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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146화 (146/160)

146화. 우리 마님

아라벨라는 브루군 후작 부인으로 불리던 이였다.

쭉정이 같은 남편 겨우 법관 만들어 놨더니 뒤로 호박씨를 까고 있었을 줄이야. 여자 문제만 일으키지 말라고 했는데 정부를 둘이나 두고 있었다. 더 찾아보니 환락가 출입 흔적에 사생아까지 하나 나타났다.

루이반 공작이 밝히지 않았다면, 여태 그 쓰레기 같은 놈한테 속고 살았을 것이다.

이혼은 일사천리였다. 한 달 만에 이혼이 확정되었고, 여자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게 리담의 이혼이었음에도 브루군 후작은 작위 하나만 빼고 탈탈 털린 채 지금은 이런 연회에도 참석을 못 하고 있었다.

대연회같이 어지간하게 큰 행사가 아니면 아라벨라가, 맥카인 가문이 두려워서라도 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쵸. 저 지금 심장이 뛰어요.”

케이틀린이 아라벨라의 말에 작게 대꾸했다.

“앞으로 이런 일은 더더욱 많아질 겁니다.”

“맞아요. 그럴 거예요.”

회원이 아닌 이들이 있으니 크게 이야기할 순 없지만 연대하는 사람들끼리 통하는 눈빛이 오갔다.

이혼 이후 아라벨라는 재혼을 하라는 부모의 권유를 뿌리치고 맥카인 가문의 작위를 직접 잇기 위해 케이틀린을 찾았다.

라미엘을 바로 찾아가기에는 주변의 시선이 워낙 좋지 않은지라 우회해서 케이틀린을 찾은 것인데, 그곳에서 아라벨라는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각 도시, 각 계층의 여성들이 모인 테가푸스 회원이 되면서 한층 더 시야를 넓히게 된 것이다.

“공작 부인은 저기서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기에…….”

“왕 놀이라도 하시는 건가.”

뒤에서 쑥덕이는 소리에 케이틀린이 들으란 듯이 대꾸했다.

“저도 가서 이야기 좀 나눠야 할 것 같은데 도통 자리가 안 비네요.”

케이틀린의 말에 바로 다른 회원이 맞장구를 쳤다.

“그러네요. 제로석 시범단 아직도 선정 중이겠죠?”

“소포니악으로 이사라도 가야 하나.”

“아, 그거 들으셨어요? 소포니악은 이제 글 가르치는 걸 의무화한다는 말이 있던데요.”

비단 테가푸스 회원이 아니더라도 케이틀린이 튼 물꼬에 자연스레 레이의 업적이 따라붙었다. 이전에는 험담만 가득했는데 이제는 그녀의 능력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도 수면 위로 들려왔다.

레이가 대화를 마치는 기미를 보이자마자 다른 여자들이 슬쩍 그녀를 불렀다.

그간 부정적으로 바라보던 이들이 저리 나선다는 건 남편들이 같은 여자니 당신이 가서 루이반 공작 부인을 꼬셔 보라는 지령을 내린 게 분명했다. 속이야 어찌 되었든 겉으로는 다들 레이의 능력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야기는 여기까지 해야겠네요.”

회의가 끝났는지 회의장과 연결된 문이 열리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연회 시작을 알리는 음악이 연주되었다.

‘라엘은 어디 있지?’

문이 닫히는데도 라미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레이는 잠시 실례하겠다 말하며 연회장을 나와 사람이 없는 복도 한구석으로 향했다. 그리고 귀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회의는 잘 마쳤어요?”

아마 연회장 분위기가 달갑지 않아 혼자 이런 곳에서 잠시 쉬고 있을지도 모른다. 레이가 라미엘에게 말을 걸며 복도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라엘, 지금쯤이면 연회에서 춤춰야 하는 때 아닌가요.”

[맞아요.]

“나랑 이야기하는 걸 보면 어디 사람 없는 곳에서 혼자 있는 것 같은데.”

그런데 복도에도 휴게실에도 라미엘의 모습은 보이질 않는다.

[……아.]

“왜 그래요?”

[예전 생각이 나서요.]

어디 있는지 알 것 같은 말이었다.

레이는 라미엘이 있는 곳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

제로석 시범 운영을 위한 신청을 받기 시작했다. 벼락이라는 위험 요소가 동반되기에 시범적으로 몇 군데에 사용 허가를 내고 얼마나 잘 유지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예비 기간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제로석은 에너지가 다 닳기 전에 사용자가 수거 신청을 하고 수거단이 제로석을 시설로 가지고 와서 재충전을 한 뒤 본래 사용처로 보내 주는 방식으로 활용된다.

시범단 신청자는 구매한 제로석을 옮기는 비용만 내면 됐다. 충전 비용은 시범 운영 기간 동안 무료로 하고 비용을 산출한 뒤 차후 실생활에 적용되면 그때 받을 예정이었다.

제로석 시범단이 특정 신분이나 특정 도시에 몰릴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각 도시별로 정원을 배정하고 익명으로 신청서를 받아 당첨자를 선정하기로 했다. 개인이나 도시 단위로 신청을 받았고, 자신의 정체를 밝히거나 드러내면 바로 탈락이었다.

“검토 결과는 모든 분이 볼 수 있도록 공개할 예정입니다.”

소포니악의 새로운 관사에 여덟 파칸과 황실의 태자 대리인 총 아홉이 모였다. 대륙을 이끄는 이들이 모두 모여 있는 셈이었다. 귀빈들의 보호를 위해 황실 마법사 몇몇이 와서 보호 마법진을 그려 두었다.

이들이 여기 모인 이유는 간단했다. 제로석 사용 신청을 하기 위해 필요한 사항을 전달받기 위해서였다. 제로석의 주인은 레이였고, 그녀는 소포니악에 있으니 필요한 자들이 이곳으로 와야 했다.

소포니악은 거물 손님맞이를 위해 며칠 내내 도시를 정비하고 장식하느라 분주했고 기존 관사를 좀 더 확장하는 공사를 했다.

레이가 일을 하는 사무 공간 이외에 라 헬라의 중앙 회관 크기의 모임 공간이 만들어졌다. 소포니악에 처음으로 생긴 제대로 된 시설이었다.

도시민들이 모이는 특정 공간이 없던 소포니악은 다음 분기에 짓기로 했던 회장을 이번 기회에 앞당겨 건설했다. 앞으로 이곳에서 집정관 추천을 행하거나 마을 행사를 진행하게 될 것이다.

“익명이기에 자신을 드러내는 말을 하면 바로 탈락이니 이 점 꼭 알려 주세요.”

레이는 몇 번이나 이 말을 강조했다.

앞으로 파칸과 황실은 각 도시에서 제로석을 먼저 사용해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신청서를 받고 그것들을 추려 레이에게 보내는 일을 하게 된다.

온 도시에 한 번에 알릴 수가 없어서 각 도시 파칸들에게 앞으로의 운영 방침을 우편으로 알렸는데, 워낙 대단한 광물이라 그런지 다들 한달음에 이곳까지 달려왔다.

소포니악이나 루이반에 특혜가 가는 건 아닌지 노심초사하던 그들은 레이가 형평성을 위해 무조건 익명으로 할 것이고 그 결과를 투명하게 공개한다고 하니 안심하는 얼굴이었다.

“여기까지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우편으로 모두 했던 말이었지만 직접 레이에게 이야기를 듣고자 이곳까지 날짜를 정해 찾아온 파칸들이었다.

레이는 이 도시에서 나고 자란 것들로 정성을 다해 식사를 준비하고, 저들이 궁금해하는 점을 모두 설명하며 부족함 없이 업무를 처리했다. 명확한 일 처리였다.

거물들의 방문 소식에 잔뜩 긴장했던 소포니악 사람들은 그들이 무사히 돌아간 것을 보고 나서야 안도했다.

“조금 허무해요. 진짜 공들여서 꾸민 건데.”

며칠을 고생해서 도시를 꾸몄는데 그들에게 보인 건 고작 관사를 오갈 때 고작 10여 분 정도밖에 안 되니 아깝긴 했다. 소포니악 나무에 걸린 환영 장식을 다시 떼어 내는데 일을 돕던 사람들이 조금 아쉬운 얼굴을 했다.

“앞으로 또 중요한 분들이 여기 오실 수도 있잖아. 그때 또 쓰면 되니까 너무 허무하게 생각하지 말고 나중을 위해 아껴 쓴다고 생각해.”

레이가 사람들을 달래며 성큼성큼 사다리로 올라갔다. 나무에 걸어 둔 장식을 떼어 내가 위해서였다.

“어어, 잠깐 멈추세요. 사다리 잡아 드릴게요!”

레이가 올라간 사다리가 흔들거리는 걸 보고 사람들이 다급히 소리쳤다.

“괜찮, ……어?”

괜찮다고 말하려는 순간 사다리가 휘청 흔들리더니 레이가 그대로 허공으로 기울어졌다.

‘떨어진다!’

사람들이 어찌 손을 써 볼 틈도 없이 레이의 몸이 붕 떴다.

‘파, 팔이라도’

떨어지는 그 찰나의 순간 팔이라도 부러지지 않게 하자고 생각한 그녀가 눈을 질끈 감고 몸을 웅크리는데.

“으앗!”

딱딱한 바닥이 아니라 누군가의 단단한 품이 느껴졌다.

“……어라?”

누군가의 품 안에서 서서히 눈을 뜬 레이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녹색 눈동자와 눈을 마주쳤다.

“어머나, 다행이에요!”

“집정관님, 괜찮으세요?”

“델이 있어서 살았네!”

델이라 불린 남자가 레이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괜찮으세요?”

네가 왜 여기서 나와……?

남자를 보며 레이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

“그러니까 요 근래 소포니악을 어슬렁거리고 다닌다던 남자가 경이었단 말이지?”

관사로 돌아온 레이는 의자에 앉은 크레하를 보며 물었다.

“음, 그럴걸요?”

크레하가 볼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웬 남자가 로브를 뒤집어쓰고 돌아다니는데 통 못 보던 인물이라는 문의를 받았다. 그런데 마을을 돌아다닌다던 남자는 레이의 눈에만 보이지 않았다.

“대체 당신은 누구요? 여기 분은 아닌 것 같은데.”

“월급 받는 중이니 말 시키지 마.”

사람들은 그가 가끔 와서 마을 일을 돕기에 레이가 부리는 사람인 줄 알았다고 했다. 본인이 알렉스 님께 월급을 받는 중이라고도 했으니 더 그렇게 생각했고.

레이는 혹시 누군가가 자신을 사칭하는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그 남자가 크레하였다니. 그리 신출귀몰했던 것도 이해가 된다. 루이반 기사단장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대체 경이 여긴 왜? 무슨 일로 그랬던 거야? 라엘은 알아?”

이전부터 가끔 마님 보호차 라미엘이 저를 소포니악에 보내곤 했다. 그림자 기사들은 레이의 신변 하나만 담당하는지라 도시에서 그녀에게 가해지는 위험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선 좀 더 시야가 너른 자가 필요했다.

그 일에 차출된 것이 크레하였다. 라미엘은 당연하게도 기사단장이라는 자를 이런 임무에 맡겼다. 본인 기준으로 루이반에서 그나마 실력을 봐 줄 만한 자였기에 그를 낙점한 것이다.

그 이후 종종 크레하는 레이의 눈을 피해 소포니악을 어슬렁거렸고 그게 사람들 눈에 띄자 대강 아무 이름이나 지어 놓고 있었다.

아내를 위해 가문 기사단 최고위자를 경호로 붙여 놓는 그런 사람이 이혼을 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소문을 의심하던 중, 크레하는 결정적으로 빨래방에서 뜻밖의 증거를 잡았다. 흔적이 있다며 쑥덕이는 하인들의 이야기에 마님의 게이트를 떠올릴 수 있었다. 역시 헛소문이었던 것이다.

“공작님께선 당연히 아시죠. 아, 그런데 공작님이 보낸 건 아니에요.”

빨래방에서 소식을 듣자마자 크레하는 라미엘을 찾았다.

“마님께 가끔 가도 돼요?”

앞뒤 다 잘라먹고 참 버르장머리 없게도 공작에게 불쑥 허락을 고했지만 주인은 놀라지 않았다. 화도 내지 않고 그저 이 짐승 놈이 감은 빠르구나, 하는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해.”

“네.”

두 사람이 굳이 이혼을 가장하는 이유는 모른다. 그런데 딱히 알고 싶지 않았고 마님이 계속 있어 주시기만 한다면 사정이 뭐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뒤에서 몰래 레이를 지키던 크레하는 가끔 마을에서 잡일도 하곤 했는데 방금 같은 경우, 이 현장에 자신이 있어 얼마나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는지 모른다.

마님이 잘못되면 죽는 건 자신이었다. 다만 이렇게 당사자에게 들키게 될 줄은 몰랐지만.

‘난 정말 그냥 네가 걱정되어 왔어.’라고 말하는 수박바의 얼굴을 보니 레이는 대강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보내주시던? 기사단장 바쁘잖아.”

“제가 없을 땐 주인님께서 신경을 써 주시고 있습니다.”

아아. 기사들 불쌍해!

예고에도 없이 불쑥불쑥 공작의 훈련을 받고 있을 기사들에게 레이는 마음으로 진심을 담아 애도의 뜻을 전했다.

“집정관님, 계속 우리 마님이신 것 맞죠?”

크레하가 관사를 떠나기 직전 물었다.

“당연하지.”

레이가 웃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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