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화
열한 번째 괴담 -
아무도 기억 못 하는 친구 (18)
“진희?”
탈의실의 나무문이 천천히 열리면서 누군가 고개를 빼꼼 내민다.
깡마른 얼굴에 커다란 눈망울.
모두의 친구 김은정이다.
“와, 오랜만. 왜 왔어?”
마치 화장실에 왜 따라왔냐고 묻는 듯한 말투.
진희는 긴장한 기색을 감추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 말리려고.”
“뭐를?”
빙긋 웃는 해맑은 얼굴.
“뭐를 막아?”
“…이렇게 사람 죽이는 거.”
“그게 어때서.”
문에 매달려 빼꼼히 진희를 쳐다보는 은정, 그녀의 체중을 받아 경첩 이 삐걱이는 소리를 낸다.
“사람 원래 죽잖아.”
“···그래도 먼저 죽이면 안 돼. 그 러니깐……
친구를 향해 턱을 치켜드는 진희.
더듬거리며 할 말을 찾는다.
“···원래 정해진 수명보다 빨리 죽이면 안 되는 거야.”
“ 오~’,
친구의 어설픈 대답을 들은 은정이 장난치듯 문에 매달린 채로 우습다는 듯 킥킥거렸다.
“그 말 하려고 갑자기 찾아온 거야?”
“사실 별로 신경 안 써. 그냥 나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는 거야.”
킥킥대는 친구 앞에서 뭐라 할 말을 찾던 진희가 다시 더듬거리며 말을 내뱉는다.
“···그것도 안 돼.”
“뭐?”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
혀로 마른 입술을 축이는 진희.
몇 번 입술을 움찔거리다 간신히 문장을 만든다.
“…사람들이 잡아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사람은.”
“뭐‘?”
은정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나 이해가 안 가. 갑자기 찾아와서 무슨 소리야?”
“···네가 지금 하고 있는 걸 말리려고-”
“6년 만에 만났는데 나 어떻게 살았는지 안 궁금해? 인사도 안 해?”
그제야 진희는 어색하게 손을 들었다.
“···오랜만이야.”
“응~”
흘려 넘기듯 인사를 받아 주는 은정.
진희가 다시 쭈뼛거리며 하려던 말을 계속한다.
“···네가 사람 죽일 거라고 해서 말 리러 왔어.”
“안 말려도 돼. 괜찮아. 그만 가 봐.”
“···말릴 거야.”
“야, 장난쳐?”
눈을 크게 뜨며 목소리를 높이는 은정.
“너희가 그런 사람 되라며?”
“나보고 싸이코 병신이라며? 사람 죽이라는 대로 다 죽여 줬는데 왜 또 지랄이야?”
어린 시절의 이상해도 어리숙한 구 석이 있었던 모습과는 다르게, 독기에 가득 찬 지금의 모습.
하지만 진희는 굴하지 않고 주먹을 꽉 쥔다.
“…미안. 잘못 생각했어. 그런 거 하면 안 돼.”
“근데 진희 너도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잖아.”
입을 쭉 내미는 은정.
“학교도 오고 싶을 때 오고, 수업도 마음대로 듣잖아.”
“···오해야. 나 지금은 그렇게 안 살아.”
“정말?”
은정은 그제야 조금 흥미가 생긴다는 듯 문틈으로 얼굴을 바싹 붙였다.
“그럼 어떻게 살고 있는데?”
“···일하면서 돈도 벌고, 학교도 안 빠지고 잘 다니고 있어.”
“헐. 거짓말~”
“···진짜야.”
정말이냐는 듯 눈을 크게 뜨는 은정에게 다시 고개를 끄덕여 주는 진희.
“진짜야. 그렇게 살고 있어.”
“…왜 그렇게 살아?”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은정이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이며 물었다.
“옛날에는 아니었잖아.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았잖아.”
“···그때 같이 어울렸던 애들 기억 해?”
“너희 공주들?”
킥킥.
“당연히 기억하고 있지.”
“…게네 감방 가 있어.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다가.”
“사람들이 잡아가.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은… 본성을 못 누르는 사람은……
“다 그렇게 살아가. 억누르면서……
조금 굳은 표정으로 가만히 진희를 쳐다보던 은정은 곧 눈을 가늘게 뜨고 혀를 내민다.
“응~ 안 속아. 개구라~ 진희는 거짓말쟁이~.”
“없는 소리 꾸며서 학교에서 나 쫓아낼 때부터 알아봤음!”
“···속아서 그래, 속았어. 몰랐어……
진희의 꽉 쥔 손이 땀으로 젖어간다.
“그, 그리고 성체성의……
아씨, 이준이 뭐라고 했더라.
정체성이었나.
복잡해지는 그녀의 머릿속.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지? 너는 누구냐면, 내 친구야.”
비웃는 듯 은정의 손이 입술을 가린다.
“뭐래~ 진짜.”
“가 봐. 진희 너는 살려 줄게.”
가만히 굳은 표정으로 서 있던 진희.
이대로는 상황이 끝나 버릴 것 같은 마음에 다급히 한 걸음 성큼 다가서며 아무 말이나 꺼내 본다.
“네가 누구인지 몰라서 그런 거지? 그래서 계속 이러는 거지?”
“아닌데. 난 내가 누구인지 알아.”
고개를 내민 은정의 입가에 장난스런 웃음이 깃든다.
“스스로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애들 다 죽이려고 돌아온 은정이지롱.”
“빨리 가 봐. 진짜 맘 바뀐다.”
칼로 입구 쪽을 가리키는 은정.
꽉 쥔 진희의 두 손이 긴장으로 떨린다.
“···잠시 얘기 좀-”
“앗! 어디서 나를 수군대는 목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갑자기 진희의 말을 끊더니 은정이 허공을 쳐다보며 연극 하듯 두리번 거린다.
“누가 또 내 욕을 하지? 누가 또 내 욕을 하고 있지. 야, 너 잘났어?
너 정상이야?”
그렇게 휙, 가리킨 은정의 손가락 앞에 한 남성이 지목된다.
목에 칼이 찔려 부여잡고는 간신히 숨만 쉬고 있는 벽에 기댄 남성.
유니폼이 검은색인 거로 보아 아마 도 이곳의 매니저인 듯싶다.
“야, 너 방금 나 욕했지? 이럴 줄 알았어, 진짜. 개새끼들 못 말려. 내 가~ 말이야. 뭘 했다고 그래. 야, 네가 더 나빠. 네가 더 나쁜 놈이란 말야. 알아?”
장난스레 말하다가도 시시각각 눈 빛이 뒤바뀐다.
“알았지? 몰라서 그래? 어떻게 이럴 수가.”
홱, 숨만 쉬는 남성을 째려보는 은정.
“네가 나빠.”
“···그, 그만해!”
갑자기 달려들려는 은정을 진희가 급하게 말린다.
“그, 그 사람은 아무 말도 안 했어!”
“뭐시라.”
그러자 홱,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돌려 진희를 쳐다보는 은정.
잠시 눈을 부릅뜨다가, 이내 다시 쓰러진 시체들을 돌아보며 중얼거린다.
“이렇게, 죽였지. 내가. 나한테 욕 하고 막 괴롭히길래. 이건~ 있잖아. 정당방위야. 죄 있으면 죽어도 돼. 판사 대신 내가 사형 내렸다, 땅땅.”
“누구게. 확인해 봐요. 사실 나도 몰라서 물었음. 모르는데 왜 시비? 진짜, 사람들 웃겨. 자기가 나 아 나? 왜 모르면서 마음대로 헥, 헥.” 그러더니 갑자기 진희를 쳐다보며 활짝 웃는 은정.
“오, 진희. 오랜만.”
“6년 만인가? 진짜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바보 같은 팔자 주름에 활짝 핀 O 으 A T그.
진희는 잠시 그 큰 눈망울을 보다가, 숨을 들이켜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 근데 내가 안 했는데 계속 몰아가는 거야. 많이 억울했지. 그래도 어떡해. 혼자서 이렇게 있다가~ 진희가 쨘, 짝꿍으로 나타났다. 네, 선생님. 요새 저 진희랑 놀아요. 진희가 저 여기저기 재밌는 곳 많이 데려가 주고 놀아 줘요. 진짜 아무도 나랑 안 놀아 줬는데, 진희가 저 진짜 잘 대해 준다니깐요?” “어제는 삐에로 영상 봤거든요. 막 다이빙하는데, 로프를 잘라서 사람을 죽여요. 되게 잔인했어요. 따라 하고 싶었는데 진희가 싫어하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안 했어요.” “거기 가면 많이 심심할 것 같아요. 진희랑 더 놀고 싶은데. 네, 제 짝꿍이에요. 선생님, 저 거기 안 가면 안 돼요? 저 사실 거기 안 가고 싶어요. 거기 가면 진희 같은 짝꿍 없잖아요. 저는 이상한데 진희는 진짜 착하다. 나랑 놀아 주고. 착해. 어, 근데 누가 내 욕했지? 이 사람 솔직히 죽어도 됨. 근데 죽이면 감옥 가니깐 한 번만 봐줌. 아, 심심 하다. 저기… 저기.” “저기, 진희야.”
혼잣말을 멈추고는 눈을 크게 뜨는 은정.
잠시 멍하니 있더니, 천천히 굉장히 슬픈 미소를 짓는다.
«... 나, 이상하지?”
“… 끅, 끄윽, 끅.”
어느새 진희는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진희야, 뭐해. 빨리 가 보라니 깐. 맘 바뀌기 전에……·”
입술을 꽉 물고는 꼭끅대며 소리 없이 우는 진희.
두 뺨 위로 눈물이 타고 흐른다- 잠시 불안한 듯 시선을 굴리던 은정.
갑자기 입을 쩌억 벌리면서 놀란다.
“허얼~ 진희다. 완전 오랜만.”
“···끅, 끄윽, 끅. 끄윽……
“엄청 보고 싶었는데 어떻게 여기서 만났지. 잘 지냈어? 항상 보고 싶었어.”
넘쳐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는 진희.
손을 들어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미, 미안. 은정아… 내가 다 미 안……
“···뭐? 뭐가?”
은정이 문에 찰싹 붙은 채 당혹스런 표정을 짓는다.
“뭐지, 왜 울지. 혹시 진희도 대안 학교로 가는걸가.”
“옆에 있으면서도 몰라 줘서… 미 안해……
두 눈에서 흘러넘치는 눈물을 닦으며 비비는 진희.
“···상담 선생님한테 속아서, 미안 해…… “헉, 상담 선생님.” 그 단어에 은정이 어깨를 움츠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그 사람 오면 안 되는데. 나 바보 만들어 버리는데.”
불안하게 시선을 옮기는 은정과 힘 겹게 눈물을 닦으며 코를 훌쩍이는 진희.
이내 조금 진정됐는지 한 번 눈가를 훔치고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 녀가 묻는다.
“대안학교...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상담 선생님이랑 너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점차 장난기가 사라지고 굳은 표정이 돼 가는 은정.
“말해 줘.”
“도와줄게……
고개만 내밀고 있던 은정의 두 눈 동자가 서서히 공포로 물든다.
그대로 어깨를 움츠리며 스태프 룸 이곳저곳으로 시선을 굴리는 은정.
“···왜 그래?”
“···저기.”
겁에 질린 채 손가락을 들어 벽을 가리킨다.
“…저 사람이 듣고 있어서 말 안 할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는 진희.
그곳에는 아까의 칼에 찔린 목을 지혈하고 있던 직원이 간신히 숨을 내쉬고 있었다.
“···누가 들으면 안 되는 얘기야?”
« 응 ”
겁에 질린 채 두리번거리는 은정.
진희는 코를 훌쩍이며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너 이미 죽었잖아. 이제 와서 무서워할 게 뭐가 있어…?”
“내 생각에는……
누군가 볼 새라 시선을 불안하게 옮기며 속닥거리는 은정.
“…네가 그렇게 생각해서 그러는 것 같아.”
“뭐?”
다그치는 진희의 말투에 한층 더 움츠러드는 은정의 어깨.
“…네가 나를 초등학교 4학년의 모습으로 생각하고 있잖아.”
“그래서 무서운 것 같아. 누가 들으면 안 되는 얘기거든……
마치 ‘어른한테 들키면 큰일 나는 비밀스러운 얘기’를 꺼내려 망설이는 어린아이 같은 표정.
이 공간 안에 그녀를 인식하고 있는, 살아 있는 사람이 몇 없기에 일어날 수 있는 변화였다.
훌쩍이는 진희.
불안해하는 은정.
그리고 그 사이에서 목을 부여잡고 흘러나오는 피를 막고 있는 남자.
그렇게 셋은 대치 상태에서 서로를 잠시 쳐다본다.
틱--
곧 진희가 이를 꽉 깨물더니 성큼 성큼 남자에게로 걸어간다.
“쿨럭, 쿨럭……
다가오는 진희에게서 도망가려 두 손으로 바닥을 짚는 남성.
필사적으로 지혈하던 목의 상처에서 손을 떼자 금세 피가 흘러나왔다.
저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지, 식은 땀을 흘리며 보는 진희.
남자는 간신히 몇 걸음 기어갔지만, 이내 흘러나오는 피를 주체하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움찔댄다.
이 사람, 어차피 죽는다.
섣불리 구하려고 문을 여는 순간, 진정시켜 놓은 은정이의 인격이 다른 사람들의 영향을 받아 어떻게 변 할지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며 진희는 죽어 가던 남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컥, 커억……
풀썩.
“하아, 하아, 하아, 하아.”
자신의 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혈액을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쓰러지는 남성.
그러자 지금껏 탈의실 뒤에서 고개 만 내밀고 있던 은정이 드디어 스윽 밖으로 걸어 나온다.
“하아, 하아, 하아… 이제 아무도 없어, 은정아. 괜찮아……
“···진희야.”
식은땀을 흘리는 진희에게 다가오는 은정.
“진희야……
“…이제 말해 줄래? 전학 간 학교.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은정은 대답 대신 천천히 그녀의 손을 잡고는 시체를 보며 걱정스레 중얼거린다.
“···진희야, 너 그러다 감옥 가
“X발. 가라지, 뭐.”
흘러내리는 식은땀, 그리고 눈물을 소매로 훔치는 진희.
“더 나빠질 것도 없잖아.”
떨리는 짝의 손을 만지작거리던 은정이 곧 마음의 문이 열린 듯 천천히 입을 연다.
“···그 학교는 일종의 실험실이었어.”
“실험실?”
“응.”
여기저기서 많이 싸우고 다녔는지, 여자의 손 치고는 상처투성이인 진희의 손등.
그 거친 손을 마치 어린아이처럼 은정은 조물딱거린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모아놓고, 이상한 약을 먹게 하고… 주문 같은 단어들을 계속 외우게 시 키고……
“···부모님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진희가 묻는다.
“부모님은 아무 말씀도 없으셨어?”
“···부모님은 나를 미워했거든. 그리고 그런 거에 신경 쓰지 않는 가정의 아이들만 골라서 보내는 거야.”
가만히 진희의 손을 뒤집었다 엎었다 하며 쳐다보는 은정.
영락없이 어린아이가 장난을 치는 모양이다.
“그 상담 선생님은, 말하자면 섭외 담당... 같은 역할......
“···류진아 선생 말이구나.”
“응... 적당히 정신에 문제가 있으면서도 가정 형편이 나쁜 학생을 물색해서, 자기네 측 특수학교로 보내 버리는 게 그 사람의 주 업무야 문득 진희는 어린 시절 수업을 빼 먹었을 때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자신들을 찾던 상담 선생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 우리 환심을 사려고 그런 거구 나.’
실험실인 대안학교로 보내 버릴 후 보증 한 명이니, 학교에 계속 나오 도록 애틋하게 신경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금 조지러 가자.”
“뭐?”
진희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손장난을 치던 은정이 놀라서 고개를 든다.
“뭐라고?”
“···지금 그년한테 가자고.”
배신감에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른 얼굴로 말하는 진희.
그런 진희를 빤히 보던 은정은 이 내 풋, 하고 웃음 지었다.
“너 아직도 거침없구나. 하나도 안 변했네.”
“사람 때리면 감옥 가잖아. 그러지 마.”
어느새 그녀의 모습은 어려져 있었다.
진희가 기억하던 초등학교 4학년의 가냘픈, 정신적 장애를 가졌지만 아직은 순수한 소녀의 모습으로.
“···역시 그 아파트 옥상의 밧줄. 네가 끊은 거 아니구나.”
“뭐? 밧줄?”
인간을 헤치면 안 되는 사회적 이 유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 4학 년의 은정이었다.
“밧줄이라니, 미안.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어.”
킥, 하고 웃는 은정.
“토끼 말고도 또 뭔가 오해하고 있었나 보네.”
“그런데 정말 그렇게 할걸. 상담 선생님. 그 사람부터 죽였어야 하는 건데. 하지만
조심스레 진희의 손을 놓는 은정.
“늦었어. 난 불안정해. 정신이 든 시점부터 내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립해야 한다는, 이상한 본능밖에 없었어.”
“너희들이 붙여 준 이미지에 따라 정신없이 여기를 난도질할 때도 ……. 다른 생각 같은 건 떠오르지 도 않았어.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서 아무나 찔러 죽여야겠다는 충동 밖에……
“···지금은?”
무뚝뚝하게 묻는 진희에게 어린 은정은 살며시 미소 지었다.
“내 모습을 봐. 너 정말로 나를 친 구로 생각했었네.”
피 묻은 바닥을 맨발로 천천히 걸 어가더니, 탈의실의 큰 거울 앞에 서 보는 어린 은정.
순백색의 원피스를 입은 자신의 모습을 이리저리 들여다본다.
“옷도 기억하고 있었네. 눈 밑에 점 하나 있는 것까지도……
“…이리 와.”
곧 성큼성큼 다가온 진희가 소녀의
손을 낚아챈다.
“같이 놀러 가자.” “···응.”
곧 스태프 룸의 문이 열리고, 진희는 어린 은정을 아무도 보지 못하게 외투로 덮은 뒤 등에 업고 부원들 사이를 지나친다.
“···진희야?”
“ 쉿.”
누군가 말을 걸려던 찰나, 가만히 있으라는 듯 손을 내미는 이준.
그렇게 진희는 소녀를 업은 채 피 투성이가 된 서울역을 저벅저벅 걸어 나간다.
저 멀리 하얗게 빛나는 출입문을 향해서.
[어, 나다. 곧 교복 입은 여학생 한 명이 등에 꼬마 업고 나갈 거거든? 피해자니깐 치료받을 수 있게 바로 내보내면 돼. 인적 사항은 내가 받아 뒀어.]
“네, 형사님. 알겠습니다.”
입구를 포위한 채 아무도 역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통제하던 경찰들 이, 서울역의 유리문을 걸어 나오는 진희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뒤에 업혀 있는 소녀까지 확인하고는, 이내 밖으로 갈 수 있도록 안내하는 그들.
“괜찮아요, 다친 곳은 없어요. 앰뷸 런스로 안 가도 돼요.”
세워 놓은 앰뷸런스로 안내하려는 경찰들을 만류하며 계단을 내려가던 진희, 순간 어린 은정에게 덮어 놓았던 외투가 흘러내린다.
등에 업힌 소녀를 보며 수군대는 시민들.
“어휴, 저런 어린애까지 말려들 고…… “도대체 몇 명이 다친 거야? 또 한 명 업고 나오네.”
교복을 입은 진희와 새하얀 원피스를 입은 채 업혀 있는 어린 은정을 걱정스레 쳐다보는 시민들.
안타깝다는 듯 가슴을 치며 분통을 터트린다.
“말세야, 말세. 미친놈들이 칼 들고 나와서는 아무나 찔러 죽이고......
“아유, 어디 다쳤나 본데. 무사해야 할 텐데
백지 같은 은정이는 사람들의 동정 어린 시선 그대로 자신을 형성해 나 간다.
“진희야, 아파… 나 아파……
“···조금만 참아.”
순백색 원피스가 어느새 생겨난 상처들로 붉게 물들어간다. 오래된 상처였다.
부우우우웅-
“꺄아악……
진희의 오토바이가 한강대교를 따라 속도를 높여 달린다.
그 뒤에서 어린 은정이 원피스를 휘날리며 함박웃음을 지은 채 그녀를 끌어안는다.
폴짝. 폴짝. 어렸을 때 자주 놀았던 동네 근처의 풀숲.
어린 은정은 네발로 폴짝거리며 도 마뱀을 잡으러 뛰어다니지만, 좀처 럼 손에 잡히지 않는다.
“···병신. 자, 여기.”
지켜보던 진희는 금세 근처의 돌 하나를 드러내고는, 도망가는 도마 뱀을 잡아 올린다.
“ 우와
다다다 걸어와서는 눈을 반짝이는 그녀의 짝, 은정.
“만져 봐.”
“꺅……
진희의 막무가내로 들이미는 성격을 못 이기고 결국 웃으면서 도마뱀을 집는 은정.
“이번에는 꼬리 말고 몸뚱이로.”
“응.”
그녀의 조언에 따라 천천히 도마뱀을 집어 올린다.
그리고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로 쭈 그리고 앉는 소녀.
한참을 버둥거리는 도마뱀을 보다가 구경이 끝났는지, 은정은 가만히 진희를 올려다보며 미소 짓는다.
“다음에도 네가 내 짝꿍이었으면 좋겠다.”
그 말을 하고 천천히 사라져간다.
진희는 사라져 가는 은정의 옆에 같이 무릎을 웅크려 앉는다.
“어디 가는데.”
대답 없이 해맑게 웃으며 사라져 가는 소녀.
진희의 입술이 몇 번 움찔거렸지만, 결국 작별 인사를 건네지 못한다.
곧 허공에서 툭 떨어진 도마뱀이 사사삭 풀숲을 기어 도망간다.
어릴 때 놀던 풀숲.
누군가 있었다는 듯, 그곳에 남아 있는 밟힌 잡초의 흔적.
그곳에 홀로 웅크려 앉은 진희는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이래서 같이 놀아 주면 안 된다 고……
그렇게 중얼거리고도 한참을, 한참을 더 진희는 그곳에 웅크려 있었다.
괴담 동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