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159화 (159/160)

159화. 공작 부부의 사정

오랜만에 열리는 황실 주최 대형 행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대연회에 맞춰 새로 공사를 끝낸 건물들이 손님들의 눈길을 끌었다. 이전에 부서졌던 건물이라고는 생각도 들지 않을 정도로 더 화려하고 멋지게 지어진 황실이었다.

작년 한 해 연회 없이 복구에만 최선을 다하던 황실은 새로 올라선 황제의 위엄을 더 보이려는 듯 예전보다 훨씬 더 크고 화려한 규모의 대연회를 열었다.

연회 개회식에서 황제는 수도에 임시 시행하던 주 1회 휴일을 공식으로 지정했고 동시에 아이의 날까지 공식일로 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제로석도 이젠 여느 마력석처럼 구매할 수 있도록 시범 운영도 끝을 내고 모든 대중에게 판로를 열었다.

새 황제가 여는 첫 대규모 행사는 귀족들과 파칸, 사회 각층에서 공로를 세운 여러 인물들뿐만 아니라 테가푸스가 발굴했던 역사에서 잊힌 여성 위인들과 그의 자손, 현실에서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여성들을 대거 초대했다.

그런 사람들 앞에 처음으로 공개된 황녀님은 아주 사랑스러웠고 수많은 대중 앞에 처음 서는데도 울음 한 번 터트리지 않고 씩씩했다. 산처럼 쌓인 선물 틈에서도 놀라지 않고 씩씩하게 제 앞으로 굴러떨어지는 작은 선물을 꼭 쥐며 방싯 웃음을 지었다.

앞으로 이 나라를 이끌, 아직은 작고 귀여운 미래 황제에게 사람들의 찬사가 이어졌고, 특히나 테가푸스 회원들에게 더 큰 축복을 받았다.

황녀 공개에 이은 이번 대연회의 핵심 행사, 하이라이트가 되는 일은 바로 작위 수여식이었다. 황실이 재건되고 완벽히 정상 궤도에 오르기 전까지 미뤘던 귀족들의 작위 수여식을 대연회에서 함께 진행하기로 했다.

공석을 채우는 작위는 이미 다 주었지만 수여식 자체도 귀족에겐 의미 있는 행사였기에 후에 식만 따로 진행한다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의 대연회였다.

제법 많은 귀족들이 작위를 받았다. 비슷한 식순이 반복적으로 진행되어 구경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지겹다고 생각할 즈음.

“마그스너 백작위를 받을 자, 앞으로.”

마그스너 백작이라니. 마그스너 가문은 건재한 데다가 후작 가문이다.

사람들이 황제 파르베제가 계속 같은 일을 하다가 말이 꼬였나 보다고 생각하는데 케이틀린 마그스너가 수여식 단상으로 올라서고 있었다.

파르베제가 실수한 게 절대 아니었는지 케이틀린이 백작을 나타내는 훈장을 받고 있었다.

모두가 얼이 빠진 반응을 하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레이가 박수를 쳤다. 그러자 근처에 있던 테가푸스 회원들도 바로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주변 사람들도 분위기에 휩쓸려 하나둘 박수를 쳤고 마치 그 소리가 전염이라도 된 것처럼 퍼져 나가 온 연회장을 가득 채웠다. 최초의 여성 귀족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케이틀린이 백작위를 받게 된 이유는 마그스너 후작이 아직 건재하고 남아 있는 자리는 백작위뿐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백작 자리를 먼저 받고, 후작의 사후에 후작위를 잇게 해 주겠다는 황제의 제안이 있었다.

작위를 받기 위해 올봄에 후다닥 결혼한 케이틀린에겐 조금 실망스러운 소식이었지만, 아라벨라 맥카인을 예비 후작위로 올려서 그리되었다는 말에 아쉬움을 털어낼 수 있었다.

작위 공석을 전부 여성으로만 채울 순 없었고 마그스너 백작을 제외하면 여성들은 전부 예비 자리에 있었다.

아직까지 현실은 여성의 작위에 대해 탐탁잖은 시선을 가진 자가 많았다. 마냥 달콤하지만은 않은 현실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첫발을 내디뎠다는 점이 중요했다.

앞으로 예비가 정식이 되는 날, 다시 한번 시선은 바뀔 것이고 계속 여성들이 여러 분야에서 능력을 보인다면 시선은 분명 더욱더 달라질 것이다.

케이틀린은 자신을 향해 박수를 쳐 주는 사람들을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그 어느 때보다도 밝은 웃음이었다.

“내가 저 기분, 잘 알죠.”

예전 헬라에서 열린 노 아르망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직도 생생하고 눈을 감아도 그날의 기억은 눈에 보일 듯 선명하게 재생되었다.

“레이가 작위 선배, 같은 건가요.”

라미엘의 말에 레이가 깔깔 웃었다.

새로운 황제는 이번 연회를 모든 사람들에게 여성 작위에 대한 인식을 완벽하게 굳히는 자리로 만들고자 마음을 먹은 듯했다.

황녀께서 수월히 황위를 받게 하기 위해 기반을 다지는 일 중 하나겠지만 이 일이 앞으로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득이 될 터이니 얼마든지 너그러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귀족들의 작위 수여식이 끝나고 이번엔 사회 공로자들의 소개가 이어졌다. 이 소개는 본디 대연회엔 없던 일이었다.

“리담 최초의 여성 집정관이자 휴일 제도의 창시자, 레이알렉시스 루이반과 라미엘 루이반 공작 부부입니다!”

오늘은 뭘 해도 기쁜 날이었다.

연회는 즐거웠다. 여기저기 웃음소리만 가득했고 흥겨운 음악이 가득했다. 제로석을 가공해 만든 커다란 샹들리에에서는 끊임없이 빛 가루가 쏟아져 내렸다.

“으음.”

레이가 술잔을 툭 내려놨다.

“레이, 왜 그래요?”

레이가 빈 술잔을 수거하는 하인에게 제 술잔을 넘겼다.

“이거 내가 좋아하던 건데, 맛이 이상해요. 상했나 봐.”

황실이 주최하는 연회에서 그런 음식을 내놨을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상했다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가장 좋아하는 술인데 레이는 한 모금 마시자마자 비위가 상했다. 맛이 이상해서 목으로 넘기지도 못하고 도로 술잔에 술을 뱉어 내고 인상을 찌푸렸다.

레이의 말을 들은 라미엘이 다른 술잔을 집어 들고 맛을 봤다.

“이건 괜찮네요. 물로 입 헹구고 이거로 마셔요.”

라미엘이 내민 물잔을 받아 입을 헹구고 다시 술을 마시려는데 케이틀린이 다가왔다. 남편도 없이 혼자 찾아오는 걸 보니 아무래도 레이디끼리 할 말이 있다는 신호 같았다.

“자리 비켜 줄게요.”

라미엘이 레이의 이마에 키스를 하곤 멀찍이 사라졌다.

“어머나, 공작 각하. 정말…….”

아직도 사이좋기로 유명한 부부답게 이제 이 정도는 밖에서 내보여도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모습이다. 자신과는 참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밖에서 남편 눈빛 저럴 때마다 미치겠어. 아무것도 못 하니까.”

레이의 말에 케이틀린의 얼굴이 빨개졌다. 결혼한 지 1년도 안 된 사람 앞에서 할 만한 말이 아니었던가. 레이가 머리를 긁적이며 씩 웃었다.

“케이틀린 백작님, 다시 한번 축하해요.”

“아까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제대로 인사 못 드려서 찾아뵌 거예요. 알렉스 님, 정말 감사드려요. 제가 이렇게 된 건 전부 알렉스 덕분이에요.”

사냥제에 나갔던 것을 두고두고 행운이라 여겼다. 같은 사냥감을 쫓았던 게 얼마나 다행인 일이었는지 모른다.

좋은 사람을 알게 되어서 자신의 시야가 넓어지고 세상이 바뀌었다. 무향무미의 남자를 찾던 자신이 백작이 될 거라곤 그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때도, 지금도 공작 부인과 함께 같은 목표로 달리게 되어 정말 너무 기뻐요.”

레이가 케이틀린을 꼭 껴안아 토닥였다.

“우리 둘 다 정말 수고했어.”

이게 끝이 아니고 이제 시작이지만 그래도 지난날의 노력에 대한 찬사는 충분히 할 만했다.

“어머, 로테인이 라미엘이랑 같이 있는데?”

저 멀리 케이틀린의 남편인 로테인과 라미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단둘은 아니고 남자들이 여럿 모여 있었는데 유독 로테인의 얼굴이 해맑고 밝아 튀어 보였다.

“루이반 공작 각하를 가장 존경한대요.”

로테인은 로썸 백작 가문의 삼남으로 작위를 일찌감치 포기하고 기사가 된 자였다. 외모만 보면 검과 도통 거리가 멀어 보이는 외형으로 늘씬한 체격과 케이틀린 취향의 귀염상의 얼굴이었다.

작위 승계 가능성이 없는 셋째다 보니 그는 일찍이 재능을 보이는 검사로 전향했고, 작위가 없어 마그스너 가문에 청혼서도 넣지 않았던 이라 케이틀린이 미처 인지조차 못 하던 인물이었다. 케이틀린이 작위를 받기 위해 아예 결혼 노선을 바꾸면서 찾아낸 동갑내기 신랑감이었다.

“결혼 생활은 어때?”

레이의 질문에 케이틀린이 입을 다물었다. 사이가 썩 나빠 보이지도 않고 케이틀린 취향의 얼굴이니 잘 지낼 줄 알았는데 아예 대답도 않고 입을 다물어 버리니 레이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사이 안 좋나, 괜히 물어봤나 싶어 사과라도 하려는 찰나 케이틀린이 가까이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저, 이거 비밀인데요. 알렉스만 알고 계셔요.”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나 은밀하게?

“이제 곧 헤어질 거예요.”

“어? 뭐?”

“작위 받고 나서 자리가 안정되면 헤어지기로 합의했어요.”

뭐야, 이거 데자뷔야? 아님 라미엘이 귀띔했나. 아님 전에 내가 술기운에 불어 버리기라도 했었던가.

“놀라셨죠. 절대 어디서 말씀하시면 안 돼요. 나중에 알렉스 놀라지 말라고 미리 알려 드리는 거예요.”

아니, 그게 아니라 그거 때문에 놀란 게 아니라…….

“작위 받으려고 짜고 결혼한 거 아니냐는 얘기가 생각나서 써먹었어요.”

“그거 나 결혼할 때 듣던…….”

“헤헤, 죄송해요. 그런데 그 소문이 딱 생각나니까 괜찮은 것 같아서.”

레이는 물끄러미 저 멀리 자신의 최애, 영웅을 만나 신나서 어쩔 줄 모르는 팬 같은 얼굴의 로테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라미엘과 이야기하는 중간중간 이쪽을 힐끔거리곤 했다.

“그래, 비밀 잘 지켜 줄게. 아니, 아예 지금 들은 얘긴 기억에서 지울게.”

느낌상 너희도 우리랑 같은 길을 갈 것 같으니까.

“저희 이제 얼른 가서 축배 들어요.”

케이틀린이 레이에게 술을 한 잔 챙겨 주고 자기도 하나 집어 들었다. 두 사람은 웃으며 사람들을 향해, 연회장 한가운데로 걸어 나갔다.

“……정말 이상한데.”

컨디션이 안 좋은가. 왜 하필 이 좋은 날 술도 못 먹고!

“라엘, 왜 난 오늘 집는 족족 상한 술이 걸리지? 이건 냄새도 이상한데.”

“냄새까지 이상하다고요?”

끄덕끄덕. 술이 쓰고 맛이 영 이상하다.

라미엘이 레이가 내려놓으려는 술을 가져가 제가 마셔 보았다. 상큼하고 풍부한 과일향이 묵직하게 목을 타고 넘어갔다. 레이가 좋아하던 그 술이 맞다.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그때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아라벨라가 물었다.

“술맛이 이상해서…….”

루이반 부부의 대화를 유심히 듣던 아라벨라였다. 그녀는 레이의 말을 듣고 빙긋 웃더니 물었다.

“루이반 공작 각하, 드셔 보니 술이 어떠십니까.”

“괜찮은 것 같군요.”

“공작 부인, 혹 최근에 몸이 불편하거나 입맛이 바뀐 적은 없으셨습니까.”

“딱히 그런 건 없는데요. 아, 혹시 너무 오랜만에 마셔서 그런가? 거의 몇 달 만에 먹는 거거든요.”

“그렇다면 술 말고 다른 음식은 괜찮으셨어요?”

“그냥 맛있던 게 맛없게 느껴지는 건 종종…….”

말을 하다가 레이가 멈췄다.

‘나 지난달에 생리했던가?’

레이가 잠시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라미엘이 레이를 안아 들었다.

“앗, 라엘!”

“잠시 실례하지.”

루이반 공작이 주변 시선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공작 부인을 안아 들고 의료실로 향하고 있었다. 뒤에서 아라벨라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머지않아 대연회 중반에 집으로 급히 돌아간 공작 부부의 사정이 모두에게 널리 퍼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