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지켜 줄게
도시에게 아내를 뺏기는 것 같다며 칭얼거렸던 공작님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두 사람은 지금의 생활에 익숙해졌다.
저녁 시간과 공식 일정은 함께하고 낮에는 각자의 일을 하는 생활이 쭉 이어지자 여느 날 같은 평범한 일상이 되었다.
시간이 답이었던가. 사람들도 이제는 소포니악 집정관과 공작 부인을 따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소포니악과 관련한 일이 있으면 집정관으로 대했고 사업이나 공식 행사에 있어선 공작 부인으로 대했다.
이혼이 확정됐을 때를 대비해 레이의 일을 분리해서 대응하는 듯했으나, 이유가 어찌 되었든 그녀가 여러 일을 해내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하게 인식된 듯했다.
이제는 다들 당연하게 황실에서 루이반 부부의 이혼 확정을 내려 주길 기다리는 분위기였다. 이혼이 아니라는 당사자의 말은 듣지도 않고 확정된 사항이라 여겼다.
둘이 작위 승계용 계약 결혼을 했다는 소문이 다시 끌려나왔고, 그리 사이가 좋은데도 2세가 없다는 점이 소문을 사실로 만들었다. 한국 속담에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라는 말이 있다. 아마 이 말이 리담에도 있었다면 저들은 십중팔구 연기를 들먹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연기가 나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면서 땔감을 계속 집어넣고 그 때문에 굴뚝 속 재가 연기처럼 날리면 ‘거봐, 내가 말했잖아?’라고 할 듯한 양상이었다.
“이제 제로석 이용 시작이에요.”
“고생 많았어요, 레이.”
한 달을 고심해서 선정한 제로석 이용자 명단이 나왔다. 목적과 활용 계획을 정확하게 구사한 신청지를 뽑아 점수를 매기고 고득점 신청지를 추렸다.
이전에 말했던 대로 선정 이유와 점수 산정 방식, 신청인의 계획을 밝혔고 이를 각 도시 누구나 볼 수 있는 자리에 공고해 해당인은 소포니악으로 와서 본인을 인증하라는 것까지 알렸다.
“누가, 어떤 도시에 갈지 궁금하네요.”
익명이라 당연히 레이도 누군지, 어느 도시가 선정됐는지 몰랐다.
누군가는 주변 사람을 위해서, 누군가는 도시 발전을 위해서 등등 여러 이유로 신청서가 왔다. 신청서에는 익명을 어긴 것들, 이름만 말 안 했지 누구인지 추론 가능하게 넌지시 자신을 밝힌 것들이 절반 이상이나 됐다.
그 덕에 수많은 신청서가 자격 미달로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남은 것 중 제대로 양식을 맞춘 것이 또 절반, 그 나머지 절반에서 확실한 사용 계획이 있는 것들을 추리고 점수를 매겼다.
“라엘이야말로 정말 고생 중이잖아요. 당신 괜찮은 거 맞죠?”
테가푸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회원들을 공개한 게 아니라 이러한 단체가 있음을 밝히고 여성 작위 승계 법안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는 성명을 냈다.
“네. 분위기를 보니 다들 대강 짐작은 했었나 보더군요. 온 도시에 여성의 업적에 관한 글이 동시다발적으로 붙었으니 그럴 만도 했고.”
레이는 실명을 밝히고 그 성명에 동의를 하는 추천 글을 써 주었다. 제로석이 있기에 가능한 노출이었다. 지금 제로석 사용을 두고 모두가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밝힌 것이었다.
“내 눈치 보려면 앞으로 대놓고 반대는 못 할 거예요. 후후, 이게 권력의 맛인가.”
지켜 줄 사람들이 있고 그들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라엘, 당신도 내가 지켜 줄게요.”
“레이, 지금도 당신은 충분히 날 지켜 주고 있어요.”
레이가 루이반에 들어온 그 순간부터 그랬다. 날아오는 칼날로부터, 지난날의 상처로부터 레이는 그를 보듬고 지켰다.
“그래도 더 지켜 줄게요.”
레이가 라엘의 품으로 더 파고들었다. 매일 같은 밤이었다.
***
“이거, 이거 브리였다고?”
시범단 선정에 당선된 사람들 중 낯익은 얼굴이 모습을 보였다.
도시 구석에 있는 빈민가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겠다는 신청서는 사용할 날짜까지 기입해 둘 정도로 상세한 계획표가 짜여 있었다.
사용하지 않는 도시 기물을 처리해 비용을 충당하고, 사람들에게 벼락을 막아야 하는 물건이라는 사실을 정기적으로 알리겠다는 등 도시가 해야 할 일과 도시민들이 해야 할 일을 명확하게 구분해 실현 가능한 기획을 하고 있었다.
이 점이 높게 돋보여서 1순위로 선정했던 신청서였는데 그게 브리가 작성한 것이었다니. 소포니악 얘기였다니!
“제가 쓰면 혹시 집정관님이 편파 판정을 했다고 여길까 봐 걱정이 됐지만 그래도 우리 도시에 뭐든 발전할 수 있는 게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또 집정관님이 익명으로 하고 공정하게 하실 거라는 걸 알아서…….”
조금 횡설수설했지만 브리는 자신이 선정된 것을 진심으로 기쁘게 여기고 있었다.
“우리도 당첨된 거구나.”
소포니악 시설에 설치할 제로석 구매 비용이 떠올랐다. 그래도 혹시 하는 마음으로 남겨 두었던 예산이었는데 정말로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역시 내 눈은…….”
차기 집정관으로 이보다 더 완벽할 순 없다.
레이는 이 사실을 소포니악에 널리 알렸다. 브리가 제로석 시범 사용권을 획득해 냈다는 소식에 도시 사람들 모두가 와서 축하를 하고 함께 기뻐했다.
그리고 그 축하가 끝난 밤.
레이는 브리를 불러내 라미엘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계획을, 자신이 임기 전에 자리를 내놓겠다는 생각을 조심스레 브리에게 털어놓았다.
“그, 그게 그럼…….”
“정말 진심으로 너무 미안하게 생각해. 모두의 추천을 또다시 임시로 만들어서.”
브리는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이, 이건, 아니시죠.”
“내가 무슨 말을 해도 핑계 같은 거 알아. 정말 미안해. 너무 급해서 어쩔 수가 없었어.”
“급하다니요?”
레이가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했다.
“내가 이 도시를 정말 너무 좋아해. 그래서 필레가 있는 때처럼 돌아가 버리는 걸 도저히 볼 수가 없었어.”
레이의 말에 브리는 잠시 말을 하지 못했다.
자신을 후보로 올리고 나서 레이가 마음이 바뀌어서 집정관에 나온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때만 해도 별생각은 없었다. 알렉스 님이 집정관으로 나와 준 게 좋아서 다른 생각이 나지도 않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오디를 저지하기 위해, 오디를 막고 소포니악을 좋은 도시로 거듭나게 하기 위해 나온 것이었다니.
“집정관님…….”
“이 도시는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 나보다 이곳을 잘 알고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면 더 좋지.”
레이가 미안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브리가 후보에 올라야 사람들이 브리가 대단한 사람인 걸 인지하니까 지난 추천 때 말릴 수 없었어. 그렇다고 그 상황에 난 곧 내려갈 거라고 밝힐 수도 없었고.”
“대단, 대단하다니요.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전 아무것도 없고 그냥 평범한 엄만데…….”
“평범한 엄마면서 도시 계획을 하는 집정관 후보이기도 해. 브리의 계획은 검토 내역을 보면 알겠지만 월등하게 좋았어.”
당신은 뛰어난 사람이라는 칭찬은 처음이었다.
레이가 후보로 거론할 때만 해도, 후보에 올랐어도 자기가 대단하다는 사실을 브리는 인지하지 못했다. 남들이 다 할 줄 아는데 귀찮아서 하지 않는 걸 오지랖을 부려 나서서 한다고만 여기고 살았다.
“브리는 정말 멋진 사람이야. 내가 사랑하는 도시를 나보다 더 잘 가꿀 수 있는 사람이라고. 혼자라고 절대 겁먹지 마. 세상엔 브리 같은, 나 같은 사람이 많으니까.”
지난 세월, 아득바득 살아온 세월이 이 한마디로 다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브리의 눈시울이 저도 모르게 시큰해졌다.
“그리고 또 정말 미안해. 나중에 다른 사람들한테도 다 사과할 거야. 일단 브리 먼저 받아.”
레이가 다시 한 번 더 사과했다.
“……집정관 안 하시면 영영 여긴 안 오시는 거예요?”
“전에도 말하지 않았던가. 나 여기 양성소 소장이라고.”
브리가 웃었다. 발개진 눈으로 활짝.
***
황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웬만한 일은 본인 손을 거쳐야 된다고 하는 태자가 제로석 같은 일에 대리를 세운 것만 봐도 무언가가 있다고 다들 대강 짐작은 했다.
황제가 승하했다.
온 도시에 황제의 죽음을 알리는 검은 리본이 붙었다. 황녀 공개 연회와 대연회는 자동으로 취소되었고, 황실에 찾아온 큰 슬픔과 황제라는 거대한 별이 진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온 나라에 비상이 걸렸다.
황제가 병석에 누운 지 오래였지만 그래도 몇 개월은 더 버틸 것이라 생각했기에 갑작스러운 비극이었다.
수도 귀족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파칸과 집정관들이 열 일을 제치고 수도로 올라오기 시작했고, 황실은 조문을 하러 오는 먼 거리 도시의 집정관과 도시민들을 위해 황실 근처로 게이트를 열어 주었다.
소포니악 집정관인 레이는 소문이 각 도시에 닿기 전, 승하 사실을 빠르게 전달받을 수 있었다. 수도 대귀족인 라미엘이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통신기로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레이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정신없이 수도로 올라가고 있었다.
“미치겠네.”
얼마나 정신이 없었냐면 푸엥까지 데리고 왔을 정도였다.
도베가 마무리를 하고 바로 뒤따라오겠다고 해서 레이는 먼저 관사를 나왔다. 그는 서둘러 마무리를 하느라 푸엥이 뭘 하는지 못 봤고, 푸엥은 주인이 나가자 산책인 줄 알고 입에 목줄을 물고 레이 뒤를 졸랑졸랑 따라왔다.
“세상에, 저 검은 개는 또 뭐야.”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레이는 한 걸음 뒤에서 목줄을 물고 해맑게 웃고 있는 푸엥을 발견했다.
되돌아가서 푸엥을 두고 오기엔 늦었고, 검은 강아지라 근처 어디 맡겨 둘 곳도 마땅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푸엥까지 데리고 황실에 조문을 하러 가고 있었다.
“라엘, 수박…… 이 아니라, 크레하 경 꼭 데리고 와야 해요.”
[준비시켰습니다.]
푸엥을 맡기기 위해 루이반 공식 펫 시터 크레하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푸엥이 레이, 라엘, 푸둥 다음으로 좋아하는 존재이자 검은 개를 데리고 있더라도 주변에서 허튼소리를 못 하게 할 수 있는 오라도 있었다. 지금 같은 상황엔 미안하지만 그만큼 적격인 사람도 없었다.
푸둥은 오늘 대신전에 가는 날이니 워크산에서 놀다가 그곳에서 헤덴의 연구를 도울 것이다. 평소라면 소포니악 일을 마친 레이가 대신전으로 가서 푸둥을 달래 연구를 돕고 루이반으로 와야 하는 일정이었다.
[레이야말로 조심히 와요. 역까지 에스코트할 사람을 사 뒀으니 루이반 문장이 달린 마차를 찾아요.]
“네, 그럴게요. 우리 잠시 후에 봐요.”
헬라는 수도와 가까웠기에 임시 게이트는 없었고 열차로 올라가야 했다. 레이가 탄 열차 내부는 국가적 슬픔에 침울한 분위기였고 몇몇은 울음을 훌쩍이기도 했다.
자신과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얼굴 한 번 본 적 없더라도 누군가의 죽음은 슬프고 우울한 일이었다.
그리고 다들 저마다의 생각에 빠져 있느라 레이 발치의 검은 개는 차마 보지 못했다. 열차 2등석 아래 공간과 좌석 간 거리가 널찍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레이가 발밑의 푸엥을 쓰다듬었다.
“너 가면 무조건 조용히 해야 한다. 수박바 말 잘 들어야 해.”
할짝할짝. 똑똑한 강아지가 알았다고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레이의 손을 핥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