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화
열 번째 괴담 -
마이크래프트의 히로빈 (13)
이게 무엇을 뜻하는 건지 알 수 없어 잠시 정적이 감돌았고.
누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링반데룽 현상이야, 부장.”
진흙탕을 헤치고 오느라 체력 소모 가 심했는지, 힘들게 숨을 몰아쉬면서 간신히 알려 주는 안경원.
“등산 용어인데, 야간이나 악천후의 상황에서 직선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원을 그리며 같은 곳을 돌고 있는 현상을 뜻해.”
“원을 그리며 돈다고.”
나는 입술을 깨물며 눈을 감고 말았다.
히로빈 괴담.
분명히 그 흔적들을 찾으려고 돌다 보니 원을 그리게 되었고, 제자리로 돌아왔다는 내용이었던가.
지옥에 왔습니다
“우… 우리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고?”
덕훈이가 허둥지둥하며 말했다.
“그렇게 열심히 걸었는데!”
“아니면, 이곳이 또 다른 복제된 집일 수도 있는 거고.”
이마에 손을 얹으며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경원이.
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어느 쪽이든 간에 우리가 길을 잃었다는 건 분명해.”
“어, 어떡하지, 준아 ?”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는 선아.
나는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게임 속 세상에 갇힌 상태.
유일하게 우리를 꺼내 줄 수 있는 건 진희.
하지만 현실과 시간이 다르게 흘러 가는 탓에 언제 올 수 있을지 모른다.
심지어 밖에서 접속을 종료해 준다고 하더라도, 비정상적인 공간에서 게임을 끄면 어떤 영향이 생길지 모르는 상황.
다시 월드맵 안으로 들어가서 안전하게 로그아웃을 해야 하는데, 우리는 지금 길을 잃은 상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우리는 방금 자신도 모르는 사이 히로빈 괴담의 조건을 충족시켜 버렸다.
지금부터 뭔가 일어난다.
모든 게 엮이고 얽혀서, 가장 안 좋은 방향으로.
“결정했어. 자살하고 시간을 되돌아갈 거야.”
“잠시만! 잠시만, 부장!”
내 결심에 경원이가 급히 걸어오더니 어깨에 손을 올렸다.
“다시 생각해 봐. 죽는다고 돌아간 다는 보장은 없어.”
“.··왜?”
“지금 우리는 현실의 피시방에서 어떤 상태인지 모르잖아.”
다급한 표정으로 설명을 늘어놓는 녀석.
“어쩌다 보니 게임 안에 들어와 있기는 하지만, 정말 몸뚱이까지 통째로 이동한 건지, 아니면 정신만 게임 안에 들어온 건지……
“···그건 그렇지.”
“만약에 말야, 부장.”
식은땀 한 줄기를 흘리며 안경을 치켜세운다.
“몸은 현실에 있고, 정신만 게임
안에 들어온 거라면?”
« 우W
“이곳에서 죽었을 때 몸이 죽는 게 아닌, 정신만 죽는 거라 현실의 우리가 식물인간이 되는 거라면?”
“들어 봐. 이 불법 버전을 플레이 한 사람 중에는 미쳐 버린 사람이 많았다고 하잖아. 그게 바로 게임 안에서 죽어 버린 결과라면? 그 상태를 시스템이 죽은 거라고 인정하고 시간을 되돌려 줄까?”
이마에 흘러내리는 빗물에 젖은 땀.
이내 경원이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걸 닦더니 마저 설명했다.
“지금까지 부장이 죽어본 건 확실하게 어디 사지가 잘리거나, 육체적인 타격을 입었을 때뿐이잖아. 과연 정신이 죽어 버린 뇌사 상태도 회귀 가 가능하냐는 거야.”
나는 큭 하는 신음을 내며 주먹을 꽉 쥐는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생각해 볼 문제였다.
“어쩌면 우리 모두 식물인간이 된 상태로 3년을 보내다가, 그대로 마왕이 부활하고… 다시 입학식으로 돌아가 버릴지도……
“젠장!”
나는 피로 적힌 거실벽을 쾅 내리 쳤다.
저 밑 어디선가부터 찌르는 듯한 감정이 느껴져 온다.
두려움. 죄책감. 공포.
위기였다.
죽어도 돌아갈 수 없다는, 처음으로 겪어 보는 위기.
가벼운 마음으로 발을 들였는데.
진흙탕의 함정에 빠져 올라올 수 없는 기분.
“후우, 후우.”
나는 그대로 이마를 부여잡은 채 고개를 저으며 다른 손으로 벽을 짚었다.
서서히 마음속이 절망으로 물든다.
어떤, 아주 높은 벽을 마주한 기분.
어떻게든 빠져나갈 방법이 있을 줄 알았는데.
안 되더라도 죽어 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다고……?
일이 이렇게 된다고……? 뭐 이런. 뭐 이런 게 다 있어.
“저기······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에게 다가오는 부원들.
나는 손을 내밀어 안 그래도 된다고 말렸다.
“나는 괜찮아, 나는……
“준아……
“미안해, 얘들아.”
녀석들을 볼 면목이 없어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그냥 될 줄 알았어. 부딪쳐 보면… 지금까지처럼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기회는 또 있다고… 계속 몇 번이라도 할수있는 줄 착각했는데
“그런데 미안해. 이런 곳에 끌어들여서... 이런 상황에......
“준아……
슬픈 표정으로 다가오는 선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내 옆에 와서는 말없이 팔을 감싸 준다.
“잠시만.”
하윤이가 거실의 하나뿐인 창문을 보며 고갯짓을 했다.
“누군가 있어.”
벌써 온 건가.
무거운 분위기 속에 있던 부원들이 창문을 쳐다본다.
선아 역시 긴장한 표정으로 돌아봤고.
내 팔을 쥐고 있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진다.
창문 너머, 어두운 평야.
몰아치는 폭풍우 날씨.
사납게 휘몰아치는 빗속 사이로, 순간 번개가 번쩍거리더니.
쿠궁- 쿠구궁.
그 속에서 뭔가 꿈틀거리는 실루엣 이 보인다.
작은 언덕같이 보이는 뭔가가 꿈틀 거리기도 하고, 세로로 빌딩 높이까지 길쭉하게 솟아난 지네 같은 게 휘청거리기도 한다.
“···좋지 않아.”
“젠장.”
이윽고 번개가 멈추자 다시 어둠뿐인 평야.
하지만 그 너머로 분명히 뭔가 커 다란 것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쪽을 쳐다보면서.
“… 크윽.”
탁- 탁- 탁- 탁-
이내 저 멀리서부터 비를 뜷고 누 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재빨리 무기를 챙기는 우리.
“오이, 부장! 네놈도 안경원처럼 여기까지 와서 약한 소리 하는 거 냐!”
덕훈이가 식은땀을 흘리며 부지깽 이를 두 손으로 단단히 잡아 쥔다.
“정신 단단히 붙들라고! 일단 해 볼 수밖에 없잖아!”
“마, 맞아……!”
덜덜 떨던 경원이도 그 말을 듣더니 철근을 손에 꽉 쥔다.
“버티자, 어떻게든! 진희가 올 때까지!” 하윤이 역시 긴장한 표정으로 말없이 석궁을 들어 올려 창문을 향해 경계 태세를 취했다.
선아가 낙심한 나를 돌아보며 눈을 마주치더니, 가만히 귓가에 속삭여 줬다.
“준아. 내가 지켜 줄게. 걱정 마.”
'충' · 충'. 충'. 층'. '충'. 충'. 충'.
말이 끝나자마자 육중하게 땅을 울리며 멀리서부터 달려오는 누군가.
“···온다!”
쿵, 쿵, 쿵, 쿵, 쿵-
그대로 밖에서부터 전력 질주로 쿵 쿵거리며 달려오던 무언가는 관성 그대로 힘껏 점프해서 창문으로 날 아들었다.
와장창-!
[닝겐노 유리와 튼튼데스네에에에
에에에에에에엑!!!!!!] 유리창의 파편 조각이 사방으로 휘 날리며 비바람이 거실 안으로 몰아 쳐 들어왔다.
쿠당탕-
그대로 유리조각과 함께 바닥에 나 뒹구는 가짜 덕훈이.
“때려! 때려!”
“크윽!”
놈이 일어설 틈도 없이 각자 들고 있던 흉기를 힘차게 내리쳐서 두들 겨 팼다.
퍽- 퍽 -
부원들이 놈을 후려 팰 때마다 사방으로 터져 오르는 빗물과 진흙먼
지.
[센빠이 기모찌 우마이 카와이데스 네에에에에엑!!!!!!!!!]
“크윽!”
바닥에서 처맞으며 버둥거리던 가 짜 오덕훈은, 순간 한 손으로 경원이가 내려친 철근을 붙잡더니.
다른 손으로는 선아가 내려친 각목을 붙잡았다.
다시 세 번재 손을 쭉 뻗어 발길 질을 하던 하윤이의 발목을 잡아 넘어트리더니, 마지막 손으로 중심을 잡고 일어서려는 녀석.
팔이 네 개 달려 있었다.
“노옴! 감히 나를 흉내 내다니!”
다른 부원들이 제압당한 人}이, 분 노한 진짜 덕훈이가 부지깽이로 놈을 마구 내려쳤다.
퍽- 퍽- 퍽- 퍽- 퍽 -
“네가 나에 대해 나니오 와캇떼룬 다!!”
[젠부다요! 숯-]
“뭣이이이!!”
0.15톤에 육박하는 살집을 지탱하던 괴력에 힘을 실어 더 힘차게 분 신을 패는 오덕훈.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릴 놈이로고 오오오오오!!”
퍽- 퍽_ 퍽- 퍽- 퍽_
그대로 육중한 파오후의 근력을 담아서 있는 힘껏 두 번, 세 번 머리에 내려치자.
바퀴벌레처럼 네 개의 팔을 버둥거리던 놈은 움직임을 멈추고 축 늘어 졌다.
“후욱, 후욱, 후욱.”
“허억, 허억.”
[준아.] 숨 돌릴 틈도 없이, 창문 너머에 서 있는 누군가 또 우리를 부른다.
서둘러 무기를 쥔 채 급하게 몸을 돌리는 부원들.
[나는 너희가 상상도 하지 못할 곳을 다녀왔어. 지옥은 그저 단어일 뿐이야.]
한창 덕훈이를 제압하느라 정신없던 사이에 조용히 도착해서 지켜보고 있었는지.
창문 너머에서 비를 맞으며 웃고 있는 또 다른 인하윤.
[경적 소리가 들리니?]
투캉-!
순간, 우리 쪽 하윤이가 발사한 석 궁이 경쾌한 금속음을 냈다.
화살은 그대로 거실을 가로질러 날 아가, 가짜 하윤이의 이마에 꽂혔다.
퍼벅-
놈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그대로 빗속으로 쓰러져 버렸다.
“후우, 후우.”
“허억, 허억.”
숨을 돌리는 우리 부원들.
철퍽. 철퍽. 철퍽.
다시 들려오는 진흙을 헤치고 달려 오는 소리.
우리는 입구 쪽으로 몸을 틀었다.
경첩이 뜯겨진 현관 나무문, 빗속을 뚫고 누군가 저 멀리서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다.
철퍽. 철퍽. 철퍽.
“준비해! 준비……
하지만 경원이의 외침이 허무하게 도, 전력 질주해서 달려오던 뭔가는 방향을 휙 틀었다.
그리고 바깥의 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갔다.
쿵쿵쿵.
진흙을 터는 모양인지 천장에서 시 끄럽게 울려 퍼지는 발구르는 소리.
“젠장, 2층에서 기회를 엿볼 셈인 가……
“온다! 한 놈 더!”
덕훈이의 외침에 다시 고개를 돌려
창문을 보니, 저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
쿠궁- 쿠구궁-
마침 번쩍이며 하늘을 밝히는 커다 란 번개.
저 멀리 초원 한복판에 꽂혀 스파 크와 불똥을 튀겼다.
그리고 동시에 보이는 수많은 인영.
한두 명이 아니다.
“준비해.”
덕훈이가 이를 꽉 깨물며 자세를 잡았다.
나 역시 허리춤에 찬 손도끼를 뽑 아 들고는 두 손으로 꽉 쥐었다.
후우, 후우.
“살아나간다. 반드시 살아나간다!” 요동치는 심장을 외면하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준아준아준아…….]
[부장부장부장……』
온다.
괴담 동아리가 온다.
괴담 동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