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각자의 자리
뜻밖의 인기척.
방해받는 느낌에 불쾌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그렇지 않다는 건.
“레이.”
그의 반려가 연회용 차림새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인적 드문 휴게실이나 복도일 줄 알았는데.”
또각또각. 레이가 라미엘에게 가까이 다가오며 활짝 웃었다.
“우리 처음 만난 곳이네요?”
“레이, 여긴 대체 어떻게…….”
“내 남자 혼자 짝도 없이 있다고 기죽을까 봐 왔어요.”
청혼 반지와 마린의 거미줄까지 제대로 착용한 모습을 보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이 됐다.
“누가 알고 있습니까.”
“윌포프한테만 살짝 말했어요. 놀라지도 않던데요. 사실 나도 윌포프가 알고 있을 줄 알았어.”
윌포프가 알고 있으니 테일러도 알 수 있겠다며 레이가 손을 내밀었다.
“라엘, 뭐 해요. 음악 나오는데. 우리도 춤춰야죠.”
“결혼, 안 할 겁니까?”
“……결혼, 할 건데요.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시는지…….”
“레이디, 영광입니다.”
아무도 없는 조용하고 작은 테라스에서 창 너머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에 맞춰 두 사람이 발을 움직였다. 얼굴엔 웃음이 가득하고 눈에는 서로를 향한 애정이 넘쳤다.
달빛 아래, 두 사람만의 작은 무도회는 음악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
라미엘은 피곤한 자신을 배려해 굳이 연회에 데려가지 않았지만, 같이 등장은 못 하더라도 함께 있어 주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닭 모이 건도 정리가 됐고 후처리만 하면 늦더라도 연회에 참석 가능했다.
밖으로 나간 라미엘이 절대 방에 들어가지 말라는 명을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레이는 슬쩍 몸을 일으켰다. 눈 뜨기도 힘들 만큼 피곤했지만 출근을 해야 하니 언제까지고 루이반에 퍼져 있을 수는 없었다.
“……역시 윌포프만 있네.”
방문을 살짝 여니 저 멀리로 성큼성큼 걷고 있는 라미엘의 뒷모습과 그를 향해 서 있는 집사장 윌포프의 모습이 보였다. 공작님은 배웅도 필요 없으니 일 보라고 하고 혼자 떠나시려는 모양이다.
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윌포프를 불렀다.
“윌포프.”
소곤소곤 두어 번 그를 부르자 그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휙 돌렸다. 그리고 빠르게 주변을 살피더니 레이가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마님.”
“안 놀라네?”
“대강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
누군가와 밤새 있는 흔적.
주인이 다른 이를 만날 리도 없고 타인이 루이반에 오고 가는 흔적도 없으니 게이트가 있는 마님이라는 결론이 내려질 수밖에 없었다.
“역시. 그럼 다른 사람들도 대강 알고 있겠네.”
다른 사람이라 함은 레이가 게이트를 사용할 수 있는 사실을 알고 있는 측근을 말했다.
“외람되오나, 두 분께서 왜 이렇게 하시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감히 물어볼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윌포프는 눈을 질끈 감고 마님께 무례한 질문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전에 임시로 집정관을 하고 계실 때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 생활인데 이번은 왜 이렇게 이혼을 했다고 믿게 만드는지, 왜 저택 사람들에게도 말도 없이 헛소문을 듣게 하는지 의중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윌포프의 말에 레이가 대답했다.
“우린 그대로인데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뿐이야. 두 사람이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일을 하고 있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지.”
각자의 자리에서 하는 각자의 일.
저 한마디에 윌포프는 이혼에 대한 사정을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소문을 이용해서 마님께서 하시는 일에 루이반이 걸려들지 않도록 한 것이다.
루이반이 레이알렉시스를 가리고 있다는 건 이전 편지 사태에서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자신은 루이반이 칭찬을 받는 것에만 집중해 그 아래에 숨겨진 것을 읽을 수 없었다. 지금 마님의 말을 들으니 그것이 잘못된 방향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라미엘 공작이 하는 일과 레이알렉시스 집정관이 하는 일은 서로 다른, 분리된 영역이다. 이걸 하나로 묶어 본다는 건 마님의 능력을 보이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한 이름으로 묶여 있어도 ‘각자의 자리’가 분명해야 사람들은 받아들일 수 있다.
여성도 능력이 있다는 것을.
윌포프도 이전엔 다른 이들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으나, 마님 곁에서 벌어지는 일을 공감하는 공작을 도우며 자연스레 사상이 바뀌게 되었다.
“조금이라도 알려 주셨다면…….”
“말 안 해도 이렇게 잘 알잖아.”
윌포프의 말에 레이가 씩 웃었다.
“윌포프가 남들 몰래 나 연회 준비 좀 도와줄 수 있어?”
집안 누구도 모르는 비밀을 혼자서만 제대로 알게 되자 윌포프의 마음속에서 약간의 우월감이 솟았다.
“물론입니다.”
“라엘 혼자 나가 있느라 좋을 소리 못 듣고 있을 테니까 확실하게 준비해 줘.”
‘확실’이란 말씀까지 하시며 마린의 거미줄과 반지까지 내주신 걸 보아 제대로 보여 줘야 한다는 말이었다.
“네. 마님. 그리하겠습니다.”
윌포프가 의지에 찬 눈을 했다.
그렇게 해서 레이가 소포니악에서 일을 하는 동안 윌포프 혼자 은밀한 연회 준비를 시작했다.
일이 끝난 마님이 혼자서 바로 착용하고 가실 수 있도록 연회용 드레스는 입기 편한 완제품이어야 했고, 그에 어울리는 장신구도 최대한 감각을 발휘해 고른 뒤 궤에 넣어 빠르게 소포니악으로 보냈다.
그리고 일을 마친 레이는 도베와 사람들을 모두 물린 후, 윌포프가 준비한 것들을 착용하고 황실로 향했다.
“……헤덴 예하 진짜 최고시다.”
연회 시간에 최대한 늦지 않기 위해 게이트를 이용하려고 했는데 문제가 있었다. 황실에서는 위험 요소 방지를 위해 특정 구역 외로는 마력 사용이 일절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경우엔 어떻게 되는지를 헤덴에게 달려가 물었더니, 그런 경우라면 좌표인 라미엘 가장 가까운 근처에 마력이 통하는 곳으로 이동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런 하찮은 일로 자꾸 찾아오지 마라. 나 한가한 사람 아니다.”
헤덴의 잔소리를 거하게 듣고 나서야 레이는 라미엘을 향해 게이트를 열었다.
“어, 여긴 저번에 라미엘이 말한 곳인데.”
비밀 공간에서 황실로 이어진다는 그 장소다. 황실 인물관.
인물관은 황실의 주요 건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성안의 여러 건물과 견주어 꽤 큰 크기를 차지하는 곳이었다. 황실에 큰 기여를 한 인물들의 초상화를 모아 놓은 공간은 황실 관련 인물들의 역사박물관 같은 느낌이었다.
인기가 있는 곳은 아니었는지 지키고 있는 사람도 없었다. 들어가는 데에 신분 확인이나 별다른 제재도 없다는 말이었다.
황실 영역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부터 신분은 확인된 것이기도 하고, 이곳은 황족들이 기거하는 공간과도 멀찍이 떨어져 있어 황실이지만 황실이 아닌 공간처럼 이용되고 있었다.
“연회장까지 꽤 걸어야겠네. 여기 근처에 근위병이나 다른 사람은 없나? 저기요!”
레이가 급히 에스코트를 신청할 사람을 불렀다. 몸에 걸치고 있는 게 워낙 고가니 연회장까지 가는 데엔 약간의 보호와 도움이 필요했다.
레이의 부름에 근처에 있던 황실 기사 하나가 다가왔다.
“연회장까지 에스코트 부탁해요.”
“예, 루이반 공작 부인. 여길 잡으십시오.”
그녀를 알아본 기사가 팔을 내밀었다.
“공작 부인, 어서 오세요!”
연회장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레이를 반긴 건 케이틀린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함께 다니던 삼인방이 아닌 다른 귀족들과 꽤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는데, 그중 몇몇은 테가푸스 회원으로 레이와 만났던 이들이었다.
“이쪽으로 오시죠.”
“일이 많이 늦으셨나 봅니다.”
레이는 모두에게 눈인사를 하며 다가갔다. 그런 레이의 등 뒤로 여러 사람들의 시선이 꽂혔다. 안 올 줄 알았던 이의 등장에 다들 내색은 안 했지만 놀라는 눈치였다.
공작이 워낙 혼자 온 것처럼 굴기에 이젠 친한 척도 안 하는 줄 알았는데, 뒤늦게 정신을 차렸는지 화려한 것들을 주렁주렁 달고 나타났다는 시선이 느껴졌다.
“굳이 저걸…….”
“마린의 거미줄을 몇 개나 사도 될 제로석을 가졌으니 내세울 만하지요.”
“그 제로석 가격 보셨습니까.”
마력을 계속 채워 쓸 수 있는 광물인데 기존 마력석 가격의 세 배 정도밖에 책정이 되지 않았다. 수십 배를 받아도 저렴할 텐데 고작 세 배였다.
다시 에너지를 채우는 데 사용되는 비용은 일단 무료로 해서 시범 운영을 한 후 정식으로 책정을 한다는 소식에 마력석 기업가들은 어떻게든 시범단에 선정되려 대기 중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늦으셨습니다.”
“이리 다망하시어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하시겠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마음에 안 들고 뒤에서 흉을 보고 있다고 하더라도 앞에서만큼은 루이반 공작 부인에게 설설 기어야 했다.
보통 연회에서는 여자는 여자들끼리, 남자는 남자들끼리 모이는데 이번만큼은 그 양상이 달랐다. 공작 부인이 귀부인들 무리를 벗어나자마자 사업을 하거나 길드를 여럿 가진 남자들이 바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레이가 남자들과 사업 이야기를 하는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며 아라벨라가 한마디 했다.
“……괜찮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