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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154화 (154/160)

154화. 10

굳게 닫힌 문 앞에서 레이가 물었다.

“왜 안 돼?”

레이의 물음에 크레하는 시선을 돌렸다.

“수박바, 나 봐. 왜 안 보는데. 왜 나 못 들어가게 해?”

라미엘이 있는 방은 출입이 허락되지 않았다. 문 앞에 수문장처럼 크레하를 세워 뒀는데 그렇다고 철저히 외부의 출입을 막는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레이만 못 들어갔다.

“수박바, 수박? 지금 마님 저한테 수박이라고 하셨습니까?”

마음이 급했는지 속으로 부르던 크레하의 별명이 툭 입 밖으로 튀어나와 버렸다.

“……무슨 소리니. 경, 싸우다가 귀를 조금 다쳤나 보다.”

“아닌데. 그럴 리 없는데. 아무튼 안 됩니다. 바꿔 줄 생각 없어요. 빨리 돌아가세요.”

크레하는 판사가 판결을 내리듯 단호하게 레이를 물렸다. 부부의 이혼 사정을 아는 그가 루이반 마님을 막아설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다. 윗사람의 명령이 있었다는 것.

라미엘은 다른 사람들은 다 만나도 레이만큼은 만나려 하질 않고 있었다. 케이도 엘도 들어갈 수 있는 것 같은데 저만 안 됐다.

“그림자 기사를 물리신 걸 알고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이혼을 진짜처럼 보이게 하려고 라미엘이 그림자 기사를 물리던 날. 케이와 엘은 그 사실을 알고 라미엘을 찾아갔다.

무슨 이유로 호위를 치우셨는지 모르겠으나 허락하신다면 몰래 뒤에서 마님을 지키겠다는 결심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루이반가의 명령이 아니더라도 ‘레이알렉시스’라는 인물을 위해 꼭 그러고 싶었다.

말은 허락을 구한다 했지만 기실 라미엘이 허락하지 않았어도 둘은 레이를 지키러 갔을 것이다.

라미엘은 가문과 관련 없는 다른 이들을 뽑아 레이를 몰래 지키게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전담 하녀 일을 그만두라는 자신의 명령도 거부하고 둘은 자의로 레이를 지키겠다며 나서고 있었다.

실력은 성에 안 차더라도 레이를 지키고 싶다는 의지와 진심은 그의 마음에 들었다.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마라.”

“명심하겠습니다.”

크레하도 그렇고 루이반 소속 기사들은 모두 마님이라면 주인의 명도 거스르고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이 점이 라미엘은 몹시 마음에 들었다. 레이는 주변을 아꼈고, 그 덕분에 진정한 사람들을 얻었다.

“에잇.”

기습 진입 시도는 단숨에 막혔다. 크레하는 레이를 막아섰다.

***

부서진 건물 일부에 있던 의료실에서 목이 부러져 죽은 의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최초의 피해자였다. 1급 마물과 싸웠던 사람들 말고도 독 분진을 마시고 죽은 자들, 부서진 건물에 깔려 다치거나 죽은 자들 등등 사상자가 속출했다.

헤덴과 치료 신관들이 매달려 살아남은 부상자를 치료했고, 치료가 끝났거나 부상이 심각하지 않은 자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황제의 장례는 황족끼리 모여 약식으로 치른 뒤,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되면 다시 제대로 모실 수 있게 일정을 뒤로 미뤘다.

부서진 건물들을 복구하는 데엔 최소 1년은 걸릴 예정이나, 황실 보호를 위해 마력을 새로이 걸어 두어야 하는 일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부서진 건물의 복구가 얼마나 걸릴지는 미지수였다.

“조금이라도 접촉하신 분들은 이곳으로 오십시오! 반드시 검사를 받으셔야 합니다!”

신종 1급 마물과 접촉한 자들은 우선순위로 검사를 받았고, 모두 아무 이상 없다는 정상 판정을 받고 나서야 황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마물의 사체는 보존 처리를 해서 병자들의 치료만 끝나면 본격 연구에 들어간다고 했다.

마이클레이 공작은 사건의 증인으로, 일의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황실에 남아 조사를 받고 있었다.

“메리엔은, 아내는 사냥제 이후부터 이상했습니다. 계속 몸을 움직이지 못했고,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냥제 때 워크산에서 알을 발견하고 가져왔으며, 그걸 요리해서 아내가 먹은 이후 이상해졌다고 증언했다.

사냥제에서 사냥한 짐승 말고 다른 것은 워크산 보호를 위해 신관들에게 확인을 받고 나서 가져갈 수 있는데, 달걀만 한 작은 알이라서 가볍게 생각하고 그냥 챙겨 왔다고 했다.

알이 알록달록한 무늬가 있는 게 특이하고 예뻐서 슬쩍 가지고 온 건데, 후에 외출을 하고 돌아와 보니 알은 깨어져 껍질만 남아 있었다고 설명한 그는 곧 의아한 얼굴을 했다.

“아, 그때 분명 무언가 요리를 한 흔적이 없었는데…….”

취조를 받는 중에 생각이 났다며 덧붙인 말로 상황이 파악되었다.

미성숙한 상태에서 부화한 4급 마물이 희박한 확률로 죽지 않았고, 살아남기 위해 옆에 있던 인간의 몸에 들어가 기생을 하며 점차 힘을 얻어 갔던 것이다. 속은 마물이어도 겉은 사람이니 황실의 보호진도 마물이 겉으로 튀어나오기 전까지 작동하지 않았던 것이고.

몸속 마물이 힘을 얻을수록 숙주가 된 인간은 점점 생기를 잃고 껍데기가 되어 갔고, 차후 인간의 일부와 4급 마물의 결합으로 전혀 다른 종류인 1급 마물이 되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인간의 몸 어디에서 어떤 영향을 받아 서로 다른 종간으로 몸이 바뀔 수 있는지가 앞으로의 연구 관건이었다.

메리엔의 시신 역시도 보존 처리가 되어 대신전 연구실로 이동되었고, 이어 황실 연구부에서 초기 검토를 끝낸 1급 마물의 사체 역시도 베롬으로 보내졌다.

황실 재건을 위해 앞으로 정신없을 테니 연구는 대신전에서 맡기로 한 것이다.

4급 마물이 사람의 몸에 기생해 숙주를 먹어 치워 가며 살아남아 1급 마물이 되는 신종 마물은 ‘10급’이라는 두 자릿수의 새로운 분류표를 받게 되었으며, 이는 마물사에 최초 등장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워크산 규칙을 어긴 대가로 큰 재앙을 만들어 낸 마이클레이 공작은 부상자들의 치료비와 황실 재건 비용의 절반을 부담하라는 처벌을 받았고, 아내의 장례도 치르지 못하게 되었다. 이 일로 건재하던 공작가 하나가 무너지게 되었지만 모두가 자업자득이라 여겼다.

사후 처치를 마치고 나서 남은 건 루이반 공작의 어깨 치료였다. 10급 마물이 파먹은 자리를 다시 메우고 치료하는 데엔 제법 많은 성력과 시간이 필요했다.

무엇보다 혹여나 10급 마물이 심어 놓은 기생물은 없는지, 몸에 이상은 없는지를 치유 능력이 있는 온 마법사와 신관들이 달라붙어 철저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었다.

“절대 레이 못 들어오게 해.”

자신의 몸에 어떠한 영향이 남았을지 모르니 확실한 결과가 나올 때까지 라미엘은 자신이 있는 방에 레이의 출입을 금지시켰다.

어느 정도 별 이상이 없다는 결과가 나오고 나서 다른 이들은 주인의 상태를 살피고 수발을 들기 위해, 혹은 루이반으로 전할 명령을 위해 라미엘을 찾았다. 윌포프나 테일러도 수십 번 황실에 마련된 라미엘의 병실에 드나들었지만 여전히 레이만큼은 예외였다.

“……저흰 괜찮은 거고요?”

용감하게도 감히 주인께 저런 걸 묻는 걸 보니 마물을 처리하던 돌아이 같던 성미가 아직 안 가신 모양이었다. 윌포프가 있었다면 당장 저택으로 끌고 가서 참교육을 시작했을 일이겠지만 이곳에 집사 대신 테일러만 있어 다행인 일이었다.

라미엘은 저 말을 듣고 평소의 그 표정, 정확히는 레이를 만나기 전에 항상 기본적으로 장착했던 서늘한 얼굴로 말도 없이 크레하를 바라보았다. 차라리 때리면 맞는 게 나을 법한 표정에 그는 ‘그래, 우리가 마님보다 좀 튼튼하긴 하지.’라며 입을 다물었다.

문밖이 소란하다. 레이가 이곳에 들어오려고 크레하를 붙잡고 명령을 하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안 비켜? 진짜. 가만 안 둔다.”

“마님, 정말 안 됩니다. 앗, 따가워. 저도 환잔데 그만 치세요.”

레이가 야무지게 크레하의 팔을 찰싹대는 소리가 들리더니 환자라는 그의 말에 결국 한발 물러나는 기척이 느껴졌다. 저보다 훨씬 큰 남자가 환자여 봤자 자기보다 강한 게 분명한데도 상대가 아프다고 하면 슥 물러나 주는 게 레이다웠다.

부상이 심각한 것도 있지만 라미엘의 치료가 더뎌진 이유는 레이가 아무 이상이 없다는 말을 듣기 전까지 그가 치료에 대강 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이반 공작 부인은 무사하시단 말을 듣고 나서야 그는 마음 편하게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라엘, 당신도 내가 지켜 줄게요.”

치료 내내 지금까지도 레이가 품 안에서 속삭이던 말이 계속 생각났다. 지금 누구보다도 라미엘 자신이 가장 레이의 실물을 직접 보고 싶고 안고 싶었다.

“어지간하면 들여보내지 뭘 그리 유난이냐.”

베롬에서 10급 마물 연구를 시작한 헤덴은 가끔씩 라미엘의 병상에 들러 그의 상태를 봐 주곤 했다.

“……아직 안 됩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이제 더 이상 검사할 것도 없어. 10급이 기생충 같은 걸 심어 놓지는 않는 듯하니.”

“결과가 나왔습니까.”

“대강은. 그 녀석이 따로 기생을 할 수 있는지부터 봤는데 그런 건 없어. 뭘 전파할 수 있는 것도 없고 1급이 된 순간 그건 그냥 우리가 아는 1급이야.”

“다행이군요.”

헤덴이 잠시 라미엘의 얼굴을 보더니 물었다.

“왜 그랬냐.”

아가 너 같은 놈이 왜 나서서 사람들을 지켰냐는 질문이었다.

라미엘은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지만 헤덴이 그냥 물러날 것 같지는 않았다.

“……레이가.”

“엥?”

“레이가 조금이라도 다칠까 봐, 그래서 빨리 치우려고 그랬습니다.”

자신의 대답에 헤덴이 대놓고 인상을 구기고 혀를 차며 뭐라고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이름대로 갔구먼.”

“예?”

레이는 아가를 조련할 수 있는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였다. 라미엘이 인간답게, 사람같이 살 수 있게 만드는 건 다른 어느 것도 아닌 아가 조련사의 마음이었다.

아가는 다른 이들의 불행이나 고생 같은 걸 보듬을 이가 아니었으나 그의 곁에 있는 반려가 그런 사람이고, 아가는 자신의 반려가 슬퍼하는 꼴은 못 볼 테니 그 사람의 뜻대로 살게 될 것이다.

아가 조련사는 아가에게 과분하지만 이만한 천생연분이 또 있을까.

“쉬어라. 어깨도 다 채워 놨으니 앞으로 치료만 받으면 될 게다.”

헤덴이 게이트를 열고 훌쩍 사라졌다. 황실에 하나 남은 환자의 마지막 검진이 끝났으니 당분간 여기 올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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