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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158화 (158/160)

158화. 느리지만 조금씩

리담에서 가장 넓은 평야, 대평야가 있는 도시 윌덤. 윌덤의 고성에서 노 아르망이 열렸다. 1년 후에 보자고 그렇게 벼르던 그 행사. 정식 집정관으로 레이가 참석하는 그때가 왔다.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하기에 라미엘은 레이와 같이 출발하려고 일정을 조절하며 애를 썼지만 황제의 부름에 눈물을 머금고 터덜터덜 황실로 가야만 했다.

도베는 지난 달, 파견 업무를 끝내고 본래 자리로 돌아갔다. 한동안 있지도 않은 도베를 부르는 등 그가 없는 자리가 어색하고 너무 허전해서 적응하는 데에는 꽤나 시간이 걸렸다.

도베는 가끔 소포니악에 손님으로 와서 놀다 가곤 했는데 그도 집으로 가지 않고 관사로 들어오곤 해서 웃음을 자아냈다. 그 역시도 습관이 몸에 남아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소포니악 집정관님.”

작년 노 아르망 때, 레이를 몰라본 문지기의 실수가 널리 퍼졌는지 관련자들이 크게 한 번 물갈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인지 이번 문지기는 바싹 긴장한 모습이었다.

레이는 문지기의 인사를 받으며 수월하게 회의장으로 들어섰다.

올해 회의장도 작년과 같은 구성이었다. 가운데 둥근 자리에 여덟 파칸이 앉고, 그를 둘러싼 계단식 자리에 각 도시 집정관들이 앉았다. 아무래도 회의장 구성은 매해 같은 모양인 듯했다.

거리가 먼 윌덤과 헬라여서 지각을 피해 서둘러 일찍 출발한 탓인지 회장엔 레이 혼자였다.

헬라 집정관들 중엔 아예 전날 도착해 숙소에서 하루를 보내는 이도 있다고 했지만 아직 회의가 시작되려면 조금 멀었으니 다들 회의장으로 출발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레이, 몸은 어때요?]

자신을 걱정하는 라미엘의 목소리에 레이가 미소를 지었다.

푸둥의 후견인이자 보호자로 레이가 널리 알려졌기에 더 이상 푸둥의 존재가 비밀일 일은 없었다. 워낙 귀한 존재다 보니 여러 사람이 레이의 곁으로 몰려들었고 각인도 없이 인간의 말을 잘 듣는, 그야말로 희귀한 푸둥을 노리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미처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면 푸둥은 ‘인간’의 말을 듣는 게 아니라 자신의 ‘가족’인 레이와 라미엘의 부탁을 들어준다는 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의 부탁을 항상 수락하는 건 아니었다. 푸둥의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부탁은 무의미했다. 레이가 어르고 달래도 콧방귀를 뀌곤 했다.

푸둥의 거절은 물론 굉장히 드문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각인처럼 절대적인 명령이 아니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한 번은 푸둥을 훔쳐 각인하려던 일당들이 있었는데, 레이가 극구 말리는데도 푸둥은 그들을 불에 태워 없애 버렸다. 그 일을 알고 나서야 사람들은 푸둥과 루이반 부부가 조금 특별한 가족 관계를 맺고 있다는 걸 인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레이는 최대한 푸둥의 노출을 자제하고 힘을 빌리는 일도 하지 않으려 했다. 각인도 없이 말을 잘 듣는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굳이 밖에 계속 내보일 필요는 없었다.

이번 노 아르망 개최지가 너무 멀어서 푸둥이 데려다주겠다는 듯 굴었지만 레이는 그 호의를 거절했다. 어차피 열차 1등석 초호화 객실에서 머무르기 때문에 불편할 일도 없었다.

라미엘은 그저 먼 곳에 레이 혼자 간다는 그 자체가 걱정이었다. 케이와 엘이 같이 가는데도 여전히 그녀 걱정에 안절부절못했다.

“아주 쌩쌩해요. 열차는 편안했고 오는 동안 아무 일도 없었어요.”

[목소리 들으니 안심이 되네요.]

윌덤으로 오는 동안에도 수없이 이야기를 나눴으면서 라미엘은 마치 며칠이나 소식이 끊어졌던 것처럼 걱정을 하고 있었다.

“라엘, 황실 갈 시간 아니에요?”

[지금 마차 안이에요.]

“잘 다녀와요. 노 아르망 회의 마치면 연락할게요.”

라미엘과 이야기를 끝내고도 회장은 조용했다.

‘이제 슬슬 사람들이 올 시간인데…….’

레이가 입구를 슬쩍 바라보았다. 그때 누군가가 조심스레 회장 안으로 들어왔다.

“와아. 여기구나.”

회장 안을 신기한 듯 둘러보던 사람은 레이와 눈이 마주치더니 소스라치게 놀랐다.

“제가 1등인 줄 알았는데 누군가 계셨네요.”

두근두근.

놀란 사람보다 레이의 심장이 더 뛰었다. 레이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이곳이 신기한 듯 조금 어색해하는 기색이 가득한 여자가 레이에게 인사를 했다.

“헬라 소포니악 집정관 알렉스 님 맞으시죠? 정말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전 이번에 스투라 집정관에 추천된 메이시라고 해요.”

잔뜩 상기된 메이시의 반가움 가득한 눈빛과 벅차오르는 감정이 가득한 레이의 눈빛이 부드럽게 마주쳤다.

세상은 느리지만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

외출 허가를 받은 레이가 마차를 타고 고성을 벗어났다. 마차를 모는 건 엘이었고 케이는 마차 안에서 마님을 전담했다.

이번 노 아르망에서 만난 스투라 집정관에 대해 라미엘에게 전해야 했다. 목소리로만 말하는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얼굴을 보며 알리고 싶었다.

우리가 달려온 길이 조금씩 열리고 있다는 이 희소식을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과 나누려고 급히 게이트를 사용할 수 있는 구역까지 나왔다.

각인이 되지 않은 푸둥을 레이의 목소리만으로 불러낼 수 없으니 번거로워도 라미엘을 만나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다.

“성을 벗어났으니까 이제 될 것 같아! 나 다녀올게!”

“예, 마님. 오시는 시간에 맞춰 이곳에서 대기하겠습니다.”

레이가 목걸이를 톡톡 건드렸다.

“라엘, 오느, 푸핫!”

“레이!”

풍덩!

라미엘을 향해 게이트를 열었는데 눈앞의 라미엘이 조금 뿌옇게 보인다 싶었더니만 레이의 몸이 물속으로 빠졌다.

“어푸! 어푸어푸!”

“레이, 괜찮아요? 정신 차려요.”

“켁, 콜록. 콜록.”

라미엘이 급히 레이를 물속에서 건져 내고 제 품으로 끌어안아 등을 토닥였다.

“콜록, 콜록. 깜짝이야. 죽는 줄 알았네.”

라미엘의 가슴에 기대 기침을 콜록이며 물을 뱉어 내던 레이는 한참 만에야 진정을 하고 그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었다.

“공작님, 괜찮으십니까?”

문밖에서 소란한 소리를 들은 윌포프가 물었다.

“아무 일 없으니 주변 모두 물려.”

“예, 알겠습니다.”

마님이 오신 듯한 눈치여서 윌포프는 재빨리 주변 사람들을 정리하고 자신도 다른 일을 하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라엘, 목욕 중이었어요?”

라미엘이 있는 곳은 욕실이었다. 커다란 욕조로 게이트가 열렸고 레이가 발을 디디자마자 라미엘이 손을 쓸 틈도 없이 그대로 욕조 속으로 꼬르륵 빠진 것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홀딱 젖은 레이가 물에 젖어 얼굴에 달라붙는 머리카락을 연신 손으로 치워 냈다. 라미엘은 그녀의 손을 잡아 제가 대신 머리카락을 떼어 내고는 손으로 슥 넘겨 주었다.

“네. 황실에서 이제 막 온지라.”

“엄청 늦게까지 있었네요.”

“올해 대연회를 연다고 하시더군요.”

“대연회? 어, 그럼 얼마 안 남았네요?”

대연회는 가을 행사였다. 늦여름인 지금 발표를 한 걸 보니 아마 늦어도 두 달 내로 열린다는 소리다.

아마 이번 대연회에 황녀님도 첫선을 보일 테니 마물 사건 이후 간만에 찾아온 초대형 행사였다. 황실 공사도 거의 다 마무리되어 간다고 하니 앞으로 공식 행사가 다시 열리려고 하는 듯했다.

“아, 이게 아니야. 그것만큼, 아니 그것보다 더 중요한 소식이 있어요!”

레이가 게이트까지 써서 달려온 걸 보고 노 아르망에 무언가 변화가 생긴 모양이구나, 대강 짐작은 했다.

“여성 집정관이 나 말고 또 있어요! 올해 스투라에서 추천됐대요. 심지어 나보다 세 살밖에 안 많아요.”

희소식에 라미엘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지다가 이내 서서히 웃음으로 바뀌었다.

“이제 앞으로 더 많은 분들이 나올 겁니다.”

“그럼요. 당연히 더 많이 나올 거예요.”

지난 시간 열심히 심어 둔 씨앗들이 조금씩 여기저기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앞으로 더 열심히 가꾸고 키우면 언젠가는 엄청난 꽃밭이, 거대한 숲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이혼까지 가정하며 달렸던 일이 이젠 아득하게 느껴지려고 했다.

“그런데 라엘.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라미엘이 레이를 꼭 껴안은 채, 드레스를 슬근슬근 벗겨 내고 있었다. 물에 젖어 있어서 잘 몰랐는데 이미 등 부분이 다 드러나 있다.

“젖은 옷 갈아입어야 하잖아요.”

“물론 갈아입을 건데. 왜 라엘이 내 등이랑 어깨를 느릿하게 쓸어내리는지는 모르겠네요?”

“레이, 당신 손이 아까부터 어디 있는지 모릅니까.”

“내 손이 뭘……. 헙.”

내 손바닥이 디디고 있던 따뜻한 거 라미엘 허벅지…… 만 있는 건 아니었네. 가지, 아우, 가지가 화내려고 하는 것 같은데.

레이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물 밖으로 확 빼냈지만 그 손은 그대로 라미엘에게 잡혀 그의 목에 둘러졌다.

“어, 저기, 라엘, 내가, 그게, 절대 고의가 아니었고 방금 전에 욕조에서 꼴사납게 익사할 뻔한 거 알잖아요. 그때 놀라서 막 아무 데나, 응, 그렇지, 아무 데나 짚다 보니까 어디인 줄 모르……. 하읏. 잠깐, 라엘, 입술 떼요. 나 노 아르망 중이에요. 내일 회의 있는 거 알죠?”

“……안 됩니까. 레이, 싫어요?”

내가 이런 거 물어볼 때 미인계 쓰지 말라고 말 안 했던가? 어? 라미엘 당신 말이야, 얼굴 나한테 보여 주면서 유혹하는 말, 하는 거 아니라고 그랬던 것 같은데. 어느 미친 사람이 이 얼굴을 보고 ‘아니요’를 외쳐? 감히 안 된다고 할 수 있겠냐고!

레이가 멍하니 라미엘을 바라보는데 촤르륵 물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며 시야가 높아졌다.

나 언제 라미엘한테 안겨서 침대로 가고 있는 거지? 잠깐 내 옷은 어디 갔어?

“레이.”

“네.”

“당신 눈빛이 시끄럽다고 하면 좀 이상한가.”

“맞을걸요. 나 지금 엄청 말 많이 했어.”

“그중에 싫다는 말이 한마디라도 있었나요?”

하, 당연히 싫다는 소리를 들을 리 없다는 저 자신 있는 눈빛 좀 보라지. 내가 어디 라엘 당신 마음대로 해 줄 것 같아?

“……없어요.”

***

“모두에게 돌려줄 때가 된 것 같아. 날 선택해 준 것 정말 진심으로 고맙고, 이렇게 물러나서 정말 미안해.”

레이가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집정관이 도시민들을 향해 이렇게 고개를 숙인 모습은 처음이라 다들 화들짝 놀라며 레이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뜬금없이 집정관 추천 공고가 붙는다 했더니 레이알렉시스 집정관이 사퇴를 했다. 그동안 이 사랑하는 도시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때가 되면 도시를 돌려주려 했다는 말에 다들 고맙기도 하고, 조금은 화가 나기도 하고,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당사자가 가장 미안한 얼굴이라 오히려 이쪽이 더 미안해졌다.

생각해 보면 수도에서나 살던 귀부인이 이 도시가 좋다고 안 해도 될 일을 해 준 것이었다.

그녀가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을 했던 건 소포니악 사람들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 어떤 집정관보다 도시에 정성을 쏟고 아낌없이 애정을 표현했다.

모두가 외면하며 도시 구석으로 쫓아냈던 빈민가 사람들도 챙기고, 이번 노 아르망에서는 라 헬라와 소포니악 두 곳에만 있는 양성소를 다른 도시에도 전부 의무적으로 하나 이상 설치하자는 안건까지 제안했다고 했다.

소포니악 양성소를 졸업한 사람들이 필경사가 되어서 여기저기를 누비고 있었고 도시엔 글 배우기 열풍이 불어 거의 대부분이 양성소 수업에 등록했다. 사람들을 감당할 수 없어 소포니악엔 하나의 양성소를 더 지었고 그것 역시도 순조롭게 운영되고 있었다.

빨래방 인원들이 대거 필경사로 직업을 바꾸자 부족해진 인원을 충당하기 위해 임금이 높아졌지만, 그래도 사람들의 반응이 시큰둥하자 중간에 쉬는 시간도 생겼다.

소포니악도 조금씩 발전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러한 모든 변화의 시작은 집정관 레이알렉시스로부터였다. 사람들의 인식을, 도시의 인식을 변화시킨 건 그녀가 보인 애정과 열정이었다. 그런 이에게 감히 그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집정관님 덕분에 우리 도시가 이만큼 좋아진걸요. 미안해하지 마세요.”

“우릴 위해 얼마나 애를 써 주셨는데 미안하다 하십니까. 고마운 건 저희지요.”

“그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모두의 따뜻한 환대를 받자 레이는 그간 자신이 선택한 일이 틀리지 않았음을 다시 한번 확인받는 기분이었다.

“이제 여긴 영영 안 오시나요?”

레이가 웃었다.

“다들 나 양성소 소장인 거 잊었어?”

모두가 웃었다. 안심했다는 듯, 다행이라는 듯 마치 아무 근심 없다는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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