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속 중간보스에 빙의했다-4화 (5/60)

EP.4 어둑시니

"......"

한국대 병원.

병상만 삼 천개 가까이 되고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한국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병원.

그런 한국대 병원의  vip병실 1501호 창문에는 한 명의 여자가 기대어 앉아 있었다.

허리까지 오는 황금 같은 금발에 갸름한 얼굴의 미녀.

우수에찬 눈빛과 표정으로 쉬이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를 내뿜고 있다.

여기에 환자복과 병원의 하얀 배경까지 합쳐지니 마치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가련한 여주인공으로 보였다.

한참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그녀가 내뱉은 첫마디는

"....날씨 한번 지랄 맞게 좋네. 씨발."

걸쭉한 욕설이었다.

"차라리 비나 처 내릴 것이지. 짜증 나게."

"왜 엄한 하늘한테 시비니?"

그녀의 헛소리를 옆에서 듣고 있던 검은 단발의 여자가 한마디 한다.

"그럼 하나 넌 안 짜증 나? 밖에 나가지도 못하는데 쓸데없이 하늘만 맑잖아."

"나가서 산책이라도 하면 되잖아?"

"하! 좆만 한 병원에서 산책하는 게 나가는 거야? 나가려면 병원 밖으로 나가야지."

"문밖에 있는 아저씨들 따돌릴 수 있으면 나가보시던가. 킥킥."

"...너 빨리 네 병실로 돌아가."

금발머리의 여자가 노려보며 말했지만 하나는 무시한 채 계속 킥킥델 뿐이었다.

결국 포기한 그녀는 다시금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깊은 한숨을 내쉰다.

"하아. 아빠는 쓸데없이 경호원 같은걸 붙여서는."

"적어도 몰래 빠져나갔다가 쓰러져서 실려온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아아. 산이든 바다든 계곡이든 나가고 싶어라~~."

"이년이 이 악물고 모른척하네."

혀를 끌끌 차던 하나는 금발머리에게 옆에 놓여져있던 사과 한 조각을 주며 물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오늘따라 왜 그래? 가연아"

"그냥...오늘따라 더 짜증 나네."

몇번의 쓰러짐과 발작 끝에 병원에서 살기 시작한 지 벌써 햇수로만 5년.

나아지기는 커녕 점점 심해지는 병세에 운신의 폭은 점점 좁아지고 이제 와서는 병원 바깥으로 나가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한번은 너무 답답한 마음에 몰래 병원 바깥으로 나갔다가 백미터도 못 가 쓰러져 발견되었고,

결국 경호원까지 붙이는 지경이 된 것이다.

"그래도 너무 갑갑한 걸 어떡해."

가연도 알고 있다. 부모님이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에 경호원을 붙여다는 건.

하루라도 더 자신을 오래 살게 하고 싶으신 거겠지.

하지만 자신은 이렇게 갇혀 지낼 바에는 일찍 죽더라도 조금이라도 자유를 누리며 살고 싶었다.

"솔직히 치료법이 제대로 있는 것도 아니고."

아직 이름조차 제대로 정해지지 않은 희소병.

세계적으로도 보고된 케이스가 한 손안에 꼽고 완치된 사례는 전무.

원인불명의 이유로 마치 노화되는 것처럼 온몸의 신체기능이 약화되다 이내 사망하게 되는 병이다.

이병의 무서운 점은 병이 어느시점에 발발할지 모르고 사망 후에도 자연사와 다를 바 없어 눈치채지 못하고 병원에서도 진단을 제대로 내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치료받아도 오래 살 것 같지도 않고."

지금으로서는 기껏해야 약물로 사망을 조금 미루는 것이 최선.

이럴바엔 남은 인생 즐기다 가는 게 낫지. 이러다간 안 그래도 얼마 남지 않은 수명 화병으로 더 줄어들 지경이다.

"그 말 들으시면 너희 부모님 쓰러지신다."

"풉. 바쁘고 바쁘신 우리 부모님이 이 말을 어떻게 들어?"

그녀가 쓰는 vip병실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가연의 부모는 상당히 큰 규모의 회사를 이끌고 있는 경영자로 현재는 계약 건 때문에 직접 외국에 나가 있는 상황이었다.

"그게 다 너 치료하려고 그러는거잖아."

하나의 말대로 가연의 부모는 어떻게든 가연의 치료법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으며 이번 외국에서의 계약도 치료법을 찾기 위한 사전준비라 할 수 있었다.

삐죽.

"...그딴거 다 필요 없고 내 옆에만 있어주면 되는데...."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대는 가연의 모습에 하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으이구. 이 철없는 년아."

"아 몰라몰라. 내 얘기는 됐고 너 다음 주 퇴원이라며?"

가연은 주제를 바꿔 하나에게 질문했다.

하나는 병원에서 만난 친구로 같은 장기입원자라는 공통점과 나이도 같고 유난히 성격도 잘 맞아서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응. 다음 주 금요일."

교통사고로 일년 넘게 의식이 없던 그녀는 기적적으로 의식을 회복했다.

하지만 깨어나자마자 부모님을 잃었다는 충격적인 소식과 사고 후유증으로 움직이지 않는 몸 때문에 한동안 우울증을 앓을정 도로 정신적으로 불안한 상태였다.

그때 옆에서 많이 도와줬던 게 바로 가연. 옆에서 끊임없이 말을 걸어주고 재활도 꾸준히 도와줘 1년 만에 신체도, 정신도 회복할 수 있었다.

"부럽다. 아. 그러면 내일 너네 오빠도 오시겠네?"

"일단 온다고 하긴 했는데 어쩔란지."

"도대체 뭐 하시는 분인데 어떻게 우리 부모님보다 얼굴 보기가 힘드냐?"

"뭐. 바쁠 테니깐. 병원비 내기도 만만치 않을 테고."

그녀가 입원해 있는 병실은 1인실.

VIP병실만은 못해도 충분히 비싼 곳으로 부모님의 보험료가 있다 해도 오빠가 혼자 감당하긴 벅찬 비용이란 것쯤은 뻔히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다인실로 옮긴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들어먹질 않으니. 에휴."

"완전 스윗하신데 뭘. 전화도 꾸준히 하시잖아? 나도 그런 오빠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스윗은 지랄.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뭐 조금 철이든 것 같긴 하지만.'

하나는 자신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그 목걸이가 이번 생일에 받은 거지?"

"엉. 평생 선물은 커녕 싸우기만 했는데. 이런 날도 오네. 킥킥."

자신이 의식이 없었던 작년에는 팔찌. 올해는 목걸이. 돈이 어디서 났는지 제법 고급스러워 보이는 장신구를 선물 받았다.

"너 퇴원하면 이제 난 누구랑 놀아야 되나~."

"누구랑 놀긴. 나랑 놀아야지. 걱정 마셔. 퇴원해도 자주 올 테니까."

"헤헤헤. 고마워."

"웃기는. 킥킥."

그렇게 한참을 떠들다 보니 어느새 저녁 시간이 다되어갔다.

"이제 가볼게."

"잠깐만."

자신의 병실로 돌아가 보려는 하나를 가연이 붙잡는다.

"오늘 같이 잘래?"

"같이?"

"응. 오랜만에."

1년전쯤 하나가 아직 정신이 불안해 혼자 잠들기도 힘들어 했을 때 종종 가연이 병실에 찾아와 같이 잠들곤 했었다.

"흠. 그럴까? 그럼 내 방으로 가자."

"오늘은 네 방 말고 여기서 자자."

"여기서?"

"응. 어차피 침대도 여기가 더 넓잖아?"

"그건 그런데...."

가연의 말에 잠시 고민하는 하나.

'오빠가 잠은 꼭 내방에서 자랬는데....어차피 다음 주가 퇴원이니까 상관없으려나?'

오빠의 당부가 떠올랐지만 돈 아까워서 그런 말 했겠거니 싶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다.

"그래. 그러자."

"아싸. 그럼 경호원 아저씨한테 네 밥도 여기로 가져다 달라 할게."

탁탁탁.

슬리퍼를 신고 병실밖으로 향하는 가연의 뒷모습을 하나는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렇게 밝고 천진난만한 아이가 시한부라니.

'신이시여. 조금만이라도 좋으니 저 불쌍한 아이를 늦게 데려가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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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있으면 퇴원한다는 아쉬움 때문일까.

저녁을 먹고도 끝없이 이어진 둘의 수다는 새벽녘쯤 가연과 하나가 잠들고 나서야 겨우 끝을 맺었다.

새액. 새액.

달빛마저 구름에 가려져 완벽한 어둠에 빠져있는 병실.

vip병실의 이름에 걸맞게 방음 또한 뛰어나 병실 안은 자고있는 두명의 가는 숨소리만 주기적으로 들려올 뿐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포근하게 감싸주던 은은한 달빛이 조각구름의 그림자에 가려져 잠시나마 병실이 완전한 어둠에 빠졌다 벗어났을때

스르륵.

그것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림자가 그대로 몸을 일으킨 듯 온몸이 검은색으로 둘러져있는 사람.

마치 그림자 속에서 솟아오르듯이 걸어나온 사람은 지체없이 침대에 누워있는 둘을 향해 걸어갔다.

당연한 일을 해야 하는 것 마냥 거침없는 움직임은 일견 자연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무언가 이상한 점 하나를 찾을 수 있었는데.

.......

응당들려야할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점.

사람은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소음을 발생하기 마련이다.

발검음소리, 옷스치는 소리, 하물며 숨소리까지.

.....

그러나 흑색의 사람은 진짜 사람이 아닌것 마냥 당연히 들려야 할 소리들이 들리지 않았다.

그렇기때문일까 침대 바로 옆까지 침입자가 다가왔건만 하나와 가연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단잠에 빠져있었다.

스윽.

침입자는 침대 옆에 도착하자마자 한 손을 들어 올렸고 어느새 역수로 손에 쥐여져 있는 단검을 그대로 내리꽂았다.

휘익!

캉!

"캉?"

들려와서는 안될 소리에 침입자는 순간 입 밖으로 의문을 내비쳤고.

"누, 누구야!"

"꺄악!"

침입자 혼자만의 착각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려주듯이 잠에서 깨어나 침입자를 보고 소리를 지르는 하나와 가연.

"아가씨!"

그에따라 밖에 서 있던 경호원이 병실로 들어오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쯧"

그 모습에 작게 혀를 찬 침입자는 곧바로 몸을 반전시키며 경호원을 향해 몸을 날렸다.

경호원은 프로답게 반사적으로 삼 단 봉을 뽑아 휘둘렀지만 어느새 침입자는 시야에서 사라져있었다.

"어?"

우두둑.

털썩.

순식간에 경호원의 뒤로 돌아간 침입자는 경호원의 목을 꺾어버리며 간단하게 제압해버렸다.

"꺄아아악!"

그리고 목이 꺾인 채 경호원이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가연은 비명을 질렀다.

"....."

그런 가연을 품에 꼭 안고 있던 하나는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침입자를 말없이 노려보았다.

"흠....."

잠시 그런 모습을 관찰하듯이 보고 있던 침입자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봐 아가씨. 그 목걸이 어디서 났지?"

"....."

침입자의 질문에도 입을 꾹다문채 노려보기만하는 하나.

"호오."

그런 하나의 모습에 잠시 감탄을 흘리던 침입자는 다시 단검을 휘둘렀다.

카앙!

단검이 떨어지는 순간 하나의 목걸이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그 빛이 침입자의 단검을 막아냈다.

"꺄아아악!"

"흐음. 일회성은 아닌것 같고."

그에 놀라 소리친 가연이 신경도 쓰이지 않는 듯 분석을 이어가는 침입자.

8호의 머릿속은 복잡하기 그지 없었다.

'시동어, 제스쳐, 둘다 없었다. 그럼 자동발동이란건데....'

타고나거나 익히지 않은 이능을 일반인이더라도 사용할 수있게 해주는 도구.

통칭 마도구.

'하. 일반의뢰에서 아티팩트라니.'

개중에서도 마도구 자체가 의지를 가지고 상황에 맞춰 스스로 이능을 발휘하는 마도구를 아티팩트라 칭한다.

물건에 에고를 불어넣는 것은 오로지 정점에 달한 장인 또는 대마법사만이 가능한 일.

그렇기에 세상에 존재하는 아티팩트는 극소수일 수밖에 없고.

그런 극소수의 아티팩트를 눈앞의 여자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단체든 인물이든 높으신 분이 얽혔다는 거지. 쯧'

물론 개인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유물 아티팩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극소수중의 극소수인 경우.

누군가 얽혀있다고 보는 게 맞겠지.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8호는 곧바로 행동을 개시했다.

까가가가강!!

"꺄아아악!"

"....윽!!"

자신이 조직에서 받은 명령은 일반의뢰였기에 원래라면 추적을 감수하고 퇴각하는 게 맞겠지만

'나는 다르지.'

위에서 내린 징계로 잠시 일반의뢰를 수행하고 있지만 자신은 조직의 정예인 한자릿수 조직원.

'빠르게 뚫고 둘 다 제거한 뒤 흔적을 지운다.'

우우웅.

검은빛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기 시작하는 단검.

콰가가가강!!

검은빛이 뿜어져 나온 직후, 단검과 빛이 부딪히는 소리가 한층 거세지고

얼마지나지 않아

쩌적!

목걸이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하나는 끝을 느낀것인지 눈을 꼭감으채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누리오빠!!!!!"

쨍그랑.

......

......

".....?"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건만 한참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하나는 살며시 눈을 떴고

"야."

그곳에 보인것은

"내가 잠은 네 병실에서 자랬지."

후줄근한 추리닝차림으로 침입자의 팔을 막은 채 미소짓고있는

"하여간 오빠말을 좆으로 알아요."

자신의 오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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