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여덟 번째 괴담 - 저주받은 중간고사 (1)
지난 3월은 정말 정신없었다.
3월 4일, 모두가 지시를 따르는 순 간 사람의 머리를 폭발시켜 버리는 안내 방송.
3월 5일, 학교 담벼락을 타고 기어 넘어 와서는 웃으며 학생들의 목을 썰어 버리는 미친 아줌마.
3월 6일, 엄마인 척 흉내 내며 집에 숨어 사는 귀신.
3월 8일, 첫 CA 시간에는 부원들과 끝없는 꿈속에 갇히기도 했고.
3월 15일부터 22일까지는 원한이 씌인 노래에 휘말려 전국이 들썩거렸다.
그리고 다시 일주일 돌아와서 3월 19일, 괴담에 빙의된 채 선생님과 달밤의 체조를 벌이기도 했고.
‘정말 정신없는 한 달이었구나.’
다시 돌이켜보니 웃음만 나온다.
그 당시에는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느라 스트레스뿐이었는데.
지금 와서 쭉 생각해 보니 웃음만
절로 나오는 것이다.
엄마 귀신을 시어머니 역흉내로 쫓아냈다고?
“푸핫.”
신기하다.
그런 걸 어떻게 생각해 냈지?
그 당시에는 상황을 모면하려는 급 박함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건 데, 다시 곱씹어볼수록 ‘내가 어떻게 해냈지?’ 하는 생각도 든다.
‘앞으로도 잘 이겨낼 수 있을까?’ 하는 고민도 들고.
잔머리라는 게 항상 제때제때 기막 히게 굴러가 주는 게 아니니깐.
그래도 돌이켜보니 혼자서만 무언 가를 맞닥뜨린 적은 없었다.
항상 옆에서 누군가 함께 있어 주었던 것이다.
선아, 경원이, 하윤이, 진희, 덕훈 이…….
‘선생님은.’
선생님은 예외.
그 사람은 좀… 당한 게 더 많은 듯한 기분이.
“크흠.”
나는 헛기침을 했다.
어쨌거나, 이제 게임을 끌 시간이다.
“재밌었어. 정말.”
* * *
나는 즐겁게 하고 있던 컴퓨터 게임을 껐다.
왜냐하면, 중간고사가 코앞이라서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 * *
[2019년 4월 22일 월요일, 08:47]
[이준 - 2회차]
[괴담 포인트 : 202]
[인과율 : 11%]
놀랍게도
싸이코패스 괴담을 맞닥뜨리고 한 달, 나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자~ 내일부터 여러분들이 고등학생이 돼서 처음 치는 중간고사죠! 1 학년 1학기 내신은 반영이 안 된다는 이상한 소문들 전해 듣고 혹하지 말고, 열심히 준비하길 바라요. 그럼 수고.”
조례 시간.
담임이 중간고사의 스트레스에 찌 뿌둥해 있는 우리를 약올리고는 홋홋홋, 웃으며 교실을 나섰다.
지난 한 달은 그야말로 평화의 연속이었다.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평범하게 학교를 다녔고, 집에서는 뒹 굴며 놀았다.
부모님께선 약간 자유방임주의 스타일이라 따로 학원을 강요하지도 않으셨기에, 요즘은 저녁 내내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괴담 동아리도 형식적인 친목 활동으로 변해 있었다.
하루하루 사건이 휘몰아칠 때는 일심단결해서 방송국까지 광란의 질주를 하며 귀신의 원혼까지 풀어 주던 우리였지만, 지금은 그냥 낮잠을 자는 용도로 동아리방을 쓰고 있을 뿐.
그래도 한 달 동안 다행인 게 하나 있다면, 부원들이 서로 많이 친 해졌다는 점이다.
* * *
낙성고 5층. 동아리방.
나른한 점심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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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희가 의자 네 개를 동아리방 구 석에 이어 붙이고는 누워 자고 있다.
반에서 엎드려 자는 것보다는 여기 서 이렇게 자는 게 편한가 보다.
“후욱, 후욱.”
덕훈이는 정독실에서 양손 가득 의자를 훔쳐 복도를 걸어오는 중이다.
진희가 동방의 의자를 몽땅 침대로 삼고 있는 탓이다.
“잠시만, 덕훈아. 지나갈게.”
하윤이가 양치 도구를 든 채 그런 덕훈이의 옆을 지나쳐 동방으로 들
어 왔다.
“오, 땡큐. 역시 덕훈이밖에 없어.”
“고마워, 덕훈아.”
“후욱, 후욱… 별거 아니지, 뭐.”
우리의 칭찬에 땀을 닦으며 비장한 표정을 짓는 녀석.
여분으로 훔쳐 온 의자 덕분에 우리도 겨우 자리에 앉았다.
빠르게 휴대폰을 꺼내서 애니를 보기 위해 이어폰을 끼는 덕훈이.
“준아, 시험 공부 잘 돼가?”
선아가 교과서를 내려놓으며 묻는다.
문제집을 살 돈이 없는 탓이다.
“응. 나는 그럭저럭. 이 문제집, 너 가질래?”
“고… 고마워……
새것 같은 깨끗한 문제집.
일부러 선아를 위해 서점에서 하나 산 것이다.
“너는… 괜찮아……?”
“나는 그거 다 풀었어.”
“진짜? 깨끗해 보이는데......
“펼쳐만 놓고 풀이는 연습장에 적어 가며 하는 타입이거든.”
“그렇구나… 고마워······
우물쭈물하며 문제집을 들여다보는
선아.
물론, 거짓말이다. 나는 사실 공부를 하나도 안 했다.
중간고사 후 답안지를 확인하고는 자살해서 되돌아올 생각.
“···부장.”
경원이가 옆에서 선아에게 건네주는 문제집을 흘끗 보고 말했다.
“그러다 큰일 날걸. 1학년 내신도 중요한데.”
“어, 뭐, 잘 칠 자신이 있어서.”
“흠”
안경을 치켜뜨는 녀석.
“설마, 답안지를 보고 과거로 돌아
갈 생각은 아니겠지?”
“그런 짓을 했다간 동아리를 나가 버릴 테다.”
차갑게 말하는 경원이.
이 녀석들에게는 포린세스 때 사건을 공유해 준 적이 있기에, 내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누워 있는 진희와 이어폰을 끼고 있는 덕훈이야 전혀 모르는 사실이지만, 우리 사이에서는 어느 정도 납득한 사실.
내가 말없이 서 있자 선아가 정말
그럴 생각이었냐는 눈짓으로 나에게 묻는다.
“그, 뭐, 음… 아, 하하.”
당황한 채 웃는 나를 가자미눈으로 흘겨보는 선아.
“설마, 벌써 시간을 한번 돌린 건 아니겠지?”
“…아냐, 인마. 안심하라고.”
“믿어 줄게.”
그렇다.
나 혼자 편하자고 시간을 되돌리는 것.
그건 너희들이 지금부터 보내는 일주일은 어차피 돌아갈 아무 의미도
없는 시간이라고 통보하는 것과 같다.
본인들 입장에서는 어마어마하게 무서운 일일 터.
최선을 다해 살았던 일주일이 그냥 누군가의 선택 한 번으로 쑤욱 되돌아가는 거다.
자신은 기억도 못 한 채.
차라리 몰래 하면 모를까, 지금처 럼 의도가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그런 짓을 하는 건 부원들 입장에선 상당히 실망스러운 행동일 것이다.
“당연히, 제대로 공부하고 있어. 시간을 돌리는 꼼수 같은 건 쓸 생각도 없었는걸.”
“호오. 정말? 그럼 이 문제 좀 한 번 풀어 보시지.”
쓰윽 영어 지문의 한 부분을 가리 키며 건네주는 녀석.
나는 눈으로 대충 훑어보고 답을 말했다.
“3 번이잖아.”
놀라는 경원이.
“정말 공부하고 있었구나. 미안.”
“됐어.”
사실은 이미 3년의 수험 생활을 해 본 덕분에 바로 풀어낸 거지만.
‘그러고 보니, 굳이 시간을 되돌리며 간사한 짓을 할 필요까지는 없으
려나?,
이미 한번 다 배웠고 시험을 쳤던 내용들이다.
물론, 다른 학교에서였지만, 여기 낙성고라고 해서 특별히 시험 문제가 다르지는 않을 터.
심지어 연합고사, 모의고사나 수능 같은 전국 단위의 시험은 확실히 지 난번과 같은 문제가 나올 것이다.
암기만 적당히 해도 평균 이상은 확실하게 보장된 게 지금의 나였다.
안 그래도 시간이 되돌아갈 것도 모른 채 열심히 공부하는 친구들을 지켜보는 것도 고역이었고, 고작 성적을 위해서 자살까지 하는 건 더
심란했던 일.
‘후. 그럼 괜히 잔머리 굴리지 말고 정직하게 공부 좀 해 봐야겠다. 내신이야 항상 좋았으니깐.’
그날 밤, 나는 내 방 책상 앞에 앉아 문제집을 펼쳐 놓고 유튜브를 보고 있었다.
“와, 페이커 피지컬 실화냐? 진짜 세계관최강자들의 싸움이다 ….”
진짜 페이커는 전설이다….
한참을 핸드폰으로 딴짓을 하다가 시계를 보니 어느덧 새벽 1시.
“아, 벌써 1시네… 이제 진짜 폰
끄고 공부해야겠다.”
마지막으로 우리 괴담 동아리의 단 톡방을 확인해 보니 덕훈이가 저녁에 카톡을 남겨놓은 게 보였다.
“흠, 뭐지?”
오덕훈 : [모르는 고양이가 남의 집에 눌어붙는 영상인데 보실?]
그 메시지와 함께 걸려 있는 링크.
“흠... 모르는 고양이가 남의 집 에?”
링크를 클릭하니 유튜브 영상으로 이어졌다.
어느 날 여자가 퇴근 후 집에 들어가는데 모르는 길고양이가 슥 문 이 열릴 때 같이 따라 들어와서는 집에 눌어붙는 영상이었다.
“고양이들은 진짜 이해 불가라니 깐.”
그렇게 한참을 킥킥거리며 남의 집 고양이를 보며 시간을 보내던 중, 시계는 어느덧 새벽 2시.
“와 이제 진짜 끄고 공부해야겠다! 부원들은 다들 잘 공부하고 있으려 나.”
괴담 동아리의 단톡방에 마지막으로 슬쩍 이모티콘을 하나 날려 봤다.
-f ((·、·)) 1
읽음 표시의 숫자가 바로 하나 내려간다.
“오호. 누구지?”
잠시 기다려 봤지만 아무도 답장이 없다.
아마 진희였나 보다.
진희는 평소 단톡방에서 우리가 아 무리 떠들어도 반응이 없었는데, 그 래도 읽음 표시를 보면 읽기는 다 읽는 모양이었다.
“진희 설마 시험 전날에도 알바하고 있는 걸까.”
공부한다고 이 시간까지 깨어 있을 타입은 절대 아닐 거고.
진희가 하고 있다는 패스트푸드점 알바, 설마 야간인 걸까.
그러고 보니 오후에 적당히 하는 거라면 낮에 학교에서 그렇게까지 잘 이유가 없는데.
“미성년자한테 그게 되나?”
[카톡~]
“앗. 누구지?”
-윤선아 : I『,응三丁.、)J
선아였다.
선아도 이 시간까지 깨어 있었다.
“푸훗.”
이어서 경원이도 답장이 올라왔다.
-안경원 : 안 자냐.
-이준 : 시험 공부 중 ㅋ
-윤선아 : If m三广.
-안경원 : 이모티콘 뭔데 ㅋ
-윤선아 : If , 으'V. 시 16우''广. 니
-이준 : I(·【·)] 1(·우-)
J ((· - ·)] ((·【·)]
-윤선아 : If,O三''으.、]J 1八응三、'응느 J 1『,·广 응느 J
-안경원 : 어쩌라고 ㅋㅋ
[카톡~]
-인하윤 : 유球 〉<
“ 헛.”
갑자기 합류한 하윤이의 카톡에 순
간 흠칫했다.
왠지 모르게 이 여자애 앞에서는 항상 긴장하게 된다.
하윤이야 평소에는 조용한 편이다 보니 다른 부원들과는 아무렇지 않게 지내는 것 같지만, 나는 아니다.
-이준 : 먼저 잠 ㅋ 다들 수고
-안경원 : 수고.
-윤선아 : 잘자~
핸드폰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슬슬 자 볼까.’
내일 있을 시험. 졸지 말고 잘 쳐야 한다.
결국엔 마왕의 부활을 저지해야 한 다는 나의 목표.
그걸 이루기 위해선 지금보다 동아리가 훨씬 더 많이 성장해야 하기에, 여기저기 부원들과 쏘다닐 일이 많을 것이다.
성적이라도 잘 받아 둬야 부모님께 간섭도 덜 받고 잘하면 용돈까지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군. 한 달 동안 갑자기 조용했던 건 그래서인가.”
침대에 누워 가만히 생각을 정리하
던 중 갑자기 눈치챘다.
동아리의 성장.
그걸 못 하게 하는 게 목적이구나.
마왕의 입장에선 용사에게 무조건 몬스터를 많이 보내는 것만이 능사 가 아니다.
용사가 오히려 몬스터들을 처치하고 경험치를 획득해 점점 강해질수 록 더 큰 위협으로 다가올 수도 있는 것이다.
확실하게 죽일 수 있는 수단이 없다면, 귀한 병력을 낭비하지 않고, 서서히 나태해지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것도 방법이었다.
어차피 시간은 마왕의 편.
평화에 찌든 용사 파티 따위, 배드 엔딩으로 가는 지름길이니깐.
‘그렇구나. 좋은 게 아니었구나.’
실제로 학기 초의 한 달은 선아, 경원이, 하윤이를 포함한 우리 넷은 정말 몰아치는 괴담들과 싸웠다.
덕분에 아무것도 모르던 때에 비하면 최소한 괴현상이 존재한다는 것과 어떤 식으로 대처해야 할지 정도는 받아들인 상태.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신적으로는 물론이고 실질적으로도 포인트를 얻으며 많이 성장했었다.
하지만 이번 한 달은 아무런 성과 없이 학교생활을 하며 보낸 탓에 많 이 무뎌져 있는 게 사실.
3년 뒤 마왕이 부활하고 세상이 멸망한다는 것에 비하면, 지금 우리가 시험 공부 따위에 애쓰는 건 웃긴 일이었다.
당장 학교를 때려치우고 괴담을 잡 으러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포인트를 모으는 데 힘써도 모자랄 판에.
“괴담 수집력이라는 이상한 능력치가 동아리에 있는 건 그래서구나.”
RPG 게임에서 용사와 마왕의 대립 구도는 디펜스가 아니다.
오히려 오펜스가 주가 되는 것.
용사 파티는 성장을 위해 던전에 쳐들어가거나, 필드에서 잡몹을 잡 으러 돌아다니길 자처하는 게 다 그런 이유기도 하다.
한 달간의 이 평화.
우리에게는 낭비해 버린 시간이었다.
‘괴담 수집력.’
우리 동아리에 붙어 있는 그 괴담 수집력.
이제 슬슬 괴담을 하나 건져와 주면 좋겠지만 감감무소식이다.
아직 레벨이 1이라 쿨타임이 너무
긴 탓일까.
나는 중간고사만 끝나면 ‘모험’을 다시 시작해 봐야겠다는 마음을 먹으며 잠자리에 들었다.
다행히도 사건은 다음 날 바로 터졌다.
괴담 동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