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마물 출현 (1)
“마, 마마, 마물!”
누군가가 혼비백산해 비명을 질렀다. 점액질에 뒤덮인 마물의 상체는 뱀과 비슷한 형상인데 조금 전 보였던 하얗고 가느다란 긴 팔을 양쪽에 달고 있었다.
쩍 벌어진 주둥이 안엔 괴상하게 생긴 길쭉한 파란 혀가 달려 있었고 하체는 사슴 같은 형상의 털 덮인 두 다리가 있었다.
눈동자는 흰 부분이 없이 온통 검은데 뱀처럼 세로로 쭉 찢어진 동공이 핏빛처럼 새빨갰다. 사람과 비슷한 형상의 얼굴이 달려 있기에 한층 더 기괴한 생김새였다.
마물의 징그러운 모습에 혼절을 한 사람들도 생겼다. 레이 역시도 딱 기절 직전이었다. 저렇게 징그러운 건, 사람이 찢겨 나가는 끔찍한 광경은 생전 처음이었다.
메리엔에게서 마물이 튀어나오자 하늘에 황실 내 비상 상황을 알리는 붉은 진이 펼쳐졌다. 사람들의 비명과 혼란 속에 순식간에 기도관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패닉에 휩싸였다.
“마님!”
얼이 빠진 레이를 일으켜 세운 건 케이였다. 그리고 푸엥의 목줄을 잡아 제 품으로 힘껏 안아 드는 건 엘이었다.
“케, 케이? 케이랑 엘이 여긴 어떻, 어떻게…….”
“4급 마물입니다. 피하셔야 합니다!”
“사정은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빨리 피하세요.”
[레이! 당신 아직도 거기 있어?]
귓가에서 라미엘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있어요. 케이랑 엘도 있고. 4급 마물이래요, 라엘!”
아직 기도관 안에 있어서 마물이 나타났다는 소란만 알고 있던 라미엘은 레이의 말을 듣고 아수라장이 된 주변을 급히 둘러보았다.
4급. 그 정도라면 무기만 있으면 충분히 처리가 가능한 등급이었다. 다만 황실은 고위 인사들이 모이는 자리이기에 무기의 반입이 금지되어 있어 누구에게도 마땅한 무기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기도관에서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아야 했다.
“크레하! 4급이다.”
라미엘이 신을 형상화한 조각상에서 검을 뽑아내며 외쳤다. 장식용 검이라 벨 수는 없게 칼날이 조금 두꺼웠지만 실물과 비슷하게 만들려고 강철을 사용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크레하는 다른 조각상에서 창을 빼 들었다. 당장 마물을 저지할 수 있는 사람은 토벌전에 참여했던 라미엘과 크레하 둘뿐이었다.
황실은 황족 보호와 황실 보안을 위해 일부의 특수 구역을 제외하고, 그 어떠한 마법도 허용되지 않았다. 마력석을 이용한 생활 마력 사용 정도만 가능했다.
게이트 역시도 사용이 불가했다. 하여 비상을 알리는 붉은 진이 나타났어도 당장 지원군이 도착하는 건 무리였고, 지금쯤 황실 기사들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중일 것이다.
황실 내부 인력들도 이동이 어려운 곳이니 당연히 9급이나 8급 정도의 하급 마물조차도 출입할 수 없었다. 그런데 4급이나 되는 마물이 출현을 했다니.
수백 년을 내려온 황실 보호 마법진이 틀어졌다면 당장 황실에서 알고 수습을 했을 터인데, 대체 저 마물은 어떻게 들어온 것인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의문이 떠올랐어도 중요한 건 아내가 있는 곳에 마물이 있고, 4급이라면 가장 외형이 징그럽고 극악한 형태인데 그걸 레이가 고스란히 보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그것이 무엇보다도 라미엘에겐 큰 문제였다.
“레이, 그건 지능이 많이 높지 않으니 케이와 엘을 따라 다른 건물에 피신해 있으면 됩니다. 눈 꼭 감고 가요. 금방 처리할 테니.”
아무 일도 아니라는 것처럼 최대한 평온한 목소리로 레이를 안심시킨 뒤 라미엘은 비명을 지르며 혼비백산하는 인파를 헤치고 나가면서 외쳤다.
“크레하, 넌 여기서 사람들 진정 좀 시키고 따라와.”
도움이 되기는커녕 패닉에 빠진 일반인들은 오히려 처분에 걸리적거리기만 했다. 혹여 괜한 영웅 심리에 기도관 밖으로 나와 자신도 싸우겠다고 설치기라도 하면 짐 덩어리다. 내부의 혼란을 조금이라도 진정시키는 게 먼저였다.
“다들 진정하시고 황실 기사단이 오기 전까지 여기 얌전히 계셔야 합니다!”
크레하가 단상 위로 올라가 소리치는 것을 들으며 라미엘이 기도관 밖으로 뛰어나갔다. 밖에 있는 인원은 내부보다 몇 없지만 마물과 직접적으로 만나고 있으니 상황은 더 안 좋을 것이다.
[라엘, 저건 뭐예요?]
라미엘이 밖으로 나왔을 때, 레이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더욱더 빠르게 레이에게 달려갔다.
[마물이 원래 저런, 저런 거예요?]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그 역시도 잠시 말을 잃었다.
***
무이 자작의 목을 부러뜨린 마물은 시체를 휙 내던지고 기괴한 걸음걸이로 비틀비틀 레이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엘이 말해 줬다. 마물은 같은 마물이나 동물을 잡아먹지 인간을 먹이로 삼지는 않는다고. 인간을 먹이 삼는 건 오로지 1급 마물뿐이라고 했다.
‘그런데 왜 저 마물은…….’
“배, 배가 고파아.”
아까 마물이 메리엔의 목소리로 어눌하게 말했던 게 생각났다.
‘푸엥을 먹으려고!’
무기가 있었다면 케이와 엘 중 한 사람은 마님을 보호하고 다른 한 사람은 마물을 제압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들 역시도 맨손이었고 지금 최대한 마물에서 보호할 수 있는 이는 레이 하나뿐이었다.
“마님, 무기 없이 저희 힘만으론 마물을 제압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기회에 마님이라도 빨리 도망가셔야…….”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다. 푸엥을 두고 그사이 도망가자는 말이었다.
“안 돼. 그건 절대 안 돼.”
레이는 푸엥이 왜 그리 평소와 달리 사납게 울부짖었는지 깨달았다. 자기도 마물의 존재가 무서워서 잔뜩 움츠리고 있었으면서도 삿된 것에 주인이 다칠까 봐 도망도 가지 않고 지킨 것이다.
저 혼자만이라도 살겠다고 일찍이 도망갔어도 동물의 생존 본능이니 당연하다고 여겼을 수 있는 일인데 주인을 보호하려고 버텼다. 이런 개를, 가족을 어떻게 내 목숨 살겠다고 버리겠는가.
“라엘이 올 거야. 금방 올 거니까 그 시간 정도는 벌 수 있잖아.”
“마님. 지금 정말 급해요.”
“너희도 봤잖아! 우리 애가 나 지키려고 한 거!”
두 사람은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레이와 푸엥을 들고 뛰자고.
각자 나누어 안고 한 명은 건물 안으로, 한 명은 마물의 시선을 분산시킬 수 있게 라미엘과 크레하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기로 결심한 케이와 엘이 빠르게 둘을 들쳐 메려는 순간이었다.
이쪽으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라미엘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끄어, 끄어어억.”
괴상한 소리를 내며 마물이 철푸덕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온몸을 기괴하게 배배 꼬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징그럽게 생긴 외형이 관절마다 꼬여 드는 광경은 더더욱 괴기하고 역했다.
“라엘, 저건 뭐예요?”
꼬여드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더니 우득우득 소리를 냈다. 마물의 몸 여기저기가 부러지듯 꺾이고 그 부분이 다시금 매끄럽게 펴졌다. 뱀 피부도, 사슴 같던 하체도 조금씩 사람의 다리처럼 변화했다.
마물이 조금씩 사람과 비슷한 형상으로 변화를 하고 있었다. 다만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관절 부분이 인형처럼 꺾이는 모양새라는 것 정도일까.
“마물이 원래 저런, 저런 거예요?”
갑작스레 모습이 변하는 마물을 보고 어리둥절해하는 건 레이뿐만이 아니었다. 모두가 외형을 바꾸는 마물을 보며 넋을 잃었다.
기괴하던 외관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요정 같은 모습만 남았다. 징그러운 것이 모습을 바꾸는 장면을 보지 않았다면 다들 숲속의 요정이라고 생각할 법한, 잠자리 날개까지 달린 어여쁜 인형 같은 모습이었다. 다만 뾰족하고 날카로운 손톱을 보면 예사 요정은 아니란 걸 알 수 있겠지만.
모두가 마물의 외형을 홀린 듯 바라보는데 안색이 달라진 건 오직 라미엘과 뒷수습을 대강 마친 크레하뿐이었다.
“레이, 절대 숨 쉬지 마요! 다들 코와 입 막고 안으로 들어가!”
마물은 본디 서로 다른 개체다. 9급 마물이 여러 동물을 잡아먹고 난폭해지고 힘이 세진다고 해서 8급이나 7급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모든 마물이 다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지금 이건 대체 뭐지.’
4급 마물이 1급 마물로 변했다.
허공의 붉은 진이 번쩍이며 크기를 더 크게 키웠다. 1급 이상, 국가적 초비상 사태에나 보는 표식이다.
황실 가운데에 나타난 최강의 마물에 긴급 허용된 게이트가 열리려는 마법진이 떠올랐다.
게이트 구축까지 약 5분. 이제 막 태어나 자신의 힘과 능력이 어떤지 모르는 1급 마물이 제멋대로 활개 치기 전에 타격을 주고 기사단과 마법사들이 올 때까지의 시간을 벌어야 했다.
라미엘은 가지고 있던 검으로 마물의 목을 내리쳤다. 이걸로 1급이 가진 두 목숨 중 하나를 끊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진 않았다. 지금 가진 무기로 최대한 타격을 줄 수 있는 정도에서 만족해야 했다.
“꺄아아아악! 끼에엑!”
1급의 목이 잘릴 것처럼 푹 파였다. 그리고 검도 부러졌다. 장식용치곤 톡톡히 제 역할을 한 일회용 검을 버리고 라미엘이 레이에게 달려왔다.
“라엘!”
“최대한 이곳에서 벗어나서 황실의 보호가 적용되는 주 건물로 가요. 저놈이 깨어나서 독 분진을 퍼뜨리면 숨 쉬는 것도 위험합니다. 창문을 꼭 닫고 있어요.”
이전엔 숲이었지만 지금은 하늘이 툭 터지고 사방 어디든 몸을 숨길 수 있는 건물이 즐비한 황실이다. 지난 토벌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극악한 상황이었다.
“당신은요? 라엘, 당신도 같이 피해요. 황실 기사단이 곧 올 거예요. 제발, 당신도 가요.”
“지금 이곳에서 저걸 상대할 수 있는 건 나와 크레하밖에 없어요.”
“라엘!”
“빨리 마님을 안으로 모셔라.”
“예.”
그는 아무리 말려도 안 들을 기세였다.
“……조심해야 해요. 다치지 마. 당신 다치면 정말 가만 안 둘 거야!”
“그럴게요.”
레이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케이와 엘의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여기 있어 봤자 자신도 다른 이들과 똑같은 걸림돌일 뿐이었다. 저 마물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빨리 자리를 피해 그가 조금이라도 마음 편히 마물을 처치할 수 있기를 바라는 편이 나았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라미엘 역시도 자신과 함께 피하길 바랐지만 그는 남아서 사람들을 지키는 쪽을 택했다.
진짜 귀족도, 진정한 루이반도 아닌 서자 소릴 듣던 라미엘이 요즘은 전부 사라졌다고 말하는, 자신보다 약한 자들을 보호하라는 리담의 ‘귀족 정신’을 발휘해 사람들을 보호하길 자처하고 있었다.
기저에 우월한 자가 우매한 자들을 이끌어야 한다는 선민사상이 깔려 있는 게 귀족 정신이었지만, 지금의 라미엘에겐 표면적 의미인 강자가 약자를 지킨다는 그 하나만 적용되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