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 어둑시니
휘이잉.
적막만이 가득한 숲 속을 지나가는 한점의 바람.
사악.
가을이 한창이란 것을 주장하듯 나무들의 잎사귀는 붉은색과 갈색으로 가득했고
한점의 바람에도 위태위태하게 달려있던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간다.
그렇게 날아가는 낙엽들 사이로 보이는,
사람. 사람. 사람. 사람.
바닥에 쓰러진 채로 지천에 널려있는 검은 복장의 사람들.
그리고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면 쓰러져 있는 사람들이 전부 숨을 쉬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
그런 시체들의 한가운데 서 있는 어둑시니.
얼굴을 굳힌 채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지만, 그의 머릿속은 엉망진창인 상태였다.
'뭐냐....도대체 이게 뭐냔 말이다!'
오만이었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 공격해야 했다.
아니, 부하들을 재물 삼아 혼자서라도 도주했어야 했다.
하지만 흘러간 시간은 돌이킬 수 없고 이제 오만의 대가를 치러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마법? 마법인가? 하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마법이 존재할 리가....'
일반적인 마법이라 함은 영창, 시동, 발현의 과정을 거친다.
경지가 높아짐에 따라 각각의 단계가 단축될지언정 생략은 불가능하다.
아무리 대마법사라 해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지킬 수밖에 없는 법칙.
하지만 방금의 마법은 달랐다.
'시동어만 있었을 뿐 영창, 발현이 아예 생략됐다.'
남자가 시동어를 언급하자마자 어떠한 징조도, 징후도 없이 모든 부하들이 즉사했다.
시동어를 언급하기 직전 자연 상태의 흑마력이 날뛰는 현상이 있었지만, 그것을 방금의 마법과 연관 짓기에는 어둑시니의 지식으로도 한계가 있었다.
그렇게 어둑시니가 자신의 상식에 갇혀 생각에 매몰되어갈 때 이 사태를 일으킨 남자, 누리의 입이 열렸다.
"살아남은 걸 보니 마스터 급은 되나 보네."
머릿속은 아직도 혼란스러웠지만, 최대한 평정을 가장하는 어둑시니.
"...넌 누구지."
하지만 혼란에 빠진 어둑시니가 고심 끝에 내뱉은 말은 결국 처음과 같은 질문이었다.
"8호가 연락이 두절된 직후 온걸 보니 한윤에서 보냈나? 한윤은 이능사회와 연관이 없는 걸로 아는데 정보가 잘못되었나 보군."
"아마 그 정보는 정확할걸. 그냥 너희가 운이 안 좋았을 뿐이야."
"....하! 겨우 운 때문에 100년 넘게 이어온 조직이 전멸이라. 눈물이 다 나올 지경이군."
"어쩌겠어 세상사가 다 그런 법인데."
으쓱.
별것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리는 누리를 당장에라도 찢어 죽이고 싶은 어둑시니 였지만 미지에 대한 공포가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아. 한연기업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의뢰자는 누구지?"
".....말하면 살려주나?"
"호. 철칙이 아니라 살려달라는 이야기부터 나오는 거 보면 어지간히 살고 싶은가 보네."
청부살인조직에게 정보력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신뢰.
청부살인 자체부터 이미 뒤가 구린 일이기에 의뢰자의 신상이 지켜진다는 신뢰가 없으면 조직은 절대 유지될 수 없다.
이로 인해 생겨난 암흑가조직의 암묵적인 철칙이 바로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의뢰자의 신분은 발설하지 않는다.' 였다.
"조직이 절멸했는데 철칙 따위 대수겠나."
"하긴."
"따라와라. 정확한 정보는 수령실에 있다."
누리는 망설임 없이 뒤돌아 걸어가는 어둑시니의 뒷모습을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며 뒤를 따랐다.
한참을 침묵 속에서 이동한끝에 도착한 곳은 본거지의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방.
있는 것이라곤 의자와 커다란 책상, 그리고 그 위에 올려져 있는 노트북이 전부인 삭막한 방이었다.
"조직의 모든 정보는 오로지 이 노트북으로만 접근 할 수 있다."
"보안이 너무 허술한 거 아니야?"
"수령실이 뚫리고 노트북을 탈취당할 정도면 이미 조직은 끝나있겠지."
"큭. 지금처럼 말이야?"
뿌득.
"......그래."
누리의 비웃음에 이빨에 힘을 주며 분노를 속으로 식힌다.
사실 수령실에는 뚫릴 경우를 대비하여 만들어놓은 함정이 존재한다.
그것도 수령실뿐만이 아니라 본거지 전체를 날려버릴 만한 대량의 폭탄이 말이다.
어둑시니 본인의 몸에 특수한 마도구를 심어두고 그 마도구를 지니지 않은 침입자가 강제로 들어오려고 시도하면 곧바로 폭발하게 되어있는 함정.
지금은 자신이 같이 들어왔기에 함정이 발동되지 않았지만 수령실의 함정을 발동시킬 방법은 한 가지 더 존재한다.
'그래. 지금은 그렇게 웃어둬라. 의자에 앉기만 하면......'
"그래서 언제쯤 시작하는 거지?"
"정보는 바로 확인할수 ㅇ...."
"아니. 함정 말이야."
흠칫.
"함정이라니? 무슨 말이지?"
"아아. 걱정마 딱히 막을 생각은 없으니까. 천천히 하라고. 그 책상이 쉘터인것도 알고 있으니까."
"......어떻게 알았지."
일단 시치미를 때보았지만, 상대는 쉘터의 존재까지 알고 있는 상황. 여기서 발뺌해봤자 헛수고밖에 되지 않기에 어둑시니는 모든걸 포기하고 물어보았다.
"음... 별거 아니야. 그냥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뿐이라."
"....설계와 시공의 단계별로 각각 다른 업체에 맡기고 일이 끝날 때마다 관련된 인원을 전부 죽였다. 거기에 그 모든 일을 전부 나 혼자 처리했는데 정보가 새어나갔다고?"
특히 폭탄과 쉘터의 존재는 자신의 비서이자 가장 오래된 동료인 1호조차 모르는 기밀이었다.
유사시 조직 전체를 희생해서라도 혼자 살아남을 수 있도록 설계한 것이니까.
"납득 못해도 어쩌겠어. 이게 진실인걸."
누리도 그를 이해했다. 누가 알았겠는가? 누리가 게임 속 세상으로 떨어질지.
폭탄과 쉘터의 존재도 그가 이스트헌터스토리를 공략해보았기에 알고 있는 것이었다.
".....왜지?"
어둑시니가 한참을 어처구니없다는 눈을 하다 다시 누리에게 물었다.
"왜 나를 살려둔 거지?"
분노도 두려움도 전부 걷어내고 나니 떠오르는 근본적인 의문.
어떤원리인지조차 알 수 없는 미지의 기술을 사용했을 때도 자신 혼자만 살아남았다.
처음엔 정보를 원해 살려둔 것이라 생각했지만, 함정의 존재를 알 정도의 정보력이 있다면 굳이 자신에게 정보를 캐낼 필요가 없다.
즉 자신을 살려둘 이유가 저 남자에겐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까지 나를 기만하고 싶었나?"
함정의 존재를 알면서도 군말 없이 이곳까지 따라오고 함정을 발동시키기 직전에 굳이 함정의 존재를 언급하는 것에 자신의 기만하려는 의도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되나.'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누리는 황당한 눈길로 어둑시니를 바라볼 뿐.
럴러바이는 게임 속 죽은자들의 왕의 난이도를 높이는 입장 시 즉사패턴을 보고 모방한 기술로,
많은 인원을 상대할 때 효과적인 기술이지만 경지가 마스터급이상이거나 특수한 버프를 받으면 효과가 없다는 확실한 공략법이 존재하는 패턴이다.
그래서 죽은자들의 왕을 공략하는 필수 요소가 마스터급 이상으로 파티를 꾸리거나 버퍼 직군의 파티원을 영입하는 것이다.
'뭐.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오해할만하긴 한데.'
그리고 굳이 이곳까지 온 이유도 설명하기 애매했다.
'게임설정이랑 실제랑 얼마나 같은지 비교하려고 했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
게임 속 세상이라 해도 이곳은 엄연히 가상이 아닌 현실이다.
게임 속의 한 줄짜리 설정이 현실에서는 복잡한 사연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허다했기에 누리는 메인스토리가 시작되기 전 최대한 많은 설정을 확인하려 하고 있었다.
예를들어 게임 속에서는 서브퀘스트로만 존재하던 어둑시니라던지.
처음으로 만나본 마스터의 공격은 어디까지 통할지 같은 것 말이다.
'사실 아무렇지 않은척하는 꼴이 같잖아서 일부로 말한 것도 있지만.'
하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
이대로 기껏 만난 마스터급을 상대해보지도 못하고 어둑시니를 죽여 끝내야 되나 고심하던 도중 문득 떠오른 게임 속 어둑시니 서브퀘스트의 목적.
'....되려나?'
안그래도 고민하고 있던 것이 있었기에 일단 한번 질러본다.
실패하면 그냥 죽이지 뭐.
"....아직도 모르겠나?"
일단 분위기 좀 잡고.
"뭐를 말이냐!"
흑마력을 조작해 책상 아래 숨겨져 있는 기폭버튼을 누른다.
찰칵. 삑. 삑. 삑.
"폭탄이 왜!"
갑자기 켜진 폭탄의 타이머에 어둑시니는 어떻게든 쉘터로 들어가려 했지만 애초에 타이머부터 쉘터 안에서 터트리는 것에 맞춰둔 상황.
'늦었.......!'
콰과과광!
그와 동시에 누리가 발을 구르며 바닥을 찍었고.
쿵!
뚝.
폭발이 멈췄다.
아니. 멈춘 것이 아니다.
구구구궁.
폭발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저 무언가 짓눌려져 밖으로 뿜어져 나오지 못하고 있을 뿐.
쿵!
누리가 다시 한번 발을 구르자 완전히 사라지는 폭발.
그리고 전개되는 '영역'.
빛이 사라지고 숲의 어둠이 몰려온다.
어둠에 속한 모든 존재가 제 주인을 찾아 무릎 꿇는다.
주변의 모든 마력이 사라지고 오로지 흑마력으로만 가득 채워져 외부와 단절된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니,
"이곳이 곧 심연(Abyss)이니라."
죽은자들의 왕 2페이즈 마지막 패턴. 세계구축. 어비스.
"이, 이건."
어둠으로 가득 찬 세계의 출현에 어둑시니는 경악한 표정을 짓는다.
그 또한 마스터에 이른 강자였기에 이 현상이 어떤 의미인지 본능적으로 알수 있었다.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선 자신의 심상에 소우주, 즉 하나의 세계를 구축해야 한다.
그렇기에 '마스터', 하나의 세계를 지배하는 '주인'이다.
"말도 안 돼..."
그리고 이 어둠은 저 남자의 '세계'이다.
자신의 심상 속이 아닌 현상세계에,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해낸 것이다.
"들어라!"
그때 어둑시니의 당황을 가르고 세계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
"나는 모든 빛의 대적자이자 삶을 부정하는 자."
"나는 모든 어둠의 어버이이자 죽은자들의 왕일지니."
분명 어둠 속이건만 어둠을 두른 그의 압도적인 형상은 어둑시니의 동공에 선명히 각인되었다.
"죽은자들의....왕"
암흑가와 흑마술사들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에 흑마술사들의 예언은 어둑시니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묻겠다!"
"어둑시니여! 너는 어둠인가!"
언어 담긴 미증유의 힘이 어둑시니의 머릿속을 흔들었다.
어둑시니는 고대로부터 어둠을 상징하는 요괴.
그리고 암살자는 항상 어둠과 함께하는 직업.
어둑시니의 창설자이자 초대 어둑시니 또한 이러한 닮은 점을 생각해 어둑시니라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어둠....."
그것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저 처음부터 어둑시니였기에 사용하고 있을 뿐.
'나는....어둠인가?'
하지만 머릿속을 뒤흔든 '어둠'이란 단어가 화인처럼 새겨진다.
전대 어둑시니에게 주워져 어릴 적부터 암살자 훈련을 받으며 어둠과 함께 살아왔다.
낮보단 밤이 편하고 빛보단 어둠에 포근함을 느낀다.
생각해보면 언제나 본능적으로 어두운 곳을 찾아 헤맸다.
나는 늘 어둠 속에 있었다.
"나는.....어둠입니다."
그래. 나는 어둠이다. 그림자 속에서 노닐고 죽음과 함께하는 어둑시니이다.
그렇게 자신이 어둠임을 인지하고 인정한 순간
후웅.
어둑시니의 심상 세계가 한차례 확장되며 완전한 어둠으로 물들었다.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지 10년.
무려 10년 동안 변화가 없던 심상 세계가 질문 한번에 변화한 것이다.
쿵.
어느새 어둑시니는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고 바닥에 머리를 부딪치며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
"어둑시니, 사영이 어둠의 온당한 주인이신 죽은자들의 왕께 인사 올립니다."
누리는 그런 사영을 보며 근엄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정반대로 패닉상태였다.
'이건 뭐지? 성장? 아니 그 이전에 이건...'
누리의 계획은 압도적인 힘을 보여줘 어둑시니를 스스로 무릎 꿇게 만드는 것.
그런데 어째서인지 어둑시니는 누리의 말에 갑자기 성장을 이뤄내더니 오러 자체의 성질이 변화해버렸다.
'....흑마력?'
그것도 타고나지 않는 이상 사용하지 못하는 흑마력으로 말이다.
하지만 모로 가도 서울로 가면 된다고 일단 목표를 이뤘으니 일단 상황부터 수습하고 본다.
서브퀘스트: 어둑시니의 목표이자 보상은
"잘 부탁한다. 사영."
암살자 동료영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