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화
열 번째 괴담 -
마이크래프트의 히로빈 (11)
“들어 봐. 몇십 년 같이 살아온 부모 형제도 돈 때문에 갈라지는 게 현실인데, 세상의 존명을 앞둔 우리 사이에 금전 문제가 끼어들면 뭐가 어떻게 틀어질지 몰라. 물론 그럴 사람은 없다고 생각되지만, 막말로 누가 돈 갖고 나르면 어떻게 해?”
“쩝.”
“예를 들면, 괴담에 빙의한 장화은 선생님이 갑자기 돈을 몽땅 훔쳐서 달아난다거나.”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다.
얼굴에 스타킹을 뒤집어쓴 채 못된 악당처럼 킬킬거리며 돈을 훔쳐 가는 장화은 선생님의 모습이 머릿속에 절로 그려진다.
“당연히 편법 쓰면 미성년자라도 복권 못 할 건 없지. 부모님 통해서 조상님이 꿈에서 번호 가르쳐 줬다며 사보자고 하면 되니깐. 하지만 돈 생겼다고 갑자기 이사 가자고 하시면? 방학에도 활동해야 하는데 가 족끼리 해외여행 가자고 하시면? 말 실수해서 친척들이 돈 달라고 붙어
오면?”
“괜히 욕심부릴 필요 없어. 어차피 괴담을 무찌르는 건 돈이 많다고 되는 일이 아니니깐. 포린세스 때 전 염된 연예인들이 돈이 없어서 당한 게 아니잖아. 올바른 해결책을 찾지 못하면 돈이 산처럼 쌓여 있어도 쓸 모없어. 반나절 넘게 학교에 매여 있는 우리에게 사치 부릴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아쉽다……
서로의 눈치를 보는 부원들.
“네놈도 고민 많이 해 본 모양이 군. 후우.”
덕훈이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는다.
하지만 경원이는 그래도 뭔가 방법 이 있을 거로 생각하는지 나에게 따 진다.
“하지만 부장, 그래도 돈이 있어서 안 좋을 건 없잖아. 머리를 잘 굴려 보면 방법이……
“복권 당첨 괴담 같은 것도 있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녀석.
“복권에 당첨되는 순간, 어디서 어떻게 알았는지 복지단체들이 전화 와서 기부하라고 난리 치고, 조폭들이 문 앞에서 난동을 부린다는 괴담
이야.”
“…아아, 그거.”
경원이가 생각난 듯 고개를 끄덕인다.
“유명한 얘기지. 하지만 그냥 소문인 걸로-”
“우리한테는 아니야.”
나는 제발 이해해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그런 헛소문, 미신, 괴담, 루머. 우리한테는 모두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 한마디로 복권에 당첨된다는 것 자체가 지저분한 일에 얽힐 함정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결국, 경원이마저 이해한다는 듯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십억이 오가는 얘기를 하는데도 딱히 반응이 없는 건 하윤이뿐.
“반드시 돈을 부어야만 해결할 수 있는 사건이 생긴다면 그때 가서 당 첨돼도 좋아. 하지만 당장은 눈앞의 목표에만 집중하자. 마왕이 부활하면 대통령이든 백만장자든 다 끝난 목숨이니깐.”
“알겠어, 부장. 그럼 한 가지 부탁을 좀 해도 될까.”
“뭔데?”
안경을 치켜세우며 날카롭게 눈을 반짝이는 경원이.
“10억 가지고는 요즘 세상에서 아 무것도 못 해. 인당 20억 원.”
다시 한번 깜짝 놀란 얼굴의 부원 들.
“그, 그렇게까지는……
“저기, 좀 무리하는 게……
말을 더듬는 덕훈이와 선아.
하지만 나는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딜. 아니다, X발 그냥 인당 두 배로 시원하게 40억 원씩 가자.”
“40억 원?”
입을 쩌억 벌리는 부원들.
“그럼 다 합쳐서… 7명이니깐 280 억 원? 괜찮은 거야, 준아……?”
“가능할 거야. 복권에 비트코인에 주식에, 우리가 대한민국 눈먼 돈 다 쓸어 먹으면 돼. 물론, 엔딩 보고 나면 능력이 사라질지도 모르니 3학년 겨울방학부터 미리 준비해 놓는 걸로.”
“오케이이이이이이이!”
경원이가 ‘바로 이거지’,라는 듯 침을 튀기며 안경을 붙잡는다.
“그거라면야 얼마든지 열심히 할 수 있지! 조금 전에는 찌질한 모습 보여서 미안했어, 다들. 사과할게.
용서해 줄 수 있을-”
“오이, 너.”
덕훈이가 말을 끊더니, 경원이의 어깨에 묵직하게 손을 올렸다.
“이미 했다.”
그 말에 흠칫 떨더니, 그대로 고개를 푹 숙이는 경원이.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믿어 준 친구들에게… 나는……
“등을 돌려라, 좆경.” 덕훈이가 묵직하게 대사를 친다.
“남자가 울어도 되는 것은, 모든 것이 끝났을 때다.”
“피, 바보 누가 운다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경원이가 눈가를 훔치며 뒤돌아섰다.
“힘내라, 카카로트. 네가 No.1이다!”
“다들 나를 믿어 주었는데… 나는 대체….”
“용서해라, 사스케. 이게 마지막이다….“
지나치게 감성적으로 돼 버린 경원이와 틈을 타서 평소 뱉고 싶었던 애니 명대사를 아무렇게나 외치는 덕훈이.
이내 선아가 경멸하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로 걸어온다.
선아도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구 나.
“진희 언제 온대……?”
“몰라. 그냥 빨리 왔으면 좋겠다.” 오늘따라 사무치게 그리운 그 이름, 담당일진 이진희.
잠시 후.
다시 1층 거실에 모인 우리.
돈 얘기도 나누고, 지금부터 어떻게 할 건지 간단히 의견을 주고받다가 잠시 소강상태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조금 어두워진 바깥.
조용히 장작불이 타는 소리만 들려 온다.
“생각해 봤는데 말야.”
경원이가 가만히 불길을 쬐다가 입을 열었다.
“아까 도망치던 가짜 중, 진희는 없었지?”
나는 곰곰이 기억을 떠올려 본 후 대답해 주었다.
“응. 없었어.”
“ 역시.”
곧 생각이 정리되었는지 설명을 시작하는 녀석.
“아무래도 이 파 월드(Far World), 세상의 끝 너머에서는 무언가 끊임 없이 자기복제가 이루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흠.”
역시 그런가.
우리가 지은 것과 똑같은 집.
가짜 선아.
복제된 괴담 동아리.
“아까의 무리 중에 진희가 없었던 이유는 이 게임 속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복사 붙여넣기? 우리는 사람인 데‘?”
“게임 속 NPC 취급이니깐. 뭐, 복 제된 우릴 보니 제대로 사고를 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하지만 누가 왜 그런 짓을……
그러자 덕훈이가 부지깽이로 장작을 뒤집으며 대신 대답해 주었다.
“누군가 일부러 하고 있다는 느낌은 아니다.”
“그럼?”
그대로 장작을 몇 번 뒤엎고는 한 숨을 푹 내쉰다.
“아아, 설명하려면 또 길어질 것 같은데. 어쩔 수 없나.”
“괜찮아. 남는 게 시간인걸.”
“쇼가나이나. 그럼 잠시 내 의견을 얘기하겠다.”
부지깽이를 놓고는 우리를 바라보며 앉는 덕훈이.
“혹시 로그라이크 (Roguelike)라는
단어 아는 사람.”
“···로그라이크?”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처음 듣는 단어다.
뒤를 돌아보니 선아와 하윤이도 모르는 눈치.
“미안, 처음 들어 봐.”
그러자 경원이가 아는 단어였는지 대신 설명해 줬다.
“게임의 종류에 대한 단어다, 부장. 액션, 어드벤쳐, 레이싱이라는 단어처럼 ‘로그라이크’라는 장르가 게임에는 존재해.”
“흠. 경원이 너는 게임은 안 하는 줄 알았는데.”
“안 해. 나무위키에서 본 거야.”
그렇군.
“그래서 뭐 어떤 장르인 건데? 이 름만 들어서는 감이 안 오는데.”
“흐음. 알기 쉽게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무작위로 생성되는 던전을 탐험하는 게임’을 로그라이크 장르라고 불러.”
이어서 덕훈이가 설명해 준 로그라 이크의 공통되는 개념은 아래와 같았다.
용사가 마왕이 잠들어 있는 땅의 1층에서부터 모험을 시작한다.
그리고 한 층, 한 층 지하를 향해 나아간다.
아래층으로 내려갈 때마다 용사를 덮쳐 오는 몬스터와 함정, 무수한 위협.
배가 고프면 음식을 먹어야 하고, 죽으면 1층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극악의 난이도.
심지어 그렇게 다시 시작할 경우에는 완전히 배치가 달라지는 던전의 구조와 요소.
게다가 전에 죽은 용사 캐릭터의 영혼이 나타나서 이번 회차의 용사를 괴롭히기도 한다.
그렇게 갖가지 위험을 뚫으며 가장 아래층의 마왕을 죽이러 내려가는 게 바로 로그라이크라는 장르가 공 유하는 특징.
“···이 정도. 온라인 게임밖에 안 해 본 부장이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 해 봤어.”
“응. 알아들었어. 근데 그게 지금의 상황과 어떤 관련이 있는 거야?”
“그건 이 마이크래프트라는 게임과 로그라이크라는 장르의 몇 가지 공 통된 요소랄까… 거기서 떠올려 본 건데. 전혀 다른 부류처럼 생각되지만 공유하는 특징이 있다고.”
가만히 설명만 하기 심심했는지 부 지깽이를 다시 들어 의미 없이 장작 불을 뒤적거리는 덕훈이.
“공통된 요소?”
“아아, 짐작해 보겠는가?”
“글쎄.”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전혀 모르겠다.
그 로그라이크라는 게임.
설명을 들어 보니 지하던전을 탐험 하는 RPG 같고, 우리가 하는 마이크래프트는 뭐랄까… 건축시뮬레이션 게임? 같은 거니깐.
전혀 다른 거 아닌가?
“잘 모르겠는데. 서로 완전히 다른 장르라 공통된 요소 같은 건 없다고 생각되는데……
뭐, 키보드나 마우스로 플레이하는 정도가 공통된 요소려나.
“부장, 일단 덕훈이 대신 내가 몇 가지 떠오르는 걸 말해 보자면….”
경원이가 곰곰이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설명을 늘어놓는다.
“로그라이크와 마이크래프트의 유사성. 이것저것 상호작용할 수 있는 자유도, 고전 그래픽을 일부러 지향 한다는 점, 자원을 관리해야 한다는 점, 음식을 먹어야 하는 생존 요소 가 있다는 정도인가.”
“잘 아네.”
“하지만 이 많은 요소 중에 어떤 요소를 들어서 이야기를 하려는지는 나도 감이 안 오는데.”
“아아, 좆경. 하나 빼먹었지 않나. 다 설명해 놓고는.”
장작을 쑤시면서 기분 나쁘게 웃는 덕훈이.
“로그라이크 장르의 핵심, 무작위로 생성되는 던전.”
“아하.”
그 말에 경원이가 알아챈 듯 따라서 씨익 웃는다.
아직 이해를 못 한 나는 결국 신발을 휙 덕훈이의 등으로 집어 던졌다.
퍽.
“쿳소.” “여기 살면서 게임이라곤 전혀 안 해 본 선아까지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설명해 봐.”
“좋다. 잘 듣도록.”
목청을 가다듬는 덕훈이.
“로그라이크 장르의 핵심, 무작위로 생성되는 던전. 프로그래머들은 ‘절차적 레벨 생성’이라고 부르는 시스템인데, 매번 게임을 새로 시작 할 때마다 던전의 구조가 완전히 랜 덤하게 다시 만들어지는 거야.”
“어. 여기까지는 이해.”
“즉, 제작자들은 게임이 작동하는 기본 원리들만 코딩해 놓았을 뿐, 맵의 구조나 아이템, NPC들은 컴퓨 터가 알아서 랜덤으로 만든다는 거야.”
아직은 어려울 것 없는 내용.
대충 일반 RPG 게임처럼 정해진 맵이 있는게 아니라, 게임을 시작하면 프로그램이 알아서 맵을 랜덤으로 생성한다는 뜻인 것 같다.
“그럼 이제 우리가 하는 이 마이크 래프트 얘기로 돌아와서. 처음에 세 상의 끝을 찾으러 나설 때, 텔레포트 치트를 썻잖아. 그 이유 기억나 냐능?”
“그러니깐……
왜 텔레포트를 썼더라.
곰곰이 기억을 떠올려 본 나는 곧 대답했다.
“걸어서 맵의 끝까지 가는 건 시간 이 엄청 많이 걸려서였잖아. 80시간 정도?”
“아아, 그렇다. 그 말인즉슨, 이 월 드맵이 어마어마하게 넓다는 뜻이지.”
“···그렇지.”
“그럼 그 커다란 맵, 제작자들이 일일이 손으로 다 만들어 놓은 걸 까?”
잠시 생각해 보았는데, 짧은 지식이지만 왠지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닐 것 같아.”
“이유는?”
“음... 너무 비효율적이라고 생각 돼.”
“정답.”
덕훈이가 부지깽이를 놓고 우리쪽을 천천히 돌아본다.
“이 게임, 마이크래프트 역시 ‘절 차적 레벨 생성’이라는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다고. 처음에 게임 켰을 때 부장이 구덩이에 빠쳤었잖아. 그 래서 월드맵을 새로 만들었었고.”
“···응. 기억나.”
“그때의 월드맵과 지금의 맵은 서로 다른 거야. 알겠어?”
양반다리 자세로 바꾸는 녀석.
“로그라이크에서 매 플레이마다 던전을 새로 만들듯이, 이 게임 역시 플레이를 새로 시작할 때마다 월드 맵을 랜덤으로 생성해. 왜냐? 그 넓은 맵을 사람이 일일이 만드는 건 비효율적인 것도 있고, 게임의 컨셉 자체가 건축과 탐사가 목적이다 보니 유저들 역시 매번 새롭게 달라지는 경험을 원하거든.”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지금의 맵을 새로 생성해서 플레이했을 때 물에 빠진 채로 게임이 시작됐던 게 기억난다.
제작자가 공들여서 만든 맵이라면 그렇게 엉뚱한 위치에서 게임이 시작될 리는 없을 터.
‘컴퓨터가 랜덤으로 만들어서 그랬구나.’
“알겠나, 이준? 처음에 안경이 설 명한 세 가지 괴담, 통으로 이어져 있는 거였다고.”
자신의 허벅지를 두드리며 결론을 얘기하는 녀석.
“세상의 끝, 파 월드(Far World)란 건 결국 게임의 바깥. 프로그래머들이 직접 제작해 놓지 않은 영역. 하지만 그곳에도 여전히 맵이 존재하고 게임은 돌아간다. 무엇으로 돌아 가는가?”
경원이가 끄덕이며 이어서 대답한다.
“컴퓨터의 ‘난수 생성’으로.”
“난수 생성?”
“아까 설명한 절차적 레벨 생성, 랜덤 요소와 같은 의미야.”
덕훈이가 정답이라는 듯 고개를 끄 덕였다.
진지한 눈빛.
나도 심각한 표정으로 덕훈이를 바라봤다.
끄덕.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는 덕훈 이.
우리 사이에 침묵이 흐른다.
어느새 어두워진 바깥.
장작불이 타는 소리만 들린다.
끄덕.
덕훈이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인다.
만족스런 표정.
“·..끝?”
“다 한거야?”
“아아, 아타리마에. 다 했다.” 다시 만족스러운 미소로 고개를 끄 덕이다가 순간 흠칫하는 녀석.
“네놈들, 설마… 이해 못 한 거 냐?”
“어.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어.”
“ 후우······
덕훈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그러니깐 절차적-”
“됐어, 고생했어. 고마워 덕훈아. 자, 이제 경원이가 설명하자.”
나는 말을 끊고 수고했다는 의미에 서 녀석의 두터운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현명한 선택이다, 부장.” 곧 경원이가 동아리에서 맡은 자신의 지분에 만족했는지, 씨익 웃으며 안경을 반짝인다.
“그러니깐, 사람이 만들어 놓은 창 작물 바깥에는 무엇이 있냐 하는 문 제다.”
전문 설명충인 안경원이라면 이제부터 이해시켜 줄 거라는 기대감 때 문인지, 부원들이 몸을 기울이며 아 까보다 좀 더 집중해서 듣는다.
괴담 동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