이라서 작위를 가지게 되면 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 말에 라미엘은 자료를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역사에서 잊힌 자들의 업적입니다.”
마법진을 시각적으로 구상화해 스크롤에 담을 수 있게 만든 마법사, 열차의 기본 기관을 만들어 낸 발명가, 전쟁터 선두에서 맞서 싸운 용사, 고대 게이트를 찾아낸 사학자 등 리담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던 것들을 찾고 발견한 여성들이었다.
라미엘도 테가푸스 회원들도 생각보다 굵직한 업적들에 놀랐다. 남겨진 자료가 많지 않음에도 이 정도라면 흔적조차 없이 지워진 것들도 상당할 것이라 예상할 수 있었다.
이 일은 과거를 찾는 여행임과 동시에 현 시대에 살고 있는 수많은 능력자들이 묻히지 않도록 밝히는 걸음이기도 했다.
“……가짜는 아닌지.”
자료의 신뢰도를 의심하는 말은 당연히 나올 것이라 예상한지라 처음 들은 말인데도 식상한 지경이었다. 라미엘이 발언자를 지그시 쳐다보자 그는 합, 입을 다물고 시선을 피했다.
생각보다 큰 업적이지만 이걸 보고 상대가 넘어올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애초부터 논거도 없이 그저 안 된다고만 하는 사람들이니 새로이 명확한 자료가 있어도 끄떡도 안 할 것이었다.
다만 이 자료는 저들이 여성의 능력을 폄훼하고 깔아 내리는 것을 막기 위한 자료의 역할을 해낼 것이다.
반대 입장의 사람들은 라미엘이 내민 자료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고 찬성을 표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앞으로 헛소리는 하지 않을 것이다.
라미엘이 준비한 자료는 회의가 시작되기 전 테가푸스 회원들에게도 전해졌고, 그들은 그 자료를 대륙의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전국에 있는 명소에 뿌리는 일을 계획하고 이를 바로 시행했다.
라미엘이 회의 준비를 하는 동안 그들은 필경사들을 대동해서 지워진 업적들을 알리고 잊힌 여성들을 끄집어냈다. 라 헬라와 소포니악 필경사 양성소의 여성들이 이 일에 고용되었고, 여자들이 나서서 글을 읽고 알려 주는 모습은 여러 사람들에게 새로운 충격을 주고 있었다.
모든 유행의 시작이자 제도 정착의 거점인 수도가 바뀌는 게 가장 좋은 일이겠지만, 변화는 밑에서 위로도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듯 고요한 것처럼 보이는 수면 아래에선 조금씩 소용돌이가 생기기 시작했다.
“다음 회의엔 발명을 실현한 남자들 자료를 들고 올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초기 발명은 인정하지만 비현실적인 망상을 실체화한 건 결국 다 남자들이라고 할걸요.]
레이의 선견지명에 라미엘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연회가 시작되기도 전에 라미엘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연회장 창으로 연결된 외부 테라스로 나왔다.
자신에게 직접 물어볼 용기도 없으면서 뒤에서 수군거리는 꼴은 어릴 적부터 지겹게도 당했던 일이었다. 한동안 입 좀 닥치나 했는데 기회만 생기면 이렇다.
‘그러고 보니…….’
그 잠시나마도 입을 닥친 건 레이를 만나고 나서였다. 레이와 결혼하자고 했을 때 가장 시끄럽다가 그 이후 두 사람이 잘 지내자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라엘, 지금쯤이면 연회에서 춤춰야 하는 때 아닌가요.]
“맞아요.”
[나랑 이야기하는 걸 보면 어디 사람 없는 곳에서 혼자 있는 것 같은데.]
라미엘에 대해 모르는 것 없다던 레이는 지난번에 했던 말처럼 보지 않고도 척척 자신의 위치를 알아낸다.
“……아.”
그러고 보니 여기는 레이와 처음 만났던 곳이다.
“만찬에 참석하시지 않고 왜 여기 혼자 계십니까?”
“왜 저렇게 많이 먹느냐고 사람들이 쪼아 대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요.”
[왜 그래요?]
“예전 생각이 나서요.”
저를 개도 안 데려갈 거라며 좋아하던 레이가 떠올랐다.
이전을, 과거를 떠올려서 좋았던 기억은 한 번도 없었기에 굳이 추억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웃음이 먼저 나온다. 자신만을 담는 파랗고 맑은 눈동자가 떠오르면 마음 한구석에서 잔잔하게 온기가 흘러나와 자신을 감싸는 것 같다.
라미엘이 벽에 등을 기대는데 끼익, 하고 창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