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화
두 번째 괴담 - 웃는 여자 (5)
다시 돌아온 아침의 교실.
생각을 정리하며 가만히 앉아 있자, 곧 문이 열리더니 담임이 홋홋 홋 웃으며 종이뭉치가 든 상자를 들고 반으로 들어왔다.
“자~ 여러분. 앞사람씩 나와서 이 종이를 뽑아가세요.”
나는 생각에 잠긴 채 아무 종이나 뽑은 후 자리를 이동했는데, 놀랍게도 같은 자리였고 내 옆에는 덕훈이가 앉아 있었다.
그건 약간 이상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 웃는 여자와 어떻게 대면할지 궁리하느라 이번에는 정말로 아무 생각 없이 종이를 뽑았기 때문이다.
숫자를 다시 확인해 봐도 지난번과 지지난번에 뽑았던 종이와 같은 숫 자인 26.
‘···우연인 건가? 뭐지.’
기묘했지만 당장은 그 웃는 여자를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하는 게 먼저
였다.
잡다한 의구심을 뒤로하고 나는 자리에 앉았다.
곧이어 1교시 자리 배정이 끝나고 쉬는 시간.
원래라면 선아에게 인사하러 갔었겠지만, 지금은 그 여자를 마주해서 어떻게 대처할지 생각하느라 그러지 않았다.
고민하는 와중에 선아 쪽을 흘긋 보자, 여전히 태연하게 책을 읽는 하윤이가 보였다.
그리고 처음 만난 짝꿍과 말을 못 트자 불편한 듯 꼼지락거리는 선아의 모습이 보인다.
그대로 쉬는 시간이 끝나고 이어서 영어 수업 시간.
반 학생들이 차례로 일어나 영어로 자기 이름을 소개한다.
“아… 아이 엠 윤선아… 아… 아이 라잌… 아이스크림..”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내 생각은 온통 매뉴얼 괴담뿐이었다.
그런 귀신 같은 여자를 보고도 못 본 체 자연스레 행동, 어떻게 그걸 할 것인가…….
바로 다음 쉬는 시간에 그 여자는 학교 밖에서 매점 지붕을 타고 올라 와 안으로 들어올 거다.
그렇게 되기 전에 그 여자를 학교 밖에서 일대일로 대면할 계획.
누가 보기 전에 먼저 맞서는 것 자체는 종이 치자마자 잽싸게 달려 가 담벼락만 넘으면 되는 일, 시간만 잘 맞춘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문제는 연기.
키가 농구 선수만 한 새하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커터칼을 드르륵거리는 미친 아줌마를 보고 과연 나는 태연할 수 있을까.
본능적으로 흠칫거리거나 시선이 불안해진다거나, 행동이 쭈뼛거려 진다거나 어떤 식으로든 한계가 있을 것이다.
눈을 감지 않고 여자를 정면으로 보면서도 완벽하게 못 본 체할 수 있는 방법.
그걸 생각해 내야 한다.
‘그런 방법이 있을까……?’
기가 막혀 하며 머리를 쥐어 싸는 사이에도 시간은 점점 흐르고 있다.
이윽고 수업이 끝나기 10분 전.
영어 선생님이 뭐라 뭐라 앞으로 수업의 커리큘럼을 설명하며 마치려는 게 보인다.
‘마치지 마, X발……
이대로 영어 수업 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무서운 여자와 일대일로… 도대체 내가 왜…….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다.
아아, 애미…….
도대체 왜 내가 이런 상황에, 왜…….
다시 시계를 보니 마치기 5분 전.
그새 5분이 흘렀다고!
‘시계 미친년아!’
나는 애꿎은 시계를 욕하며 손발을 덜덜 떨 뿐이었다.
[띵동 댕동~ 딩동 댕동~]
결국.
무심하게도 쉬는 시간이 오고야 말았다.
나는 훅훅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실은 전혀 가고 싶지 않은데.
머릿속엔 어떻게 도망갈 방법이 없나 하는 궁리뿐이지만.
마음속으론 어쨌든 가 보는 수밖에 없다고 결정해 버린 것이다.
다시 도망쳐서 괴현상이 이 학교를 집어삼키고 일대가 폐쇄되고 가족들은 이사 가고…….
그러다 3년이 지나서 거대 괴수와 마주쳐 죽고, 다시 입학식으로 돌아 오고…….
더 이상 그렇게 두지 않을 것이다.
지금, 여기가 첫 단추다.
이 정신 나간 시스템과 괴담에 맞 서는 첫 단추.
훅훅... 후욱... 후욱......스
그렇게 불안하게 숨을 들이쉬며 교실 문을 나서려는 순간.
“저기, 준아……
뒤를 돌아보니 선아가 서 있었다.
“매점, 혹시 같이 안 갈래……?”
···두근.
선아의 그 말에 순간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다.
역시 그런 무서운 괴물과 혼자 마주 하고 싶지는 않다.
적어도 누군가, 누군가 나와 함께 가 준다면…….
약한 마음이 기어코 손을 떨게 만든다.
“저기, 귀찮으면 나 혼자 가도 되고……
내가 대답이 없자 선아는 허둥대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가… 같이 가자.”
앗, 하며 살짝 웃는 선아.
같이 가자. 같이 가자… 같이 가자, 같이 가줘 제발…….
저질러 버렸다.
나는 선아를 그 위험한 곳으로 데려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 봐 도, 역시 혼자서는 오줌을 지릴 게 분명해.’
오히려 마침 이 타이밍에 같이 가자고 말해 준 선아가 너무 고맙기까지 하다.
‘그래, 다시 생각해 보니 선아가 꼭 그 여자와 마주할 필요는 없어!’
내가 담벼락을 넘어 밖에서 여자와 마주하는 동안 선아는 담벼락 뒤에 서 망을 봐 주면 된다.
누군가 내 뒤를 지키고 서 있어 준다는 것.
혼자서 모든 걸 짊어지러 가는 게 아니라는 것.
그것만으로도 마음에 꽤 큰 힘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면 나쁜 건 아니겠지? 조금… 도와주는 것뿐이니깐. 딱히 선아를 속여서 이용한다는 생각은 안
해도 되겠지.’
그나저나 선아는 어쩌다 이 타이밍에 기막히게 나에게 매점을 가자는 제안을 한 것일까?
‘원래는 쉬는 시간에 내가 먼저 인사도 하고 말도 걸었어야 했는데, 이번에는 가만히 있어서인가. 그래 서 짝꿍과의 어색함을 못 견디고 나에게 먼저 온 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매점 근처에 도착했다.
그곳엔 여전히 학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선아야, 이쪽으로.”
나는 학생들을 피해 인적이 없는 담벼락 쪽으로 갔다.
선아가 갸우뚱하며 나를 따라온다.
담벼락 쪽으로 도착해 눈으로 높이를 한번 재어 봤다.
내 키랑 비슷해서 좀 힘들긴 하겠지만, 벽돌 사이로 틈새가 많아 잘만 디디면 타고 넘을 수는 있을 것 같다.
‘···저번에 봤을 때 그 여자는 이 담벼락에서 머리가 툭 튀어나와 있던데. 키가 2미터는 되는 건가.’
나는 잠시 마음을 다잡고 얘기했다.
“선아야, 잠시 여기서 기다려줄 수 있어? 좀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금
방 올게.”
혼자라면 엄두도 안 나겠지만, 누 군가 뒤에서 함께 있어 준다는 것.
나는 그것만으로도 용기를 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선아야?”
대답 대신 빤히 나를 쳐다만 보고 있는 동글동글한 여학생.
“선아야? 여기서 기다려줄래……?”
‘가만, 상황이 좀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일단 되는 대로 선아를 끌고 왔지만, 이건, 그 거다.
친구를 망보게 해 놓고 몰래 담배를 피고 오는 그림.
그렇다.
학생이 쉬는 시간에 담 넘어 뭔가를 급하게 몰래 하고 올 만한 건 담배밖에 없는 것이다.
입학식에서 친해진 지 하루 된 좀 어리숙한 여자애를 꼬셔서 망보게 시켜 놓고 담 넘어 담배를 피고 오려는 나쁜 남자 이준.
선아는 여전히 말없이 빤히 나를
쳐다본다.
“저기, 나쁜 짓 하고 오려는 건 아니고. 잠시 확인할 게 있어서……
뭐라 변명하려던 나는 이내 그만두었다.
이제 곧 그 여자가 나온다. 시간이 없다.
“미안, 선아야. 여기서 잠시만 있어 줘. 매점엔 다음에 다시 오자. 그때는 내가 사 줄게. 미안해.”
무표정이지만 선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 후, 나는 급하게 담벼락을 타고 넘었다.
이 뒤는 학교 뒷산으로 이어지는 수풀.
저 멀리 나무 사이로 희끄무레한 형체가 다가오는 게 보인다.
나뭇가지와 수풀 사이에 가려져서 잘은 보이지 않지만, 그 여자가 분 명하다.
‘벌써 마주치는 건가… 젠장.’
아직 마땅한 방법도 생각 안 해 놨는데
‘어떡하지, 어떡하지, 미친……
서서히 여자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마주치기 일보 직전.
‘미 친아줌마의희번뜩웃으며새하얗 게분칠한얼굴.’
여자가 보일락 말락 하는 상황이 오자, 잔머리와 벼락치기로 오랜 학교생활을 버텨 온 나의 두뇌가 그 어느 때보다 활성화되어 폭주(暴走) 하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두근.
‘X발, 찾아야 한다. 반드시 방법을 찾아야 한다!!’
머릿속에서 이 빌어먹을 게임이 시작되고부터 지금까지의 내 기억이
쏜살같이 흘러 지나간다.
‘미스테리와 비밀이 가득한 낙성고
등학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나는 원래 행동이 느려서……
‘양면성, 그렇구나. 그 성격 덕분에 잔머리는 잘 굴러갔지만……
4기이하게 웃는 여자를 발견할 시 못 본 체하고 지나갈 때까지 자연스레 행동……
‘절대 아는 체를 하지 마루요… 쿡 쿡쿡.’
내 뇌가 생존 본능 앞에서 초인적으로 경우의 수를 생각해 내고 있
다.
그 무수하게 스쳐 지나가는 기억 가운데, 단 하나 아찔하게 지나가는 장면 하나를 무의식이 잡아낸다.
그 장면은 어젯밤, 방 침대에 누워 서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나의 모습.
‘미친, 쓸모 있는 게 하나도 없어. ’
번뜩-
U I 9?
그래! 이거다!
이거라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저벅저벅.
어느덧 여자는 내 바로 앞 나무가 있는 거리까지 와 있었다.
나는 일부러 웃는 여자를 보지 않고 시선을 떨궜다.
저 기괴한 모습을 정면으로 본다면 평정을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메인 화면.’
나는 생각해 낸 걸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파앗-
« 메인 화면 »
[2019년 3월 5일 화요일, 10:54]
[이준 - 2회차, 튜토리얼 중]
[괴담 포인트 : 20]
[인과율 : 3%]
① 상태창
② 동아리 관리(잠금)
③ 통계
④ 설정
저벅저벅.
여자가 나를 눈치채고는 이쪽을 가 만히 보는 게 느껴진다.
‘보지 말자, 보지 말자… 4번. 설정
클릭.’
파앗-
〈〈설정〉〉
[그래픽 옵션]
[오디오 옵션]
[컨트롤 옵션]
쑤욱-
여자가 갑자기 다다다 달려와서는 내 눈앞에 얼굴을 쑤욱 들이미는 것과 동시에.
나는 그래픽 옵션을 열고 밝기 수
치를 최대한으로 올려 버렸다.
사아악-
순식간에 시야가 하얗게 변하며 온 세상이 백색으로 물들었다.
고개를 들어서 눈을 부릅뜨고는 여자를 마주해 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나는 확실히 여자를 향해 눈을 뜨고 서 있는 상태다.
안 보인다.
확실히 안 보인다.
하지만 눈을 가린 것도 아니고, 시선을 피한 것도 아니다.
이 시스템은 분명 내 인지를 초월 하여 현실과 시간의 거스름까지, 모든 걸 초월해서 작용할 테니깐.
나는 정면에 있을 여자를 향해 당 당히 눈을 뜨고 서 있으면서도, 동 시에 시스템을 이용해 여자를 시야에서 가려 버린 것이다.
[으면… 이와요…….]
순간 여자가 숨이 넘어갈 듯이 꺽 꺽대며 무언가를 말하는 게 들린다.
‘ 이크!’
나는 오디오 옵션도 열어서 소리도
최대한 줄여 버렸다.
지잉-
이제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오직 느껴지는 건 완전한 백색의 공간과 백색의 소음.
고요하다.
마치 명상을 하는 듯한 기분이다.
나는 지금 오감 중 시각과 청각. 두 가지가 차단된 상태.
여기에 선아가 뒤에서 나와 함께해 주고 있다는 심리적인 안정감까지 합쳐지자, 내 마음은 언제 조급했었
냐는 듯 굉장히 침착해졌다.
후웁~ 후, 후웁~ 후.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천천히 마음을 다잡아 본다.
잠시 기다려 보았는데 별다른 반응 이 없었다.
‘···혹시 나를 지나쳐 간 건 아니겠지?’
너무 조용하자 살짝 걱정이 돼서 밝기를 약간만 낮추어 보았는데, 바로 앞에 흐릿하게 사람 얼굴의 형태를 한 뭔가가 보여서 다시 잽싸게 밝기를 올렸다.
‘설마, 이 새끼… 지금 내 얼굴에 대고 반응을 살피고 있는 건가?’
존나 치졸한 새끼였다.
정말로 자신을 못 본 건지, 얼굴을 갖다 대고는 내 눈동자를 살피고 있다.
이 정도면 자기를 알아차리라고 일 부러 반응을 유도하는 정도.
아무리 연기의 달인이라도 저런 기괴한 여자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코 앞에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본다면 흠칫 안 할 수가 없겠지.
순수한 연기력으로는 애초부터 절 대로 이길 수 없는 게임이었다.
하지만 시스템의 편법을 사용한 나는 지금 안전하다.
‘얼굴을 냅다 들이밀어? 와, 개새 끼였네 X발놈의 아줌마.’
한번 해 보자 미친년아.
백날 내 눈동자를 살펴봐라. 난 진 짜로 네가 안 보이니깐.
후웁~ 후.
후웁~ 후.
다시 한번 숨을 천천히 들이쉬었다 가 내쉬어 본다.
마음이 고요하다.
세상은 평화롭다.
‘아, 어떻습니까. 혹시 아직도 내 눈을 살피는 중이십니까?’
병신이군요.
이쯤 되자, 나는 상황을 즐기는 감각까지도 들었다.
안전해, 완전히 안전해.
드디어 내가 이 빌어먹을 괴현상에 한 방 먹여 주는 순간인 것이다!
“으~ 흐흐~ 으흐~”
태연한 척 콧노래도 불러 본다.
얼마든지 살펴봐~ 안 보이고 안 들리니깐~
“음~ 흠흠흠~ 음흠~”
응 안 들려~
응 안 보여~
사락.
순간 손에 옷자락이 살짝 스치는 게 느껴진다.
그렇다.
나는 아직 촉각만큼은 느낄 수 있었다.
‘이 새끼 진짜 내 반응을 유도하고 있구나.’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으로 인해 깜 짝 놀라 흠칫 손을 뒤로 빼다가, 그 빼 버리는 자세 그대로 자연스럽게
댄스를 추기 시작했다.
‘자연스러웠다, 자연스러웠어.’
흠칫 놀라 빼 버린 오른손 끝에서부터 자연스레 웨이브를 타며 왼쪽 손까지 물결을 쳤다.
그리고 왼쪽 손에서부터 다시 웨이 브를 타며 오른쪽 손까지 꺾은 후, 갑자기 가슴 깊이 끓어오르는 깊은 빡침을 참지 못하고 나는 오른손의 흐름 그대로 여자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퍽 -
“미친 근데 왜 계속 지랄인데!”
이 미친년 하나 때문에 선아랑 내
가 도대체 몇 번을 죽고 고생을 하고 있지!
그것도 모자라 마치 비위 맞추듯이 눈치채면 어쩌지 안절부절못하며 춤이나 추고 있고.
나는 화가 나서 다시 같은 방향으로 있는 힘껏 주먹을 날리려다가 잠시 진정했다.
‘진정하자. 진정하자… 못 본 척해야 한다. 못 본 척.’
나는 섀도우 복싱을 시작했다.
“쉭~ 쉬익~ 쉭쉭쉭. 쉭 쉬익~”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백색의 허공에 주먹질을 하며 생각했다.
나는 네가 거기 있는 걸 인식해서 때린 게 아니다.
나는 쉬는 시간에 학교 뒷산에 몰래 나와 섀도우 복싱을 하는 게 취 미인 평범한 학생인데, 내가 주먹을 내지르는 방향에 우연히 네가 얻어 맞은 것뿐이다.
알겠냐. 나는 너를 인식하지 못했다, 나는 너를 못 본 것이다.
‘정말이야!’
‘의심스러우면 내 시선을 살펴봐!’
‘내 눈동자를 봐 보라고! 아무렇지도 않지?’
하지만 나는 장님도 아니고, 눈을
가린 것도 아니다.
완전히 두 눈을 멀뚱멀뚱 뜨고서도 완벽하게 못 본 척하고 있는 것이 다!
퍽- 퍽- 퍽퍽-
퍽_ 퍽 -
잠시 허공에 섀도우 복싱을 하다가 그냥 좆같아서 대놓고 패 버리기 시작했다.
“X발! X발! 지랄하지 말라고!”
퍽- 퍽- 퍽퍽- 퍽- 퍽 -
여자는 인간의 상식을 초월한 괴물 답게 입고 있는 거적때기 안은 강철 같이 단단한 근육으로 가득했다.
덕분에 주먹으로 때릴 때마다 딱딱
한 부분과 부딪쳐 오히려 손이 아파 왔다.
‘이 정도로 대놓고 패는데도 반응 이 없다는 건, 역시 이 방법이 통한 다는 거군.’
단어의 의미 그대로 못 본 척하기만 하면 된다는 건가.
퍽- 퍽- 퍽퍽- 퍽- 퍽-
“도대체 왜, 가만히 있는 학교에 와서 설치는데! 여기는 학생들이 공 부하는 곳이니깐 꺼져 미친!”
한참을 신나게 주먹질을 하다가 나는 문득 걱정이 됐다.
‘혹시 내가 지금 선아를 패고 있는
건 아닐까?’
아무것도 안 보이고 안 들리다 보니, 내가 지금 누구를 때리고 있는 건지 착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선아가 나를 기다리다가 무슨 일인 지 걱정이 돼서 내 옆에 왔지만,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자 가까이 왔다가 나에게 얻어맞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불길한 상상이 들자 나는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잠시만 체크하고 가야겠군.’
밝기랑 소리를 약간만 제한을 풀고 확인해 보니, 내 앞에는 키가 2미터는 될 법한 장신의 그림자가 일렁거
리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게 느껴 졌다.
‘확실히 선아는 아니네.’
퍽퍽-
퍽 _
퍽 -
퍽 _
퍽 _
퍽퍽-
퍽퍽¬
퍽 _
퍽 _
퍼파 -
퍼 -
퍼一
나는 안심하고 다시 패 버리기 시작했다.
퍽_ 퍽_ 퍽- 퍽- 퍽_ 퍽_ 퍽- 퍽_
영화에서만 봐 오던 옆 돌려 차기. 티브이에서 보던 복싱 선수들의 자세를 흉내 내 보며, 마음껏 어설픈 스탭과 함께 주먹도 내질러 보고.
아쵸옷, 하는 괴상한 효과음도 내
면서 게임 속 캐릭터의 필살기들도 따라해 봤다.
발길질까지 해 가며 한참을 그렇게 땀을 흘리며 패고 있으니, 눈앞에 알림창이 하나 떴다.
파앗-
[B급 괴담 - 매뉴얼 괴담 속 웃는 여자와 마주쳐서 살아남았습니다.]
[괴담 포인트를 15 획득하였습니다.]
밝기를 최대한 올려 시야가 온통 하얀데도 알림창은 평소처럼 정직하
게 검정과 파랑이 섞인 색으로 눈앞에 떠 있었다.
‘게임 화면과 이는 별개라는 건가.’ 순간, 눈앞에 폭죽이 펑펑 터지는 이펙트가 이어서 뜨더니 다른 창이 하나 더 나타났다.
[당신은 놀라운 기지를 발휘하여 오히려 웃는 여자를 격퇴하고 말았습니다!]
[괴담 포인트를 70 획득하였습니다.]
[괴담 포인트가 충분한 수치까지 쌓였습니다! 괴담 포인트를 소모하
여 특수 능력을 얻고 자신을 성장시 키십시오!]
···오오!
잘은 모르겠지만, 생각지도 못한 보상!
‘일단은 상황이 끝난 건가!’
나는 그래픽 옵션과 오디오 옵션에 들어가서 모든 것을 정상으로 돌려 놨다.
시야가 정상으로 돌아오고 주변 소리가 귀에 들려오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봤지만,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는 초록색 수풀과 나무뿐.
평화로운 학교의 뒷동산만 펼쳐져 있었다.
‘쫓아냈구나!’
괴담 동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