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화
다섯 번째 괴담 -
끝나지 않는 4교시 (5)
“반대로?”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보는 경원이.
“뭘 반대로……?”
선아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묻는다.
나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내뱉고는 설명을 시작했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던, 꿈에서 깨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 뭘까?”
“···죽는 거지.”
경원이가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바로 말해 줬다.
“맞아. 어떤 꿈이든 간에 보통은 죽으면 깨.”
죽음이라는 상황이 닥치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신경이 각성할 수밖에 없으니깐.
그래서 아무리 심한 악몽이라도 보통 죽으면 깨어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꿈속의 꿈’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는 그게 통하지 않아. 신경
이 각성해 봤자 거짓 깨어남을 겪을 뿐이야. 놀라서 벌떡 일어났더니 또 꿈속 또 꿈속. 그게 반복인 거지.”
여기까지는 이해했다는 듯 선아가 고개를 끄덕인다.
‘선아가 이해한 거면 다 이해한 거 겠지?’
슬슬 결론을 얘기해 주기로 했다.
“내가 말한 반대로라는 건 그런 뜻 이야. 깨어나려고 애써 봤자 반복될 뿐이라면, 반대로 하는 게 정답일 수도 있다는 거지.”
“반대로?”
“꿈속에서 잠드는 거야.”
토끼 눈을 뜨는 선아.
“이런 종류의 경험담들이 헤매다 보니 그냥 깨어났다는 결말로 끝나는 이유. 어쩌면 헤매다 지쳐서 무의식중에 다시 잠든 건 아닐까?”
“다시 잠든다고……?”
경원이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게 어떤 의미인 건지… 다시 자면 그냥 리셋되는 거 아냐? 처음으로-”
“다르지.”
강하게 부정해 주었다.
“여기가 깨어나고 깨어나도 다시 돌아오는 원점이라면. 여기서 잠들면 우리는 한층 더 깊은 무의식으로 가게 되는 거지.”
경원이가 머리에 번개가 번쩍인 듯 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든다.
“그, 그렇구나……! 꿈속의 꿈 ……
“맞아.”
깨어나고 깨어나도 반복되는 꿈속의 꿈.
그럼 그걸 반대로 이용해서, 꿈속에서 오히려 더 깊게 꿈을 꿔 준다.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몽중몽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깨어나 봤자 소용없으니, 다시 잠 들어서 더 깊게 들어가 보자고 ……
«응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거기서 무엇을 마주칠지는 들어가 봐야 알겠지만.
여기서 계속 쳇바퀴를 도는 것보다는 그쪽이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방향일 것이다.
“그, 그럼 이제 이불 깔고 누워 잘 준비하면 되는 건가……?”
허둥지둥하며 기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는 경원이를 내가 다시 말렸다.
“근데 이것도 문제가 하나 있어.”
“문제……?”
그제야 아차 하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녀석.
대화에 열중해서 잊어버렸지만, 지금 여기는 수십 명의 반 학생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묵묵히 쳐다보는 중이다.
동시에 바깥에서는 악몽 속의 괴물 들이 또 우리를 죽이러 다가오는 중일 테고.
‘이런 곳에서 자는 건 부처가 아닌 이상 불가능하겠지.’
“도, 동아리방은 어때, 준아……?”
선아가 불안한 듯 주위 학생들의 시선을 피하며 나에게 묻는다.
“거기라면 조금 마음 편하게 잘 수 ”
“어려울 것 같아.”
방금 동아리방에서 마왕을 쳐다보며 죽음을 맞이한 후다.
애초에 이곳은 꿈속의 공간.
실제로 존재하는 물리적 장소가 아닌 정신적인 공간이다.
어디에 숨든지 의미는 없다.
악몽은 확실하게 우리를 찾아내서 죽일 것이다.
“…그렇군. 확실히 이런 상황에서 가만히 누워 잠을 청하기는 어렵겠군. 꿈속에서 수면제를 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경원이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 덕인다.
“맞아. 그래서 나는 우리가 즉각적으로 의식을 잃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
“어떤
“예를 들면 서로를 기절시켜 준다 든가.”
경원이가 앓는 소리를 내며 안경을 고친다.
“어때, 기절이라면 괜찮지? 자기 의사랑 상관없이 바로 의식을 잃는 거니깐.
“부장, 초 쳐서 미안한데……
경원이가 끼어들어서 미안하다는 어조로 말한다.
“사람은 기절했을 때 꿈을 꾸지 않아……
“···뭐‘?”
“말 그대로야.”
지적해서 미안하다는 얼굴.
“부장이 원하는 건 우리가 여기서 다시 잠에 들어서 더 깊은 꿈속으로 들어가 보자는 거지? 근데 사람은… 미안하지만. 기절했을 때 꿈을 꾸지 않아.”
나는 잠시 벙찐 표정이 되었다.
“… 그렇다고?”
“응 ”
“.··왜?”
뭔 소리지, 그게.
의식 잃으면 똑같은 거 아닌가 ··…?
“기절과 잠은 달라, 부장.”
녀석이 한숨을 쉬며 보충 설명을 시작했다.
“기절, 실신이란 건 순간적으로 뇌로 흐르는 혈액이 정지되면서 생기는 현상이야. 반대로 잠은 근육이 이완되며 들어가는 정상적인 신체 활동이고.”
“꿈이란 건 뇌의 활동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뇌로 가는 혈액이 일시적으로 정지되며 생기는 기절로는 사람이 꿈을 꾸지 않아, 부장……
녀석이 안타깝다는 듯 나를 바라본다.
“그럼 여기서 우리가 서로를 기절 시켜 준다면……?”
“말 그대로 그냥 의식을 잃을 뿐, 아무 일도 안 생기겠지.”
“그래?”
나는 조금 침울한 표정이 되었다.
“그럼 어떡하지……?”
“그러게……
저 멀리서 엄마가 나를 찾는 소리 가 들려온다.
“정신머리가 썩어 빠져서는, 너도 너 같은 거 하나 낳아 봐야··…·. ”
이런 초조한 상황에서 잠을 청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고 서로를 기절시켜 주는 것 도 안 되고.
심각한 표정으로 서로를 보는 우리.
고민하는 이 순간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다.
죽으면 리셋되고, 기절은 안 되고.
그런데 잠에는 들어야 한다.
뭔가…….
뭔가 방법이…….
“방법이 있어.”
순간 교실에 울려 퍼지는 청아한 목소리.
하윤이였다.
“호흡 곤란으로 저산소를 유발하면 돼. 일어나.”
“뭐,뭐……?”
다짜고짜 일어서더니 성큼성큼 교실 뒤편으로 걸어가는 하윤이.
우리도 엉겁결에 일단 자리에서 일
어섰다.
“뭐, 뭐를 한다고……?”
“무슨-”
성큼성큼 걸어간 하윤이는 그대로 교실 뒤편의 청소도구함을 벌컥 열더니 우리를 향해 고갯짓했다.
“들어가.”
« 2”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일단 청소도구 함 앞에 선 우리.
곧 경원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호흡 곤란으로 인한 저산소 그, 그렇구나.”
“뭐?”
돌아보는 나와 선아에게 경원이가 급히 설명해 줬다.
“고속도로에서 졸음운전으로 사고 많은 거 알지, 부장?”
“···알아.”
유명한 얘기다.
졸음운전으로 인한 교통사고.
“그때 졸음이 생기는 이유가 바로 밀폐된 차량 내의 산소 부족에 의해 서야.”
···산소 부족.
“산소 부족으로 인해 의식을 잃는 건… 확실히 기절이 아닌, 수면에
가까워, 부장!”
눈을 크게 뜨며 돌아보는 우리에게 하윤이가 뭐 하냐는 듯, 어서 들어 가라는 얼굴로 고갯짓을 했다.
“밖에서 테이프로 틈은 다 막아 줄 게. 빨리 들어가.”
서로의 눈치를 보던 중, 경원이가 ‘에잇’ 하고 일단 움직이며 안에 먼저 들어갔다.
빗자루와 쓰레받기가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한쪽으로 밀리고.
“하아, 하아.”
한쪽 구석에 간신히 웅크린 경원이.
공간을 비우면 한 명 더 들어갈 수는 있을 것 같다.
“빗자루 다 꺼내. 공간 만들어”
멀리서 엄마가 울부짖는 소리가 가 까워져 온다.
“재주도 없는 공부 처하면서 성질이나 부리고… 네가 복이 있었으면 돈 많은 부모 만났어……. ”
“꺼내, 전부.”
“여기······
안에 든 대걸레와 빗자루를 모두 꺼내는 우리. 그렇게 만들어진 공간은 몸집이 작은 선아가 들어갈 만한 크기였다.
“선아야, 들어가.”
“주, 준아……
걱정 어린 표정으로 나를 보는 선아.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괜찮아. 나는 다른 방법을 찾아볼 게.”
응”
잠시 망설였지만, 곧 선아도 청소 도구함 안으로 몸을 밀어 넣는다.
“낑낑······
좁은 공간 안에 완전히 웅크려 앉은 경원이와 선아.
몸을 비틀어 넣은 경원이가 고개만 간신히 돌려서 이쪽을 바라봤다.
“부장. 중요한 건 숨은 쉬되, 산소 가 부족한 공기를 계속해서 들이마시는 거야. 그런 쪽으로 방법을-”
탁!
뭐라 작별 인사를 할 새도 없이 하윤이가 곧바로 문을 닫는다.
“테이프 찾아봐. 교탁 밑에 있어.”
“그, 그래……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교탁
으로 달려가는 나.
반에 앉은 학생들의 고개가 나를 따라 이동한다.
‘여, 여기……?’
교탁 밑을 살펴봤지만, 그곳에는 출석부만 있을 뿐. 테이프는 보이지 않았다.
“테. 이. 프. 여. 기.”
순간, 지금껏 가만히 서 있던 반장 이 자기 책상에서 테이프 하나를 꺼 내서 나에게 준다.
“내. 가. 쓴.다.고. 잠. 시. 가. 져. 갔.었. 어.”
억양 없는 무뚝뚝한 목소리. 나는 흠칫하며 테이프를 받아들었다.
“···그, 그래. 고마워.”
곧바로 뒤편으로 다시 달려가는 나.
“여기!”
팔을 뻗어 건네주자 하윤이가 바로 테이프를 낚아채더니, 이내 쫘악 쫘 악 소리 내서 뜯는다.
그대로 이로 잘라 문틈에 붙이기 시작하는 그녀.
“하아, 하아……
“주, 준아……
청소도구함 안에서 나를 부르는 선아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그녀를 달래 주었다.
“괜찮아. 다 잘될 거야.”
« 으음”
이렇게 하면 기절이 아니고 잠들 수 있는 건가.
알아볼 길은 하나뿐이다.
나도 들어가 보는 수밖에.
“···우리는 어떻게 하지?”
하윤이를 쳐다보며 묻는 나.
그러자 그녀가 빤히 내 눈을 들여 다본다.
“한 명만 가면 돼. 마지막에 남아 서 꺼내 줄 사람은 있어야 하니깐.”
“그, 그렇네.”
계속 밀폐된 공간에 있으면 질식해 서 죽어 버릴 테니깐.
우리가 의식을 잃으면 꺼내 줄 한 명은 여기 남아 있어야 한다.
‘그 한 명은… 여기 남게 되겠구 나……
혼자서는 어려운 방법이니깐.
“···일단 여기는 마땅한 밀폐된 공 간이 없으니, 우리는 옆 반 청소도 구함으로 이동해서 마저 생각해-”
“머리 숙여.”
“썅놈이 애비닮아 집에 오자마자 어딜 쳐 또 기어 나가!!!!!!!!!!!!!!!!”
순간, 복도 밖으로 엄마가 괴성을 지르며 지나갔고, 하윤이가 내 머리를 부여잡고 숙여 주었다.
다다다다…….
미친 듯이 복도를 달려가며 멀어지는 엄마의 발소리.
하지만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다른 교실을 뒤지는지 쿵, 쿵 하고 소
란이 들린다.
다시 조용한 교실, 웅크린 하윤이 와 나.
청소도구함 안에서 선아와 경원이가 간신히 내뱉는 호흡만이 간간이 들려올 뿐이다.
“하아, 하아……
“후우, 후우……
여기서 나가는 건 자살행위겠지.
웅크린 채 물끄러미 나를 보던 하윤이가 이내 속눈썹을 살짝 내리깐다.
“마지막엔 내가 남을 거야. 준비 해.”
“주, 준비……?”
다리를 살짝 들어서는, 웅크린 그 대로 자신의 사물함으로 가는 그녀.
사물함의 문을 열더니, 분홍색 리 코더 하나를 들고 나에게로 온다.
“괘, 괜찮겠어? 여기 마지막 남는 한 명은……
마지막 남는 한 명은 선아와 경원이가 질식해서 죽기 전에 꺼내 주고, 또 어떻게든 괴물을 피해서 최 대한 오래 살아남아야 한다.
잠들어 있는 동안 죽어 버리면 상
황이 어떻게 엉켜 버릴지 모르니깐.
“괜찮아. 여기 앉아.”
하윤이가 떨어진 앞사람의 볼펜이라도 주워 주는 양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하며 리코더를 든다.
“이 리코더로 내가 불어 주는 숨을 마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리코더의 구 멍을 섬세하게 하나씩 막는 그녀.
“…저, 저기.”
연분홍 입술로 리코더를 물고는, 그대로 나에게 반대편을 들이민다.
나는 다가오는 분홍색 리코더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이런 거를-”
“폐에 있는 숨을 다 뱉어 내.”
어서 하라는 듯 리코더를 들이대며 재족하는 그녀.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쨌거나 마지막에 자처해서 남아 줄 사람이 있다는 건 좋은 소식이었다.
누가 혼자 악몽 속에서 괴물들과 숨바꼭질을 하고 싶겠는가.
‘흡!’
나는 리코더의 끝을 물었다.
마치 빼빼로 놀이를 하듯이 마주 앉아 리코더의 양 끝을 문 우리.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후우.”
하윤이가 물고 있는 리코더의 입구에서부터 따뜻한 숨결이 타고 흐른다.
그걸 그대로 받아서 숨을 삼키는 나.
“···우읍-!”
그리고 리코더를 떼고, 공기 중에 호흡을 뱉어냈다.
“후우우……
사실상 이산화탄소를 마시고 이산화탄소를 내뱉는 꼴.
다시 리코더를 물었다.
“···후우.”
“···우읍,”
다시 숨을 불어 주는 하윤이.
나는 그 공기를 그대로 폐로 받아 들였다.
“푸우우우
다시 그걸 공기 중에 내뱉고.
다시 입술을 문 하윤이와 나.
“···후우.”
“··우읍,”
폐가 점점 갑갑해져 오고.
빨개지는 얼굴은 같은 반 예쁜 여학생과의 묘한 상황 때문인지, 아니
면 산소가 부족해서인지.
점점 어딘가 몽롱해져 가는 느낌이다.
“푸후우우 ”
하윤이에게 받아들인 숨결을 공기 중에 내뱉다가, 그대로 기침을 하고 말았다.
“콜록! 콜록……
“숨 쉬지 마.”
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깨끗한 목소리.
나는 기침을 하면서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콜록, 콜록……
뱉을지언정 절대 바깥의 신선한 공 기를 마셔서는 안 된다.
“계, 계속……
쥐어짜 내는 공기로 간신히 말한 후 다시 리코더를 입에 무는 나.
하윤이가 살며시 웃는다.
« 2”
“···후우.”
왜 웃지.
하지만 산소가 부족해서인지, 점차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돼 버린다.
다시 리코더를 통해 불어오는 하윤
이의 숨결.
나는 얼굴이 새빨개질 때까지 하윤이가 뱉은 숨을 폐 속 깊숙이 빨아 들였다.
서서히 산소의 부족으로 머리가 멍 해져 오고, 생각이 잘 돌아가지 않는다.
나는 어디지. 머리가 띵하다.
엄마는 왜 날 찾고 있지.
이 여학생은 왜 나에게 숨을 불어 주고 있는 거지.
그녀의 풍선이 된 듯한 기분이다.
“··후우.”
“···우우.”
계속해서 리코더를 통해 호흡을 받던 나.
마땅히 시선 둘 곳이 없었기 때문 인지, 어느새 나는 멍하니 그녀의 눈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홍빛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멍청한 표정을 짓는 나를 향해 그 녀가 배시시 웃는다.
완전히 벌게진 내 얼굴.
요염한 미소를 띠는 그녀.
뭐라 항변할 새도 없이 다시 하윤 이의 한숨이 폐로 들어왔다.
‘왜 웃냐고, 자꾸.’
물어보려고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착각이었는지, 나는 여전히 리코더에 입을 문 상태였다.
“후우.”
“으우. 으우우… 우우……
이상한 분위기를 내뿜으며 미소 짓는 그녀.
리코더를 문 내 얼굴이 벌겋게 달 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천천히 끝없이 밀려오는 졸음.
어느새 나는 완전히 몸이 늘어진 채, 리코더에 입을 처박고 침을 흘리고 있었다.
“후우.”
“으우. 으우우……
“후우.”
그만 불어, 그만…….
하윤이가 한숨을 불어줄 때마다 의식이 어딘가로 날아가는 것 같다.
갑자기 살짝 리코더를 떼고는 나를 보며 미소 짓는 그녀.
“변태.”
나는 바보같이 침을 흘리며 리코더에 입을 박고 있다.
몽롱하다. 나른하다. 몸이 붕 뜨는 것 같다.
온 세상이 핑핑 돌기 시작했다.
눈동자가 저절로 위를 향한다.
하윤이의 비웃는 듯한 작은 웃음소리가 몽롱하게 사방에 울려 퍼지고.
나는 그 속에서 정신없이 헤엄치며 허우적거렸다.
후우. 후우. 후우.
변태.
* * *
“알겠어? 요점은 햄버거가 건강에 나쁘다는 건 헛소문이란 말이야. 오
히려 탄수화물과 단백질, 지방이 적 당히 섞여 있는 완전식품이라고 봐 도 무방해. 빵, 양상추, 토마토, 소고기가 왜 몸에 나쁘다는 거야?”
한가한 패스트푸드점 안.
엘리트를 표방하는 건방진 부잣집 도련님, 경원이가 햄버거를 앞에 두고 인터넷에서 본 지식을 자랑하고 있었다.
“색소와 첨가제들이 첨가되니 몸에 나쁘다고? 정말 무식한 소리지. 과거 MSG가 몸에 나쁘다는 헛소리가 유행한 이래로 이 나라는 미디어매체가 주는 선동에만 여전히 휘둘릴 뿐지금정전인데어떻게이가게에는불이들어온다거나 감자튀김과 콜라를 빼면 햄버거는 건강식품이란 거야, 알겠어?”
나는 듣는 둥 마는 둥 우물거리며 알겠다고 대충 대답했다.
방금 전에 뭔가 기분 좋은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잘 생각은 나지 않았고, 나는 다만 옆에서 선아가 화장을 고치는 모습을 멍하니 볼 뿐이다.
마냥 친구로만 보였던 같은 반 여자애가 화장을 하는 모습은 사춘기 남자에게는 꽤 자극적으로 보였다.
나는 어려 보이고 동그랗던 선아의 얼굴이 화장으로 점점 아름답게 물
들어가는 걸 정신없이 보면서 햄버 거를 먹었다.
“미디어매체가 제일 장난질 치기 쉬운 게 바로 음식이란 거야. 식품을 고발한답시고 방송 매체들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민폐를 끼쳐 왔어? 근데 더 한심하게 생각되는 건 거기에 휘말리는 우매한 대중들-”
“잠까아아아아아아아안!”
내가 벌떡 일어서며 외치자 깜짝 놀라는 둘.
“꺅!”
“뭐지! 뭔데 갑자기?”
나는 숨을 몰아쉬고는 말했다.
“이거 꿈이야, 얘들아. 정신 차려.”
“아, 맞다!”
선아가 립스틱을 손에 든 채 빨간 입술을 벌리며 놀랐다는 제스처를 취한다.
“크윽! 그렇구나, 생각났다! 우리는 더 깊은 꿈속으로 들어오려다가
경원이도 허겁지겁 주위를 둘러봤다.
“꿈은 항상 중간부터 시작하니깐, 하마터면 속을 뻔했다. 그런데 여긴 어디지?”
“패스트푸드점이야. 신림역 앞에
있는.”
내 대답에 둘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그렇군. 나는 와 본 적도 없는데, 왜 이런 꿈을.”
“나도… 처음 와 봐.”
아까부터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던 거지만, 이 꿈들은 아마 내가 꿨던 악몽이 섞인 듯하다.
계속해서 마주쳤던 내 기억 속에만 있는 괴담들.
그리고 친구들은 와 본 적 없는, 나만 유일하게 와 본 지금의 패스트 푸드점.
‘이유는 모르겠지만, 여기는… 내 악몽 속이구나.’
“그런데 저기, 왜, 나 화장 같은 걸……
선아가 멍하니 손에 든 립스틱을 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내가 선아에게 매력을 느낀다는 무의식의 반영일 테니깐.
“어떻게 하는 게 좋겠어? 한 번 더 해 볼까?”
경원이의 주위를 둘러보며 묻는다.
“여기도 별다른 건 없는 듯한 데……
“응. 한 번 더 해 보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깊게, 끝까지 들어가 보는 수 밖에.”
“으음… 역시.”
경원이가 침음을 흘리며 팔짱을 꼈다.
여기는 진정한 의미에서 꿈속의 꿈.
이곳에서 깨어나면 아마 하윤이와 있던 교실로 돌아갈 것이다.
그곳에서는 깨어나도 깨어나도 다시 교실이 원점이었는데, 우리는 그 원점보다 더 뒤로 온 것이다.
여기서 한 번 더 잠들어서 더 뒤로 간다면?
그곳에선 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 까?
“이번엔 내가 남을게, 부장이랑 선아랑 둘 다 준비해.”
U I 99
경원이가 두 팔을 걷어붙이며 일어 섰다.
“왜? 네가 아는 게 더 많으니깐, 내가 남는 게……
선아가 당황해하며 경원이에게 묻지만 녀석은 미소 지을 뿐이었다.
“후후, 그렇지도 않아. 아마 이 뒤
로 간다 해도 내가 알아낼 수 있는 건 별로 없을 거야.”
당당하게 패스트푸드점의 주방으로 향하는 녀석.
우리도 서둘러 뒤를 따랐다.
“나는 현장에서 부딪치며 해결하는 타입은 아니니깐. 아까의 설명에서 지식을 쏟아 낸 거로 내 역할은 끝 난 거야. 그러니깐 둘이 다음으로 향해.”
“뭣보다, 부장. 선아는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는 그런 건 못할 것 같지 않아? 여기선 내가 힘을 쓰는 수밖 에.”
“정확하네. 그건 동의해.”
선아가 볼을 부풀리며 우리를 보았다.
“선아는… 너무 착하잖아. 하하.”
“정답. 하하하.”
“흥.”
장난스레 콧방귀를 뀌는 선아.
“후후, 어쨌거나. 그다음 역시 꿈이라면, 그때는 윤선아 네가 부장을 보내 줘야 한다. 잘 부탁해.”
선아가 맡겨 두라는 표정으로, 우쭐한 얼굴을 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고 보니 이 둘이 서로 대화를 하는 건 거의 못 본 것 같다.
“자, 여기. 이 가스관을 자르면 새어 나오는 공기를 마셔. 그럼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바로 의식을 잃을 수 있어. 직후에 내가 바깥으로 옮 겨 줄게.”
“그래……
다행히 꿈속이라 그런지 직원들은 없었다.
“자, 간다! 부장! 가서 사건을 해 결하고 와라!”
마치 포켓몬이라도 내보내는 듯한 말투로 가스관을 파악 가위로 짜르는 경원이.
“알겠다! 감자튀김이라도 먹으며
기다려 다오!”
“그러마!”
경원이와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인 뒤 목을 내밀었다.
뭔가 남자끼리의 기묘한 우정 같은 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후우우우우웁!”
“큭! 크윽……
* * *
눈을 뜬 곳은 학생들이 대열을 맞 춰 빽빽하게 서 있는 학교 운동장이었다.
“우으으, 여기는.”
선아가 바로 옆에서 머리를 움켜쥐고 일어서는 게 보였다.
주위 학생들이 우리를 힐끗힐끗 쳐 다봤다.
나는 선아를 부축해 일으켜 세워 주고는 주위를 살폈다.
“여기는... 학교 운동장… 왜 다 드 ”
그때였다.
“아아, 사랑하는 낙성고등학교 신 입생 여러분, 정말로 반갑습니다. 우선 본교에 입학하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드리는 바입니다. 저는 이 학교
의 교장을 맡고 있는……
이런! 입학식이다!
“선아야! 뛰어!”
“으, 응?”
나는 냅다 선아의 손을 잡고 달렸다.
뒤에서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와 함 께 학생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헉, 헉!”
“헥, 헤엑.”
우리가 제일 먼저 뛰기 시작했지만.
함께 보조를 맞추며 뛰다 보니, 금 세 운동부 학생들에게 추월당하고
말았다.
옆으로 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성격 나빠 보이는 여학생 한 명이 우리를 추월해 앞서가는 게 보인다.
‘얼떨결에 우리 동아리로 빼돌려진 이진희… 매번 나를 추월해 갔었구 나. 얼굴을 잘 모르다 보니 이제야 알았네.’
새삼 그런 감상을 느끼며 정문에 다다를 때쯤 경비가 학생들을 막아 서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모습이 보였다.
‘선동할 시간이다!’
나는 주위를 달리는 학생 모두에게 들리도록 외쳤다.
“정문 닫혀 있다!!”
목이 쉬어라 고래고래 다시 외친다.
“정문 닫혀 있다! 경비한테 열쇠가 있다아!”
“으아아아아아아아!”
“아저씨! 문 열어 주세요! 빨리!”
“빨리 문 열어! 아아아악!”
사방에서 머리가 터져 가는 가운 데, 살기 위해 도망치는 학생들은 이미 이성을 잃었고.
경비는 퇴역 군인답게 아직 힘이 정정한지 달려드는 학생들을 패대기 치며 고함을 질러 댔다.
“뭐 하는 짓거리야, 이 미친 새끼 들이! 야! 가만히 안 있어? 가만히 있어!”
“경비 개새끼야, 문 열라고오오!”
“X발! 문 열어라! 문 열어라, 미친 놈아!”
그렇게 이번에도 무사히 경비를 지 나칠 때쯤, 선아가 갑자기 나를 쏙 빠져나가더니 경비에게 달려갔다.
“선아야!”
선아의 눈동자는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경비는 필사적으로 주머니를 두 손으로 감추며 학생들로부터 열쇠를
지키고 있었는데, 선아가 그 인파 사이로 섞이더니.
무언가를 주머니에서 꺼내서는 경 비의 손을 찌르기 시작했다.
“꼬아아아아악!”
경비는 괴성을 지르며 결국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고, 선아는 잽싸게 주머니에서 열쇠를 낚아채서 나에게 달려왔다.
“허억, 헉, 여기.”
“서, 선아야.”
숨을 가쁘게 쉬며 피로 물든 열쇠를 내미는 선아.
내가 학생들 선동하려고 일부러 한
말이었는데, 그걸 믿고 뺏으러 갔구나! 그리고 방금 뭘로······.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일단은 열쇠를 받고 말했다.
“잘했어, 선아야. 고마워.”
“허억, 헉... 헤헷
선아는 힘들어서 숨을 몰아쉬는 와 중에도 나에게 인정받은 게 기쁜지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잽싸게 정문으로 가서는 피로 물든 열쇠로 자물쇠를 풀고는 정문을 밀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X발, 뭐야!”
정문 위에 올라타 있던 학생들 몇 명이 비명을 지르며 문과 함께 이동 했다.
거기엔 전에 화장실 괴담 때 보았던 네 번째 칸의 양아치남과 경원이의 짝꿍인 어깨가 넓은 훈남도 있었다.
‘이제 보니 다 아는 얼굴이었군.’
그런 감상을 하며 문을 열어젖히고는 다시 선아의 손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허억, 헉, 헉.”
“헥, 헥.”
얼마나 달렸을까.
대로와 건물 몇 개를 지나쳐 사람 들이 다니는 지하철역 근처까지 왔고.
나는 그제야 숨을 몰아쉬며 잡았던 선아의 손을 놓을 수 있었다.
“헉, 헉, 헉.”
“헤엑, 헥.”
우리는 그곳에서 허리를 숙인 채 한참 숨을 가다듬은 후에야 겨우 말을 내뱉었다.
“여기, 여기서는 괜찮을 거야, 아 마.”
“으, 응, 헥, 헥……
나는 저번 생에서 이 근처까지 도
망쳤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여긴 꿈속이라 다를 수도 있겠지만, 일단 멀쩡한 걸 봐서는 한숨 돌렸다고 생각해도 되겠지.
땀에 젖은 우리를 행인들이 힐끔힐 끔 쳐다보는 게 느껴진다.
“헤엑, 헥... 어라, 여기는.”
선아가 땀을 닦으며 고개를 들더니 중얼거린다.
“엇, 그러고 보니.”
나도 동조했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은 마침 신림역 근처에 있는 패스트푸드점이었다.
딸랑~ ♬
가게 안에 들어서자 웅성거리는 손 님들과 바쁘게 움직이는 점원들이 보였다.
당연하지만 경원이는 없었다.
“역시, 없구나……
“응. 거기 놔두고 왔으니깐.”
여기는 경원이가 있는 세계에서 한 단계 더 들어온, 한층 더 깊은 무의 식의 공간.
같은 장소지만 없는 게 당연하다.
“후우, 일단 앉자.”
우리는 2층으로 가서는 비어 있는 테이블에서 대충 의자를 꺼내 앉았다.
“저기, 준아……
“응?”
“ 있잖아……
선아가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모든 게 끝나면… 다 같이 여기 와서, 햄버거 먹자……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핫! 꼭 그러자, 약속!”
내가 장난스레 약지 손가락을 내밀자 선아가 홍조를 띠며 웃는다.
그러고 보니 꿈에서는 벌써 부원들과 세 번째 이곳에 온 셈인데, 현실에서는 한 번도 같이 온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약속! 꼭!”
“응. 약속.”
갑자기 기분이 꽤 즐거워졌다.
그래, 뒤풀이.
동아리 활동에는 그런 것도 필요한 거지.
“신기해.”
“뭐가?”
“이렇게 이상한 상황에서 같이 웃을 친구가 있다는 게.”
선아의 얼굴이 빨개졌다.
창문으로 늦은 아침의 햇살이 들어
온다.
119가 시민들의 신고를 받고 급히 학교로 향하는 것도 보인다.
“평범한 인생을 살았어.”
“좋아하는 것도 별로 없었고.”
“과분한 일이야. 계속 기회가 주어 진다는 건.”
“준아……
그 말의 의미를 이해했을까.
선아는 작게 내 이름을 중얼거릴 뿐이었다.
나는 테이블 위로 손을 내밀었다.
선아가 그 손을 물끄러미 본다.
그리고 머뭇거리다 결국 테이블 위로 같이 손을 내밀어 조심스레 맞잡는다.
“돌아가자, 현실로. 같이.”
선아의 부드러운 손이 움찔한다.
지금부터 선아는 내가 의식을 잃게 만들어야 한다.
나는 맞잡은 손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부탁할게, 선아야.”
선아는 몸을 떨더니 이내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괴담 동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