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에필로그
“진짜 오랜만이다.”
계약이 완료되는 날 꺼내 보기로 했던 계약서였다.
이미 효력은 사라진 지 오래고 쌍방 위반으로 서로에게 위자료나 물어줘야 할 그런 계약서지만 레이는 꺼낸 김에 천천히 읽어 보았다.
처음 루이반에 오면서 겪었던 일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라엘, 생각나요? 내가 별첨 조항 넣어 달라고 당신 찾아갔던 거.”
레이의 말에 라미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때 아마 자신은 상대방의 주사를 받아 주면 조항 하나씩 원하는 거로 수정, 이런 걸 별첨으로 내걸려고 했었다.
10급 마물과 관련한 분석이 끝나고 라미엘의 어깨도 완전히 완치 판정을 받은 날, 두 사람은 계약을 완료하기 위해 계약서를 꺼내 들고 마주 앉았다.
“라미엘 님, 별첨 안 해 주데.”
레이의 불만 어린 소리에 라미엘이 쿡쿡 소리까지 내어 웃었다.
“분명 그때도 날 사랑했던 것 같은데 왜 그랬을까.”
“그러게. 내가 왜 그랬을까요.”
지금은 달라는 걸 다 주다 못해 제가 가진 전부를 다 못 줘서 아까울 지경이 되었다.
“당신은 날 처음 본 순간부터 나한테 빠졌잖아요. 이제 인정해요.”
“음, 맞아요. 레이를 처음 보자마자 바로 반했던 것 같아.”
농담처럼 던진 말에 진지하게 그렇다고 대꾸하는 라미엘 덕분에 레이는 당황했다. 이런 분위기를 생각한 건 아니었는데.
“만나면 만날수록 당신한테 빠졌어요.”
타인과의 접촉을 극도로 싫어하던 그였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이전엔 외출 필수품이 장갑이었다.
지금도 아내 외의 인간들을 그리 좋아하진 않지만, 아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받아들이고 있는 중이었다. 놀라울 만한 발전이었다.
그랬던 시기에 아무리 계약이라고 하지만 밖에서 남들 눈에 친하게 보이는, 친밀한 접촉까지 허용한 상대가 레이였으니 아마 자신이 첫눈에 반한 게 맞는 것 같았다.
계약자로 마음에 들었던 레이는 날이 갈수록, 일상을 함께해 가면서 나날이 그의 마음속에 쌓여 왔다. 이제는 가득 차고 또 차서 더 이상 채울 곳이 없는데도 레이는 계속 그에게 쌓이는 존재였다.
라미엘의 진지한 고백에 레이의 볼이 달아올랐다. 고백받겠다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진심을 말하는 그의 진지한 얼굴에 마음이 들뜨고 설렜다.
“지금 또 빠졌겠네요?”
레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라미엘에게 다가가 그의 품에 안겼다. 레이가 움직이면 그가 의자를 뒤로 물려 자연스레 그녀를 안을 준비를 한다. 매뉴얼처럼 착착이었다.
“네. 매번. 레이는 나한테 항상 쌓여요.”
레이가 가볍게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항상 그런 것처럼 라미엘에게서는 사람을 홀리는 달콤한 향이 났다.
“라엘, 날 찾아 줘서 고마워요.”
책상 위에 놓은 계약서를 두 사람이 다시 보았다.
「계약 당사자 두 사람 모두 유책임자로서 이혼을 한다.」
이혼. 가짜 이혼조차도 싫어서 황실에 서류도 안 냈는데.
“이딴 건 이제 없애 버리죠. 보기도 싫습니다.”
라미엘이 이혼이란 단어를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말했다. 정말 싫은지 미간에 주름까지 잡혔다. 이런 모습도 귀여워서 레이가 라미엘의 미간에 쪽쪽 뽀뽀를 하고는 그보다 먼저 나서서 계약서를 찢었다.
“내 건 다 찢었어요.”
라미엘이 자신의 계약서와 레이가 찢은 계약서를 한데 모았다. 그러고는 레이를 안은 채 일어나 계약서를 집어 들고는 그대로 벽난로에 집어 던졌다.
집무실 벽난로는 연기 없이 마력석으로 방 전체를 데우는 방식으로, 황실의 마법 조명 도구처럼 특정 물질이 닿으면 불에 탔다. 업무를 보다가 불필요한 자료나 없애야 하는 것들을 처리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르르 불길이 일어나며 계약서를 태웠다.
“위약금은 어떻게 할까요? 서로의 자산에 넣는 게 낫나, 아님 그냥 상쇄해 버릴까.”
“내 돈 다 줄 테니 다 가져가요. 난 당신이 준 월급이면 충분하니까.”
“그러면 위약금이 너무 차이 나는 거 아녜요? 내가 첫 월급 준 거 말하는 거잖아.”
레이의 말에 라미엘이 웃었다. 월급만 이야기하면 웃음이 나왔다.
레이는 모르고 있는 사실이지만 라미엘은 가끔 레이 모르게 소포니악을 찾아가곤 했었다.
케이틀린과 헬라에서 만날 때 정체를 감추기 위해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기에 그 모습 그대로 슬쩍 소포니악에만 한 번씩 가면 될 일이었다. 키가 크고 몸이 좋으니 어쩔 수 없이 눈에 띄긴 하겠지만 그래도 얼굴을 가리고 정체를 숨겼으니 자신이 누군지는 몰라볼 것이었다.
레이가 그리 소중히 여기는 도시는 어떤지, 레이에게 해가 될 만한 것들은 없는지 직접 봐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보고 나서도 안심이 안 돼서 결국 크레하를 보냈다. 크레하 역시도 덩치가 있어 평범해 보이진 않겠지만 그래도 눈에 띄는 짓은 하지 말고 조용히 도시만 보고 오라고 했으니 괜찮을 것이라 여겼다.
집정관 추천에 관해서 사람들이 하는 말에 속이 터진 크레하가 한마디 했다가 얼굴이 노출되고 델이란 가명을 둘러댔다는 어처구니없는 변명을 하긴 했지만.
소포니악 사람들은 키 크고 덩치 좋은, 그러면서 로브를 푹 뒤집어쓴 남자가 한 명인 줄만 알았다. 그래서 나중에 라미엘이 몰래 찾아갔을 때, 사람들은 그를 델이라 불렀고.
“근데 델은 뭐 하는 사람이야?”
그런 질문에 라미엘은 로브를 더 푹 눌러써 얼굴을 가리고 최대한 긁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집정관님께 월급을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진실만을 이야기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알렉스 님 소속 일꾼이었어? 가만, 근데 목소리가 왜 그래? 어디 아파?”
라미엘은 더 이상 대답을 하지 않고 빠르게 소포니악을 벗어났다. 이러다간 레이한테 들키게 생겼다.
“라엘?”
레이가 잠시 무언가를 떠올리며 미소 짓는 라미엘을 불렀다.
“네.”
“정말 그걸로 되겠어요?”
“네. 그 월급이면 충분해요.”
레이가 웃었다.
“나도 당신 전 재산 없어도 괜찮으니 당신 건 소중하게 지켜요.”
“가장 소중한 거, 내 거 여기 있잖아요.”
라미엘이 품 안의 레이를 가리켰다.
계약할 때만 해도 라미엘 루이반이라는 남자가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던가.
‘내 남자는 귀엽고 또 귀엽고, 어쩜 이름도 라미엘이야, 귀엽다.’
레이가 라미엘에게 더 꼭 안겼다.
***
하늘이 노랗게 보이고 눈앞엔 별이 반짝였다. 콧구멍에서 수박이 나오면 이런 느낌일까.
이런 생각도 이젠 사치였다. 고통에 생각도 사라졌다.
응애응애!
우렁찬 울음소리가 귓가에 들리고 레이는 고통으로 가득한 몸이 푹 잠기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마님, 공자님께서 태어나셨습니다!”
레이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극심한 고통에 메말랐던 눈물이 출산을 하고 나서야 터졌다.
갓 태어난 공자님을 깨끗이 씻기고 마님을 돌보느라 다들 정신이 쏙 빠졌다. 분주하던 이들이 보에 잘 감싼 새 생명을 레이에게 데려왔다.
“어쩜 이리 예쁘실까요. 마님, 안아 보시겠어요?”
시름시름하던 레이는 작고 따뜻해 보이는 아기를 바라보았다. 자기를 닮아 까만 머리카락을 갖고 태어난 아이는 빨갛고 쪼글쪼글한 얼굴로 세상 서럽게 울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찬찬히 살펴보자 머리카락 말고도 자신의 얼굴이 담겨 있고, 라미엘의 모습이 보였다.
내 아이구나. 나와 라미엘의 아이.
“……아가.”
아이를 품에 안자 속에서 울컥, 하고 무언가가 확 솟구쳐 올랐다. 품에 닿으니 달랐다. 이 작은 것이 좁은 곳에서 그리 나를 찾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다른 의미의 눈물이 흘렀다.
그 시각, 출산실 밖을 서성이고 있던 라미엘은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자마자 외쳤다.
“레이는? 마님 상태는 어떻지? 아기는?”
안은 정신이 없는지 질문에 대답을 하는 이가 없었다. 그저 분주하게 계속 레이를 챙기고 아기를 위해 무언가를 하는 듯한 소리만 들렸다.
“마님께선 무사하십니다.”
잠시 후에 전달된 소식에 밖에 있던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활짝 웃었다.
“마님을 꼭 닮은 공자님께서 태어나셨습니다.”
추가 소식엔 다들 환호성까지 질렀다. 라미엘 역시도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레이를 닮았다니. 내내 아내를 닮기를 기원했는데 소원이 이루어진 듯했다.
“공작 각하, 들어오시지요.”
한참 만에야 공작 한 명만 출입이 허락되었다.
“레이.”
커다란 침대 위엔 땀으로 흠뻑 젖은 레이가 있고 그런 그녀의 품 안에 아주 작고 보기에도 연약한 존재가 안겨 있었다.
“……라엘.”
“말하지 마요. 당신 목 다 쉬었어.”
라미엘이 조금 떨리는 손으로 레이의 눈가에 매달려 있는 눈물을 닦았다.
“안아 봐요, 우리 아가.”
작아도 너무 작다. 레이 품 안의 생명은 당장에라도 꺼질 것처럼 너무도 작고 연약해 보였다.
라미엘이 주춤하자 레이가 옆의 의사에게 눈으로 신호를 주었다. 출산을 돕던 의사가 잠이 든 공자님을 살며시 레이의 품에서 들어 라미엘의 품에 안겨 주었다.
라미엘의 양손을 합친 것 같은 작은 아이는 자기도 사람이라고 자그마한 몸에 더 작은 손가락 발가락을 열 개씩 달고 있었다.
라미엘은 굳은 것처럼 움직이질 못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이 아이가 잘못될 것만 같았다.
레이처럼 까만 밤톨 같은 머리를 한 아이 얼굴을 그저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정말 레이를 닮았군요.”
주먹보다 작은 아기의 얼굴에 오밀조밀 레이가 담겨 있다. 마님 닮았다더니 정말 레이의 축소판이었다.
“아기가 당신도 닮았어요.”
레이의 말을 들었는지 자고 있던 아이가 눈을 떴다.
“아.”
“왜 그래요?”
“눈, 떴어요.”
눈을 떴다는 말에 레이가 미소를 지었다.
“하아.”
금빛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이와 똑같은 얼굴에 담긴 자신의 흔적이다.
라미엘은 레이에 이어 또 한 번 사랑에 빠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끝>
By.[Y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