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마물 출현 (4)
“안 돼─!”
레이의 품에 갇힌 라미엘이 절규하듯 비명을 질렀다.
레이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몸을 내던질 줄 몰랐다. 순식간에 레이와 위치를 바꾸었지만 마물이 덤벼드는 속도가 더 빨랐다.
펑!
1급 마물의 수많은 뾰족한 이가 레이와 맞닿기 직전 밝은 빛이 나며 무언가가 마물을 밀어냈다.
“끼에엑!”
몇 발자국 뒤로 튕겨 나갔던 1급이 빠르게 다시 달려들었다.
헤덴이 급히 성력으로 만든 금빛 사슬로 1급의 다리를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제재를 가했으나 아주 아슬아슬한 차이로 마물이 좀 더 빨랐다.
콰득.
라미엘의 품에 안긴 레이의 귓가에 선득한 소리가 들렸다.
“아가─!”
“라미엘 님!”
라미엘은 왼팔로 레이를 안은 채, 오른손에 쥔 검을 제 왼쪽 어깨를 물어뜯는 1급 마물에게 내리꽂았다.
“끼이익, 께엑─!”
마물이 고통 어린 소리를 내며 라미엘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와 동시에 헤덴이 사슬을 잡아 당겨 마물과 라미엘을 분리했다.
헤덴이 곧장 라미엘의 어깨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헤덴이 내뿜는 치료 성력이 피로 붉게 물든 그의 어깨를 감쌌다.
곧 게이트가 열리며 황실 마법사들과 마기사단이 나와 1급 마물을 둘러싸며 공격을 시작했다. 1급을 잡기 위해 보호 장치를 해체한 건지 마법사들이 저마다의 공격 마법을 시전했다.
“예하께서 그리 놀라신 건 처음 봅니다.”
지원군이 도착했으니 이제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다. 남은 건 다 함께 마물에 달려들어 저걸 죽이는 것뿐이었다.
“아가, 넌 이 상황에 그런 말이 나오는 게냐.”
헤덴은 잠시 후방으로 물러나 라미엘의 어깨 치료에 더 힘을 쏟았다.
라미엘의 품에 안긴 레이는 고개도 들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이런 긴급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자신에게 달려와 도움을 요청했을 뿐 아니라 1급 마물을 접하고도 씩씩하던 아가 조련사는 아가의 부상을 차마 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존재의 부재를 경험할 뻔한 공포가 레이를 잠식했다. 앞이 새하얗게 물들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느껴지는 건 오직 라미엘의 심장 소리뿐이었다.
라미엘이 헤덴과 하는 말을 듣고 나서야 레이는 감각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라, 라엘, 라엘…….”
울음을 터트리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라미엘은 레이를 더 꼭 안아 주었다.
그 역시도 방금 전, 레이를 잃을 뻔한 기억을 떠올리고 이를 꽉 깨물었다. 심장이 뽑히고 산 채로 피가 식는 끔찍한 기분,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을 것 같은 극심한 상실감이었다.
“레이, 다신 방금 전 같은 짓 하지 마. 제발.”
조금 빠르게 쿵쿵 뛰는 라미엘의 심장이 그가 느낀 불안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듯했다.
“라엘, 당신 지금 괜찮은 거예요?”
레이는 대답 대신 그의 안부를 물었다.
“당연하죠. 누가 구해 준 목숨인데.”
라미엘이 헤덴에게 시선을 보냈다. 감히 대신관에게 명령을 내리는 시건방지기 짝이 없는 눈빛이었지만 고약한 아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뭘 걱정하는지는 알 것 같아서 헤덴은 혀를 차며 라미엘의 어깨가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도록 작은 환시를 걸어 주었다.
레이가 고개를 들자 눈물범벅이 된 푸른 눈동자가 라미엘의 어깨부터 확인하고는 이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진짜네. 다행이다.”
“이제 다 끝났어요. 그러니까 안전한 데 가서 꼭꼭 숨어 있어요.”
라미엘의 말에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크레하, 레이를 안전한 곳으로 빨리 데려가!”
크레하는 라미엘의 명을 듣자마자 바로 레이를 어깨에 얹고는 현 상황에서 가장 안전할 황실 중앙을 향해 달렸다.
“마님, 잘 매달려 있어요!”
레이를 메고 달리는데도 크레하는 성큼성큼 잘도 달렸다.
그는 사람들이 피신해 있는 황실 중앙부 건물에 도착하고 나서야 레이를 내려놓고 작게 숨을 몰아쉬었다.
“잠깐만.”
다시 현장으로 달려 나가려는 크레하를 레이가 막아 세웠다.
“라엘, 정말 괜찮은 것 맞아?”
아직도 귓가에 선득하게 남아 있는 소리는 분명히 그가 다쳤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라미엘은 멀쩡한 모습이었다. 소리와 모습의 괴리가, 간극이 도저히 한쪽을 믿을 수 없게 만들었다.
“……몸 조심히 계십시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크레하가 어색한 표정으로 말을 돌렸다. 레이는 크레하가 떠나지 못하게 손목을 잡고 물었다.
“얼마나 다친 거야?”
“안 다치셨어요.”
“심각해? 나한테 차마 말도 못 할 정도야?”
크레하가 천천히 레이의 손을 떼어 냈다.
“예하께서 치료해 주시면 나을 정도니까, 마님께선 크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다녀오겠습니다.”
그가 정중히 말을 마치고 재빨리 현장을 벗어났다.
모여 있던 사람들은 라미엘의 부상 소식과 함께 루이반의 기사단장이 아직도 레이에게 깍듯한 것을 보며 놀랐다.
이미 끝난 부부 아닌가. 지금 같은 위급 상황에서는 친한 척을 할 필요가 없을 텐데.
심지어 귀족의 이혼은 지리멸렬하고 추잡하다. 재산이 많을수록 더더욱 그랬다. 한창 싸워야 할 시기에, 지금같이 정신없는 상황에 여느 부부처럼 보이는 모습이 어색하기만 했다.
쾅! 콰광!
무언가가 폭발하는 소리가 들리며 사람들이 피신해 있는 건물이 흔들렸다. 다시금 자신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 상기되자 사람들은 루이반 부부에 대한 관심을 지울 수 있었다.
‘통신을…….’
귀걸이에 손을 대려던 레이가 다시 손을 내렸다. 지금이면 라미엘이 반응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괜한 방해는 하지 말아야 한다.
레이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구석으로 가서 눈을 질끈 감았다.
‘방금 전에 그건 뭐였을까.’
라미엘을 감쌌을 때 마물을 튕겨 내던 그 힘. 헤덴이 수를 쓴 것도 아니고 황실 마법사들이 보호를 한 것도 아니었을 텐데.
자신에게 혹시 어떠한 힘이 있는 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이걸로 라엘을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냐, 내 힘은 분명히 아녔어. 내가 뭘 했다면 눈치챘을 거야.’
레이는 자기 자신에게 힘과 연관된 일이 무엇이 있었는지 차근차근 이전의 일들을 되짚어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다. 자기 주변의 강자는 라미엘과 헤덴뿐이다. 라미엘과 부부라고 갑자기 자신에게 마물 퇴치 능력이 생길 리는 없고, 헤덴을 꼽자면 그에게 받은 건 게이트를 사용할 수 있는 목걸이뿐이다.
“네 목걸이에 축복을 내려 주마.”
목걸이를 떠올리자 헤덴이 푸둥을 떠넘기면서 뭔지도 모를 축복까지 걸어 줬던 일이 생각났다.
“그거다. 그거였어.”
푸둥을 맡게 된 일로 레이는 큰 보답을 받은 셈이었다. 아이가 주는 사랑도 벅차지만 푸둥 덕분에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다.
더불어 푸엥 덕분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엘과 푸엥은 아직도 거기 있을까? 그 둘도 이쪽으로 와야 할 텐데.’
원래 있던 곳과 마물이 너무 가깝다. 1급 마물은 날 수 있다 보니 활동 반경이 넓어 황실 어디든 돌아다니고 있었다. 다만 갓 태어난 탓에 아직 날개를 제대로 못 쓰는지 건물과 건물을 건너다닐 때 보조 수단 정도로만 사용하고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푸스!”
“랠리나!”
새로이 피난처에 누군가가 올 때마다 다들 자신의 가족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안도했다. 가족의 생사를 확인 못 한 이들은 다른 곳에 마련된 피난처에 그들이 있기를 소망했다.
“마님!”
그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오는데 그중에 엘과 푸엥이 보였다.
“엘!”
푸엥이 엘의 손을 벗어나 레이를 향해 뛰어왔다.
“내 새끼!”
푸엥이 레이의 품에 안겨 온 얼굴에 뽀뽀를 퍼부었다.
“고마워, 푸엥. 날 구한 거 우리 애기야.”
검은 개를 꼭 껴안는 루이반 공작 부인을 사람들이 쳐다보았다. 본인들도 똑똑히 본 광경이었다. 검은 개가 주인을 지키기 위해 마물에 맞선 것을 보고 나니 그간 가져 왔던 검은 개에 대한 편견이 한층 벗겨져 나갔다.
불길하다 여긴 검은 개가 오히려 정말로 불길한 존재에게서 용맹하게 제 주인을 지키는 모습을 보면 그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개한테 애기니, 내 새끼니 하는 루이반 공작 부인이 이상하고 참 유난이 심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럴 만하다고 여겼다. 자신 같았어도 저런 개라면 그랬을 것이다.
사람들은 달라진 눈으로 공작 부인 품 안의 검은 개를 바라보았다. 여러 사람이 다들 공포에 질려 혼란스러운 분위기가 넘실거리는데도 검은 개는 불안해하지 않고 눈을 빛내며 제 주인만 바라보면서 좋아하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세상의 전부인 것 같은 눈이었다.
마물이 내는 소리, 그런 마물과 싸우는 소리와 더불어 이따금씩 창문이 깨질 것처럼 건물이 충격을 받아 흔들리고 있었다.
불안한 마음이 가득 찬 혼란한 분위기 속에서 그나마 마음을 안정할 수 있는 건 검은 개의 사랑 가득한 눈빛뿐이었다.
사람들이 조금씩 푸엥과 레이 근처로 다가와 자리를 잡았다. 지금은 그 어떤 것이라도 불안하고 무서운 마음을 달랠 만한 존재가 필요했다.
***
1급 마물이 자기가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인지한 듯했다. 그간 높게 점프를 해 건물 사이를 뛰어갈 때나 사용하던 날개를 제대로 쓰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마법사들은 1급의 날개를 잡아 놓는 데에 주력해야 했다. 놈이 날지 못해야 땅에서 기사들이 싸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을 1급도 눈치챘는지 뾰족한 손과 분진 독을 이용해 마력으로 만든 사슬을 몇 번이나 끊어 내고 움직이려 했다.
마법으로 만든 뾰족한 창이 몇 번이나 몸을 관통했지만 1급은 번번이 제 몸에 꽂힌 창을 부숴 내고 조각을 인간에게 던졌다.
제 몸을 복원하면서 마물은 점점 더 단단해졌다. 신종 1급 마물의 스스로에 대한 각성은 늦어도 한 번 제 능력을 인식하면 빠르게 그걸 응용하고 습득하는 모양이었다.
“허리랑 팔도 묶으라니까!”
답답한지 라미엘이 검을 휘두르며 마법사들에게 크게 소리쳤다.
푸둥이 거대 분진 덩어리를 태워 버린 이후로 1급은 계속 묶여 있는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분진을 썼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폭발을 일으키거나 분진을 넓게 퍼트려 독으로 인간들을 공격할 수 없었다.
남은 일은 더 이상 움직일 힘이 없게 1급의 모든 체력을 소진시킨 뒤 몸을 조각내 죽이는 일뿐이었다. 쉬워 보이는 일이지만 몸부림을 치며 난동을 부리는 것을 보면 그렇지도 않았다.
사람들이 많이 있는 곳을 느끼는지 1급은 자신을 묶고 있는 사슬이 부서져 자유를 찾을 때마다 사람들이 피신해 있는 건물을 향해 몸을 움직이곤 했다. 그곳엔 레이도 있기에 라미엘은 어떻게든 저 마물을 끝장내야 한다고 다시 한번 다짐했다.
그의 초조한 마음을 아는지 푸둥이 다시 검은 불을 내뿜었다. 아직 제대로 된 검은 불을 소환하지 못하고 있고, 한 번 사용하면 다음까지 조금의 시간이 필요한 어린 용이지만 제 가족들을 지키고 싶은 마음만은 어리지 않았다.
푸둥이 1급 마물의 날개만을 공략해 불을 토해 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날개가 반쯤 타서 쪼그라들더니 이내 제 기능을 상실했다.
마물이 더 이상 공중을 날지 못하고 바닥에 툭 떨어졌다. 이제 남은 건 독 분진을 피해 베고 또 베는 일만 남았다.
그때 갑자기 게이트가 열리며 토벌전에 참석했던 루이반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