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마물 출현 (2)
“게이트는 아직인가!”
태자의 닦달에 마법사들이 난감한 얼굴을 했다.
“최대한 빠르게 구축 중입니다.”
1급 마물이라니.
토벌전에는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를 하고 갔기에 일반 기사들도 참여가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선 당장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도 모를 기사가 투입되어 봤자 개죽음만 당할 고위 마물이다. 토벌전 출신 기사들이나 마기사, 마법사들을 보내야만 해결이 날 것이다.
처음에 4급 마물로 보고가 되었을 때만 해도 일반 기사들을 보내려고 준비하는데 삽시간에 보고 내용이 바뀌었다.
황실에 마물이 등장한 게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인데 그마저도 1급이다. 유례없던 일에 초비상을 알리는 진이 펼쳐지고 그걸 본 황실 마법사는 바로 태자와 태자비가 있는 곳에 방어 마법을 걸기 시작했다.
황제가 죽었으니 태자가 이제 황제였다. 황실에서는 황제와 황후 둘의 안전 확보가 최우선이었기에 두 사람은 황실의 비밀 공간으로 자리를 옮겼고 최고위 황실 마법사 셋이 그 곁을 지켰다.
그리고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고받을 수 있는 위급 상황용 마력이 발동되었다. 태자 파르베제의 명을 수행하는 곳과 연결되는 통신 게이트가 생겼고 태자는 그 게이트를 통해 어떤 상황이 펼쳐졌는지 지켜볼 수 있으며 그에 따른 명령을 전달했다.
“대신전까지, 예하께 소식 전하는 데 얼마나 걸리지?”
“앞으로 40분은 소요됩니다.”
이것도 그나마 줄여 말한 것이었다. 황실 내 마력 이용이 가능한 곳은 사용하는 마력의 양에 따라 지정된 곳이었다. 당연하게도 사용할 마력이 많을수록 본궁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베롬이라는 먼 거리에 황실처럼 보호로 뒤덮인 대신전으로 가서 헤덴을 부르기까지는 제법 많은 마력을 소모하는 일이었기에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토벌전 때는 헤덴에게 미리 요청을 해서 그가 와 있던 것이지 지금처럼 긴급을 요하고 많은 이들의 목숨이 달린 시점에선 그 40분도 너무 긴 시간이었다.
콰콰쾅!
그때 무언가가 크게 부서지고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파르베제가 급히 통신 게이트를 확인하니 황실 후원에 별채 하나가 무너져 있었다. 이는 기도관보다 훨씬 황실 중앙 가까이에 있는 건물이었다.
오로지 마법과 마물을 ‘막는’ 것에만 치중을 한 수백 년간의 황실 보호 마력이 허점을 드러내고 있었다.
***
“라엘! 라엘, 당신 괜찮아요? 라엘!”
건물이 흔들리는 충격과 굉음에 레이는 다급히 라미엘을 찾았다.
그가 싸우는 데 방해가 될까 봐, 집중력이 흐트러질까 봐 차마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라엘의 숨소리와 명령을 외치는 소리만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듣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지금처럼 충격파로 자신이 숨어 있던 방의 유리가 깨질 듯 흔들릴 정도였으니 근처에 있던 라미엘의 안위가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멀쩡합니다. 레이야말로 더 안전한 곳으로 가 있어요.]
조금 뒤에 나지막한 라미엘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친 곳은 없는지, 잘 피하고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꾹 참고 라미엘이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대답했다.
[잠시 이건 꺼 둘게요. 내 걱정 말고 당신만 걱정하고 있어요. 금방 돌아올게요.]
한국에서 영화를 보면 꼭 못 돌아오는 사람이 저런 소리를 했었다. 사망 플래그 세워지는 라미엘의 소리에 레이의 마음이 섬뜩해졌다.
‘아냐, 내가 무슨 생각을!’
찰싹찰싹 제 뺨을 내리치며 레이가 마음을 다잡았다. 불길한 생각 따윈 하지 말자.
“당신 다치면 내가 정말 가만 안 둘 거야.”
라미엘이 알았다며 작게 웃는 것을 끝으로 통신이 끊어졌다.
케이는 라미엘을 돕기 위해 근처에 있던 무기들을 한 아름 챙겨서 현장으로 갔고 엘이 남아서 레이를 지켰다.
“마님, 좀 더 먼 곳으로 피하셔야 합니다.”
이런 정도라면 아예 황실을 벗어나 피신하는 편이 더 좋을 듯싶었다. 마물이 어디로 갈지 알 수 없지만 지금 상황을 봐선 가장 위험한 곳이 황실 같았다.
펑!
또 한 번 폭발음이 들렸다.
“저 마물이…….”
방금 전의 폭발보단 훨씬 약해진 위력이지만 마물이 성의 입구를 날려 먹는 게 보였다. 황실을 벗어나려던 사람들이 주춤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성 밖으로 나가는 일은 불가능해졌다. 고립이었다.
“예전에 토벌전 때 예하가…….”
마님을 모실 피난처를 찾으려는 엘의 마음과는 달리, 어떻게든 라미엘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던 레이는 이전에 헤덴의 도움을 받았던 토벌전을 떠올렸다.
‘헤덴 예하!’
게이트만 쓸 수 있었다면 당장 헤덴을 만나러 갔겠지만 황실 내에서는 아무리 목걸이를 건드려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것만, 이것만 쓸 수 있으면 라엘을 도울 수 있어.”
마력 사용이 가능한 곳을 알려 줄 수 있는 건 태자와 황실 마법사들뿐인데 그들을 찾아갈 시간이 없었다.
‘빨리, 빨리 생각해 내! 레이알렉시스, 최대한 빨리 게이트 이용을 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주먹을 꼭 쥐고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구상하려는 마님을 보자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을 게 분명했다. 엘은 아까 계획했던 대로 마님을 둘러업고 이동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푸엥의 목줄을 손목에 감았다.
“마님, 잠시 실례를…….”
“인물관.”
“네?”
게이트를 쓸 수 있는 곳이다. 레이가 창가로 다가가 인물관의 위치를 확인했다.
“마님! 거기 계시면 위험하세요!”
엘이 레이를 뒤로 당기려는데 레이가 손길을 가벼이 쳐 냈다.
“여기서 가까워. 내가 할 수 있어.”
이곳이 황실 중앙부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그랬다면 인물관까지 갈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무슨 말씀이세요?”
“헤덴 예하, 모셔 올게.”
레이가 다급히 방을 나설 준비를 했다.
“푸엥 잘 지키고 있어 줘! 금방 올게!”
“마님!”
“엘은 내 게이트 알잖아!”
레이가 무슨 계획을 했는지 알아차린 엘은 마님을 따라가야 했다. 하지만 푸엥을 두고 갔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반대로 마님을 혼자 인물관에 가게 두었다가 마님께 일이 생기면…….
푸엥도 소중하지만 후자가 더 중요했다.
“함께 가시죠.”
“안 돼. 내가 대신전에 가고 나서 엘이 위험해질 수 있잖아.”
“전 기사입니다. 그리고 마님을 보호하기 위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고요. 제발 제가 제대로 일을 할 수 있게 이해해 주세요.”
“엘이 임무 수행을 성공하는 것보다 살아 있는 게 난 더 중요해.”
“마님, 인물관이라고 하셨죠? 저 건물, 기도관 근처입니다. 아무리 마물이 별채로 움직인 것 같다고 해도 전 절대 그리 못 보내 드려요!”
쾅!
또 무언가가 폭발했다. 저 멀리 한층 더 중앙 가까운 건물의 지붕 일부가 부서졌다.
“저것 봐. 여기서 더 멀어지고 있어. 지금 아니면 또 저게 이쪽으로 올지도 몰라. 그러니까 지금이 기회야. 빨리 다녀올게. 이건 명령이야. 내 명령 거역하지 마.”
“마님!”
“나 무사히 잘 다녀올게, 예하 모시고 올 테니 걱정 마!”
말을 하고 나니 사망 플래그 같은 대사였다.
하지만 절대로 자신은 다치거나 죽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쓸 돈이 많은 자의 집념은 생각보다 질기고 무서운 법이다.
이제 막 제로석 판매 시작인데, 앞으로 죽어라 돈을 쓰며 살아도 버는 돈을 못 따라잡을 터인데 아까워서 어떻게 죽나. 토끼 같은 내 남편은 또 어쩌고.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을 것이다.
엘이 말릴 틈도 없이 레이는 방을 나와 복도를 내달렸다.
“이거 가져가세요! 분진 조심하시고요!”
엘은 레이를 막아서는 대신 빠르게 그녀에게 달려와 손수건을 건넸다. 그리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조금이라도 1급 마물의 분진을 피할 수 있게 단단히 손수건을 둘러 주려고 했다.
하지만 레이는 손수건을 받자마자 고맙다고 방긋 웃고는 엘이 뭐라고 할 틈도 없이 쏜살같이 내달렸다.
레이는 달리면서 코와 입을 가리도록 둘러 묶고는 인물관으로 향했다.
비명 소리와 기괴한 울음소리, 여러 소리가 요란하게 한데 뒤섞여 어지럽게 울려 퍼졌고 근처에는 통곡소리가 가득했다. 목숨을 잃거나 다친 자들이 내는 공포에 휩싸인 기운이 한껏 느껴졌다.
레이는 힘껏 달려 인물관으로 들어왔다. 충격으로 벽에 걸려 있던 초상화 절반 이상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조각상들이 바닥에 부서진 채로 나뒹굴고 있었다. 발밑에 잔해들을 바작바작 밟으며 레이가 게이트를 열려고 했다.
“왜 이러지?”
그러나 아무리 목걸이를 만져도 게이트가 열리지 않았다. 헤덴을 떠올리고 베롬의 풍경과 대신전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다시 시도해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방금 전에 태자의 황실 재난 선포 명령이 가동되면서 생긴 변화였다. 마물이 황실을 벗어나지 않게 마법사들은 황실 전체에 이르는 강력한 보호 배리어를 쳤고, 그 바람에 마력 사용이 가능한 지정 장소 외에는 다 같이 보호 구역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 사실을 모르는 레이는 딱 미치기 직전이었다.
‘내가 매일 게이트를 너무 써서 그런가. 아냐, 그럴 리 없어. 그 정도로 자존심 상하게 나가떨어질 분이 아니신데.’
이유를 알 수 없어 속만 탔다. 시간이 점점 흐르는 것 같아서 레이는 더 초조해졌다.
어떻게든 게이트를 열어야 하는데 하필 이럴 때 대신전 게이트가 먹통인지!
“이곳은 비밀 창고이기도 하지만, 유사시에 탈출할 길이 있는 통로가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레이에게 알려 주는 거예요. 이쪽은 황실로, 저쪽은 저택 밖으로 향합니다.”
황실과 연결된 비밀 통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라미엘이 가주만이 알던 비밀을 넘겨주면서 분명히 그랬다.
“초대 루이반 공작의 초상화와 연결이 될 겁니다. 황제가 황실 내부 깊숙이는 갈 수 없어도 황실까지 오는 건 허락을 해 준 거죠.”
황실을 벗어나 루이반 영역으로 넘어가면 게이트를 사용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 같은 비상 상황에 사용할 수 있는 비밀 통로였다.
“초대 루이반 공작…….”
레이가 다급하게 벽에 붙어 있는, 초상화 인물의 이름이 새겨진 명판을 읽었다.
“저거다!”
마물이 또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한결 가까웠다. 정말로 마물이 이쪽으로 다시 방향을 틀기라도 하는 듯해서 마음이 급해졌다.
“어떻게 여는 거지.”
초상화 액자와 그림 부분을 눈으로 훑고 손으로 더듬어 보았다. 연결 통로로 갈 수 있게 열리는 부분이 분명 있을 터인데 마음이 급해서인지 손이 떨려서인지 빨리 찾아지질 않았다.
까치발을 하고 팔을 쭉 뻗어 초상화 액자의 윗부분까지 꼼꼼하게 훑는데 손톱에 작은 돌기 같은 게 걸렸다. 마감이 어설프게 된 벽의 돌기처럼 느껴지는 작고 하찮은 감각이었지만 여태 매끄럽던 중에 유독 이 부분 하나만 걸릴 리 없다.
레이는 미미한 돌기를 꾹 눌렀다.
철컥.
무언가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레이가 손을 대고 있는 초상화 부분이 희미하게 빛나더니 스르르 문처럼 열렸다.
레이가 가문의 비상 통로를 이용할 수 있도록 라미엘이 등록해 놓은 일이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빛을 발했다. 돌기를 찾아 잠금장치를 열었어도 허락된 이가 아니라면 결코 열리지 않았을 비밀 통로가 모습을 보였다. 어둡고 딱 레이 키 정도의 낮은 사각의 복도였다.
레이는 어둠 속을 향해 달렸다.
“헉, 허억.”
그러면서도 레이는 쉬지 않고 계속 목걸이를 만지며 게이트를 구상했다. 숨이 차올라서 묶어 둔 손수건을 풀어 헤치며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다리가 제 속도를 못 이기고 꼬여서 넘어지는 순간 눈앞에 어둠이 사라지고 낯익은 자가 모습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