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열한 번째 괴담 -
아무도 기억 못 하는 친구 (12)
뭐지.
눈앞의 메시지를 자세히 보려고 고개를 내민 순간.
나는 그 자세 그대로 힘없이 우리 앞의 테이블로 풀썩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 간신히 두 팔을 뻗어 쓰러지려는 몸을 지탱해, 찻잔에 얼굴을 처박는 건 면했지만.
왠지 허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뭐, 뭐지……
그대로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간신히 입을 열어 친구들을 불러 봤다.
“···얘, 얘들아.”
아까부터 왠지 모르게 조용하던 부원들.
내가 이렇게 기행을 하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다.
“…얘들아?”
“하아, 하아.”
왠지 모르게 급격히 몰려오는 나른 함.
뇌 속 저 깊은 곳에서부터 이성을 담당하는 부분이 딱딱하게 굳어 가며 마비돼 가는 듯한 기분.
눈을 감았다가는 그대로 의식을 놓아 버릴 것 같은 느낌을 이겨 내며 간신히 허리를 세웠다.
“하아, 하아.”
목 부분부터 척추까지 뻣뻣하게 힘 이 들어가지 않아, 엉덩이 쪽의 근육을 움직여 휘청거리며 소파에 기 대는 나.
추욱 등을 기대는 관성 그대로 고개가 확 소파 너머로 힘없이 젖혀진다.
“하아, 하아.”
정신을 차리려 온몸을 부들부들 떤다.
마치 수업 때 필사적으로 몰려오는 졸음을 이겨 낼 때의 느낌.
다리도 떨어 보고, 머리도 흔들어 보고.
온갖 수를 다 써 봤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의식이 순간순간 날아갈 때의 기분.
지금 누가 나를 재워 준다면 내 모든 걸 가져가도 좋아.
그런 감정들을 간신히 이겨 낸 나는 힘겹게 골반을 뒤틀어 바로 옆의 선아에게로 몸을 돌렸다.
“선아야……! 선아야……?”
이런 상황에서 나를 지켜 줄 수 있는 건 선아뿐.
하지만 선아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초점 없이 눈을 뜨고 있을 뿐이었다.
“서, 선아야……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기에 어깨로 툭툭 쳐 봤지만, 반응이 없다.
“···얘들아?”
다른 자리의 부원들도 마찬가지다.
소파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는 진희, 허공을 보며 침을 흘리는 경원이.
반대로 몸을 뒤틀어 시야 구석의 하윤이와 덕훈이를 살펴보았지만, 역시 둘 다 눈을 감고 있었다.
“후우, 후우.” “누, 누구 깨어 있는 사람……
의식을 놓아 버리지 않도록 호흡을 빠르게 해 가며 급히 심박수를 올려 보려는 순간.
복도 쪽에서부터 누군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저벅저벅.
저벅저벅.
드르륵-
문이 열리고 단아하게 두 손을 모은 채, 이쪽을 쳐다보시는 상담 선생님.
늘어져 있는 우리를 쭉 훑어보시고는 피식 웃으신다.
“잠 와?”
순간, 내 바로 옆에서 움찔하는 기 척이 느껴지더니, 선아가 덜덜 떨며 일어선다.
주머니에서 분홍색 커터칼을 꺼내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가락을 억지로 비틀어 올려 날을 세우는 선아.
타. 타. 탁.
그대로 한 걸음, 한 걸음 비틀거리며 상담 선생님에게 다가간다.
드르륵.
탁 _
상담실의 문을 닫고는, 덜덜 떨며 다가오는 선아를 느긋하게 쳐다보는 청초한 얼굴의 류진아 선생님.
이내 비틀거리며 다가온 선아는 커 터칼을 쥔 채 한참을 말없이 떨며 서 있는다.
거기까지 가는 게 고작이었는지, 부들부들 떨고만 있는 뒷모습.
그런 선아를 가만히 바라보던 선생님은 곧 싱긋 웃으시더니, 매끈한 손가락을 튕겨 선아의 이마에 가볍 게 딱밤을 때리셨다.
털썩-
그걸로 의식이 다했는지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는 선아.
분홍색 커터칼이 마룻바닥에 떨어 지며 경쾌한 플라스틱음을 낸다.
“그걸 다 마시고도 걷기까지 하다 니, 정신력이 강한 꼬마네.”
말없이 선생님의 발아래 엎드려 움찔거리는 선아.
이내 선생님은 선아를 지나쳐 우리에게 걸어왔고, 소파에서 넋을 잃고 앉아 있는 나머지 다섯 명을 여유롭 게 둘러보신다.
“졸려도 아직 자면 안 돼. 물어볼 게 많거든.”
몽롱한 의식 속에서 마치 여신의 음성처럼 들려오는 상담 선생님의 속삭임.
“누가 먼저 설명할래?”
선 채로 턱을 괴고는 여유롭게 우리를 내려다보신다.
“저기 똑똑해 보이는 안경 쓴 친구가 해 볼까?”
그대로 테이블을 빙 돌아오셔서는, 원래는 선아의 자리였던 나와 경원이의 사이에 사뿐히 앉으시는 선생님.
순간 은은하게 풍겨 오는 몽롱한 체취에 다시 의식이 어딘가로 날아가 버릴 것만 같다.
“말해 봐. 왜 은정이를 찾는 건지.”
멍하니 침을 흘리고 있는 경원이의 귓가에 천사처럼 속삭이시는 선생님.
“선생님이 다 들어줄게.”
이내 쓰러지려는 경원이의 얼굴을 자기 쪽으로 끌어안고는 얼굴을 맞 대신다.
그러자 천천히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하는 안경원.
“…진희가 얘기를 꺼내고 갑자기 은정이가 나타났다고? ··♦괴담? 후 훗.”
유치원 어린이를 다루듯 경원이의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설명을 유도하시는 선생님.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구나. 많 이 힘들었겠네. 오늘 하루 종일. 그 래… 그래. 괜찮아.”
품으로 파고드는 경원이를 꼬옥 끌 어안으셔서는 천천히 등을 토닥이신다.
“자장… 자장……
그 나른한 음성에 옆에 앉아 있던 나마저 현혹되려던 찰나.
아직 간신히 힘이 들어가는 골반 쪽을 움직여 비틀면서 정신을 유지 하려 애썼다.
툭- 툭-
허리를 돌리고 계시는 선생님의 엉 덩이와 계속해서 맞부딪히는 나의 골반.
결국, 선생님께서 경원이를 재우다 말고 이쪽을 돌아보시더니.
꿈틀거리며 엉덩이를 치는 나를 보
고 눈을 가늘게 뜨며 웃으셨다.
“보채지 마, 준아. 너도 나중에 상담해 줄 테니.”
어째서인지 내 이름을 알고 있는 진희의 초등학교 상담 선생님.
물론, 교복 위에 명찰이 붙어 있기는 하지만.
여태껏 저 사람이 날 자세히 살펴 본 기색은 없었다.
곧 분홍빛 입꼬리를 올리시며 가소 롭다는 듯 미소 지은 채 나를 흘겨 보시는 류진아 선생님.
“선생님한테 모든 걸 다 털어놓게 될 거야. 너의 가장 소중한… 아주 깊은 비밀 이야기까지.”
그대로 골반을 홱 비틀어서 나는 테이블과 소파 사이의 좁은 공간에 쓰러져 버렸다.
쿠당탕-
“후훗.”
쓰러지며 허리에 부딪혀 몸 위로 쏟아지는 과자와 음료수들.
그리고 눈앞에는 축 늘어져 있는 덕훈이와 하윤이의 다리.
선생님은 그런 나를 우습다는 듯 내려보시고는, 다시 다른 부원들에 게로 시선을 돌리셨다.
나는 마룻바닥에 얼굴을 처박으며 코가 부러진 것 같았지만, 약 기운에 의식이 몽롱한 탓인지 간지럽지 도 않았다.
‘하아, 하아.’
그대로 바닥에 뺨을 붙인 채 지렁 이처럼 버둥거리며 입구의 선아한테 기어가는 나.
뒤에서는 계속해서 다른 부원들의 정신을 농락하는 선생님의 상냥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그랬어? 은정이랑 어릴 때 게임 친구였구나. 지금은? ···몰라?”
이어서 덕훈이의 허벅지 위에 다소 곳이 앉으셔서는 귓가를 간지럽히시는 선생님.
그사이에 나는 기어코 선아에게로 도착해서 떨어트린 커터칼을 손가락 사이에 끼워 넣었다.
“휴, 다 끝났어.”
선생님께서 일어서서 이쪽으로 걸 어오신다.
“드디어 준이 네 차례야.”
버둥거리며 엎드려 있는 내 앞으로 다가오시더니, 무릎을 숙이시고는 귓가에 속삭이신다.
“사실은 기대하고 있는 거지? 선생님이랑 상담하는 거.”
이내 상냥한 손길로 나를 뒤집으셔 서는 천장을 바라보도록 눕히신다.
“세상에! 코피 나잖니.”
바닥에 얼굴을 박고 꿈틀거리느라 엉망이 된 내 얼굴.
선생님의 무쌍커풀 단아한 눈매가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대로 무릎을 쭈그리시고는 내 머리를 들어 올리시더니, 무릎 베개를 해 주시는 선생님.
가만히 머리를 쓰다듬어 주신다.
“얌전히 있지, 왜 그랬어.”
아아.
정말 천사 같은 분이다.
내 모든 걸 털어놓고 싶을 정도로.
스윽- 스윽-
선생님의 섬세하고 가느다란 손가 락이 내 인중을 누르시더니, 쓰윽 흘러나온 코피를 닦아 주신다.
그리고 황홀한 표정으로 넋을 잃고 쳐다보는 나를 눈치채시고는 피식 웃으시는 선생님.
“준비가 됐나 보네.”
입을 헤 벌린 채 고개를 끄덕이는 나.
“좋아. 일으켜 세워 줄게.”
그대로 내 상반신을 끌어안아서 앉은 자세로 만들어 주셨다.
하지만 온몸에 힘이 빠져 버린 탓에 스스로 서 있지 못하고, 이내 선생님의 품속으로 축 늘어져 버리고 마는 내 얼굴.
“어리광쟁이구나. 초등학생 애들도 안 이러는데.”
선생님께서 그런 나를 꼭 끌어안아 주시며 속삭이신다.
“집회 때마다 말이 많아서 꼭 한번 만나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엮이게 됐네.”
“좀 더 가까이 와 봐.”
“네…… 마치 엄마 품에 안긴 아기처럼 넋을 잃고 옷감에 얼굴을 비비는 나.
“방금 누구랑 통화하고 왔는지 알 아‘?”
선생님께서 나른한 목소리로 내 정신을 제압하신다.
“너희 학교 교감 선생님.”
후훗, 하고 웃으시는 선생님.
“우리 쪽 재단의 대안학교로 보냈다가 죽은 아이에 대해서 낙성고 학생들이 몰려와 캐묻고 있다고 말해 주니깐, 바로 혹시 괴담 동아리냐고 묻더라.”
천천히 내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성모처럼 속삭이신다.
“그래서 집회 때 사진으로 본 이준이라는 아이가 섞여 있다고 하니, 게네라면 아마 다 눈치채고 간 것 같다고 일단 잡아 놓고 있으래. 교단 쪽에서 사람을 보내겠다고.”
“정말 다행이었지 뭐야. 선생님은 이미 네가 와서 은정이에 대해 물을 때부터 약을 타 놓고 있었거든.”
웃음소리로 귓가를 간지럽히시는 류진아 선생님.
자연스레 헤벌쭉 올라가는 내 입꼬 리.
“역시 인생은 미리 준비하는 사람 거야. 그렇지 않니?”
나는 꿈속을 헤매는 기분으로 격하게 동의한다는 듯 선생님의 품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 사람이 하는 말이라면 뭐든지 받아들이고 따를 준비가 이미 돼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거니, 너?”
빨간 입술을 귓가에 밀어 넣으시고는 은밀하게 소곤거리시는 선생님.
“괴담 동아리 같은 거. 왜 만들려고 한 거야?”
“그게요오……
“선생님한테만 말해 봐. 아무한테 도 말 안 할게.”
완전히 항복해서는 넋을 잃고 모든 걸 일러바치려던 그 순간.
엎드려 누워 있던 선아가 숨이 안 쉬어져서인지 갑자기 버둥거리며 발작을 시작했다.
그대로 내 등을 퍽 차는 선아의 발길질.
퍼어억-
순간, 잠시 의식이 깬 나는 최대한 정신을 집중해 지금껏 손가락 사이에 끼워 놓고 있던 선아의 커터칼을 어깨 관절을 돌려 있는 힘껏 소파의 하윤이에게로 던졌다.
탁“
뺨에 커터칼이 툭 부딪치자 반사적으로 눈썹을 찌푸리는 하윤이.
‘역시, 깨어 있었구나.’
아까 고개가 쓰러지면서 봤다.
가득히 채워져 있는 하윤이의 찻잔 속 음료수.
아마도 누워서 상황을 살피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광경을 보고도 별다른 반응이 없으신 선생님.
이내 내 눈동자를 가만히 쳐다보고는 피식 웃으신다.
“사람이 좋게 얘기할 때 잘해야 지.”
품에서 나를 놓아 버리고는 천천히 일어서시는 선생님.
다시 쓰러져 천장을 보며 누운 자세가 된 내 얼굴 위로 팔짱을 낀 채 차갑게 내려다보신다.
“진짜 죽고 싶은 거야? 애들은 잘 대해 주면 왜 끝까지 기어오르지?”
그대로 슬리퍼를 벗으시더니, 스타 킹 신은 발로 입과 코를 밟으셨다.
“웁… 우웁……
꾸욱, 꾸욱.
안 그래도 부러진 코에서 피가 쏟 아져 엉망진창이 돼 있던 내 얼굴.
선생님의 발이 사정없이 호흡기를 짓밟아 숨을 못 쉬게 만든다.
“응? 응?”
“우웁… 웁……
발가락이 콧구멍으로 파고들고, 숨을 못 쉬어서 얼굴이 빨개진 나는 버둥거리며 발버둥 쳤다.
언제 천사처럼 상냥했냐는 듯, 눈 썹을 찌푸린 채 내 얼굴을 밟아 비 트시는 류진아 상담 선생님.
“병신 같은 애새끼들. 짜증 나는 새끼들. 잘해 주면 끝까지 기어올 라.”
“웁- 우웁-”
“너희 때문에 아가씨마저-”
순간.
타닥-
지금껏 소파에서 눈을 감고 있던 하윤이가 내가 던져 놓은 선아의 분 홍색 커터칼을 쥐어 들더니, 한걸음에 달려와 선생의 목을 그어 버렸다.
“걱, 어억.”
그대로 목을 부여잡고 고운 얼굴을 찡그리더니.
신음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비틀 거리며 털썩 쓰러지시는 선생님.
이내 하윤이가 내 위로 엎어져 앉더니, 커터칼을 양손으로 잡아들고 비릿하게 미소 짓는다.
“다시 해 보자, 준아.”
쌔애애액-
그대로 이마로 내려꽂히는 칼날.
푸욱-
[당신은 죽었습니다.]
[체크 포인트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로딩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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