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 이능사회
"응응. 괜찮아. 다친 데 하나도 없다니까. 아! 무슨 경호원을 늘려! 안 그래도 병원 사람들 쳐다보는 것도 쪽팔린데. 진짜 하지 마. 알았어. 알았어. 응. 끊어."
뚝.
"휴우. 하여간 주책이라니까."
"어떻게 됐어?"
"하던 일 멈추고 한국 들어오겠다는 거 겨우 막았어. 이번일 마무리 짓고 들어오시겠데."
경호원이 부상을 당했기에 침입자에 대해 아예 숨기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병원 측, 경호회사 측 관계자들과 얘기하여 경찰에는 신고하지 않기로 합의를 봤다.
침입자가 있었다는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면 질타를 받을 것이 뻔하니 어떻게든 막아야 했던 경호회사나 병원 측관계자들은 가연의 의견을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하지만 경호회사를 직접 고용한 가연의 부모님께 알려지는 것은 피할 수 없었고 가연이 거의 한 시간을 가까이 통화해 부모님을 안심시킨참이었다
"다행이네. 쿡쿡."
"이 쌍년이 남이 고생하고 있는데 웃기는."
말은 그렇게 해도 같이 웃고 있던 가연은 하나에게 질문했다.
"그나저나 너희 오빠는 오늘 오시긴 하는 거야? 벌써 저녁 다 돼 가는데."
"글쎄...."
오빠이야기가 나오자 하나의 표정이 흐릿해진다.
갑작스러운 침입자의 공격.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 나타나 자신과 가연을 지켜 준 누리 오빠.
'오빠....'
분명 자신의 하나뿐인 오빠가 맞지만, 오늘따라 너무 낯설게만 느껴졌다.
평소라면 그냥 별생각 없이 전화하여 언제 오냐고 물어봤겠지만, 지금은 통화버튼 누르기를 몇 번이고 망설이다 결국 손을 내리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얼굴 자세히 본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은데 꽤 잘생겼더라? 너희 오빠."
"?드디어 미친 거니? 그 얼굴이 잘생겼다고?"
하지만 그런 고민도 도저히 그냥 듣고 지나갈 수 없는 가연의 어처구니없는 말에 날아가 버렸다.
"흠흠. 아니...뭐랄까. 야성적이면서 차가운 느낌이랄까."
"대체 그게 무슨 개소리야."
하나의 반문에도 가연은 아까 전 상황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가연을 노리는 검은 옷의 침입자. 경호원도 순식간에 당해버리고 이제 끝이라고 생각한 순간.
마치 이야기 속의 영웅처럼 나타난 하나의 오빠.
사자의 갈기같이 휘날리는 머리에 시릴 듯이 차가운 눈동자는 가연의 머릿속에 화인처럼 박혀버렸다.
자신을 구해주고 별일 아닌 듯이 시크하게 사라진 그.
"사자 갈기가 뭐 어째? 정신 차려 이년아! 그거 그냥 머리 관리 안해서 더벅머리 된 거야! 그리고 뭐 차가운 눈동자? 그거 그냥 졸린 눈이라 게슴츠레 한 거라고!"
"너희 오빠 여자친구 없다고했지?"
"하. 이 망할 년이. 귓등으로도 안 듣네."
친구의 콩깍지에 한숨을 내쉬는 하나였지만 자신의 오빠가 그럭저럭 잘생긴 편이란 것은 어느정도 알고 있었다.
그저 꾸밀 줄을 몰랐을 뿐이지 제대로 꾸미고만 다녔으면 아마 여자 여럿 울리지 않았을까.
그렇게 친구의 주접을 얼마나 보고 있었을까.
똑똑.
[아가씨. 손님 오셨습니다.]
"아! 오셨나 보다. 네. 들여 보내주세요."
드르륵.
"너는 하루종일 여기있냐? 올 때마다 지 방에 있는 걸 본적이 없네."
"오빠."
방에 들어오자마자 하나의 안부를 확인하는 누리.
"몸은 괜찮아? 아까 확인하긴 했는데 다친 데는 없지?"
"응. 괜찮아. 그리고 오빠. 그.....고마워."
아까는 정신없어서 제대로 고맙다는 말도 못했던 것이 내심 걸렸던 하나는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우선 고마움을 표했다.
물론 평생을 싸워온 오빠였기에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하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피식.
"가족끼리 고맙기는."
스윽스윽.
동생의 어색해하는 모습이 귀엽다는 듯이 하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꼬리를 올리는 누리.
하나는 오빠의 따뜻한 손길에 복잡했던 머릿속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조금 낯설더라도 오빠는 오빠다. 언제나 나를 지켜주고 보호해주는 든든한 나의 오빠.
"저도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누리 오빠."
누리와 하나가 둘만의 세계에 빠져들려고 할 때 그 사이를 가연의 목소리가 가르고 들어왔다.
하나는 가연의 목소리에 편안한 느낌이 깨져 인상을 확 찌푸렸지만 누리는 대수롭지 않은 듯 그녀의 말을 받아준다.
"감사하긴 뭘. 가연이 맞지?"
"네! 기억하고 계셨네요!"
"하나 친군데 당연히 기억하지. 우리 하나 챙겨줘서 늘 고마워."
스윽스윽.
"헤헤헤."
하나에게 했던것처럼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실없이 웃음을 흘리는 가연.
하나는 그런 친구와 오빠의 모습에 왠지 모를 가슴속의 불편함을 느꼈지만 처음 느껴보는 느낌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하고 그저 눌러담을 뿐이었다.
질투라는 이름의 감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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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이제 말해줘. 아까 그 사람은 뭐고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진 건 또 뭐야. 아. 그리고 이 목걸이도."
침입자의 공격을 몇차례나 막아주었던 목걸이.
이 목걸이 또한 자신의 오빠에게 선물로 받은 것이다.
"좀 긴 이야기가 될텐데, 둘다 괜찮아?"
"응. 어차피 저녁시간되려면 좀 남았고 여기만큼 방음 좋은곳도 없으니까."
가연이 누리에게 물을 따라주며 맞장구쳤다.
"맞아요. 오빠. 얼마든지 편하게 있으셔도 돼요."
"그래. 고마워."
물을 받아마신 누리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 세상에는 특별한 힘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존재해."
이를테면 영화 속의 마법사, 이를테면 만화 속의 초능력자, 이를테면 무협소설 속의 무림인.
그들은 현실에도 실제로 존재하고 그들만의 사회를 이뤄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종류는 셀 수 없을정도로 많지만 일반적으론 '이능력자'라고 총칭하며 그들만의 사회를 '이능사회'라 부른다.
"그럼 오빠도 이능력자란거야?"
"맞아."
딱.
누리가 긍정하며 오른손으로 손가락을 튕기자
화륵.
허공에 작은 불꽃이 생겨났다.
""우와아.""
처음보는 신비한 현상에 둘은 그저 감탄사를 내뱉을 뿐이었지만 만약 이능력자, 그중에서도 마법사가 보면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영창과 시동어의 완전생략.
물론 그저 의지만으로 발현하는 초능력이라는 힘이 있긴 했지만 마법과는 메커니즘이 전혀 달랐고,
누리가 사용한 것은 엄연히 마력을 공명시켜 사용한 마법이었다.
어떻게든 마법의 발현속도를 높이기 위해 수백 년간 연구를 지속해오던 상아탑의 지상과제를 아무렇지 않게 행하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이자리에 그 사실을 알만한 인물은 없었다.
"중세시대쯤에는 대놓고 활동했었는데 근세부터 전쟁 몇 번 치르고 협의 끝에 일반인들 모르게 살기로 결정 했지."
누리는 간단하게 말했지만, 근세의 이능사회는 혼란에 혼란을 거듭했다.
일반인과 일반인의 전쟁. 일반인과 이능력자의 전쟁. 이능력자와 이능력자의 전쟁.
몇 가지 전쟁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지고 대혼란이 수십 년동안 지속되다보니 결국 수뇌부들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일반인의 사회와 이능력자의 사회의 분리를.
당시 가장 득세하고 있던 교회를 필두로 여러 단체의 장들이 합의하여 이능력자의 흔적을 역사에서 지워나갔고 현대에 이르러선 전설과 같이 그 흔적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흔히들 말하는 마녀사냥이 대표적인 흔적.
"그럼 이 목걸이는?"
"아. 그건 마도구라는건데 이능력자가 아니어도 이능을 쓸수 있게 해주는 물건이지. 그 목걸이는 그중에서도 귀한 아티펙트. 참고로 팔찌도 아티펙트야."
누리의 팔에도 그녀와 같은 모양의 팔찌가 있었는데 한쪽이 위험에 빠지면 자동으로 신호가 가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팔찌로 신호를 보내고 목걸이로 시간을 버는 거지."
"그렇구나...."
하나는 누리의 말에 살포시 미소 지으며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물론 하나, 네 병실에서 자고 있었으면 침입조차 못했을 테지만."
혹시모를 경우를 대비해 누리는 하나의 병실에 온갖 마법진을 떡칠해 준 요새급으로 만들어놓았다.
아마 하나의 병실이었다면 8호가 침입하려던 순간 흔적조차 못 남기고 죽었겠지.
"죄송해요. 오빠. 제가 여기서 자자고 하나한테 떼를 써서...."
"괜찮아. 무사하면 됐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지만 다음에 묻기로 한 하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의문을 질문했다.
"아까 그 사람이 가연이를 노린 이유는 뭐야?"
"아! 맞다!"
이야기에 빠져들었던 가연은 그제서야 자신이 노려졌다는것이 떠올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리쳤다.
"야. 넌 네 목숨이 왔다갔다했는데 그걸 까먹냐?"
"헤헤. 깜짝 놀라긴 했는데 네가 꼭 안아주기도 했고 오빠 모습이 워낙 인상깊게 남아서...."
"하여간."
"아, 아무튼. 그 사람이 저를 왜 노린 거에요? 저는 물론이고 저희 부모님도 원한 살만한 일을 하실 분들은 아닌데..... 헉. 설마 우리부모님도 이능력자?"
"아니. 그건 아니고."
가연의 망상을 곧바로 차단한 누리는 알아낸 정보를 말해주기 시작했다.
"우선 가연이 네가 걸린 병. 거기서부터 설명해야 돼."
"제 병이요? 제가 걸린 병은 이름도 안정해진 불치병이라고 의사가 그러던데요?"
"정확히 말하자면 네가 걸린 병은 일반적인 병이 아니야."
"일반적인 병이 아니라면....?"
"생명력의 그릇, 즉 코어 문제가 생긴 거지."
모든 생명체는 기본적으로 흔히 생명력이라 칭하는 기운을 가지고 태어난다.
이는 그 어떠한 에너지보다 순수한 기운으로 이 생명력의 양에 따라 사람의 수명이 정해진다.
그리고 이 생명력을 담고 있는 그릇을 코어라고 부르는데 가연은 이 코어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코어에 금이 가서 생명력이 세어나가고 있는 거야. 생명력이 남들보다 빠르게 소모되니 신체가 빠르게 약화되고 이른 나이에 자연사하게 되는 거지."
이능사회에서도 불치병에 가까운 취급을 하는 증상.
"잠깐. 불치병에 '가깝다'는건 불치병이 아니란 거야?"
"그래. 정말 어렵지만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몇 가지 있어."
"저, 정말요?"
가연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떨리는 목소리로 누리에게 되물었다.
당연히 가연도 처음에는 어떻게든 살아보기 위해 발버둥처봤다.
쓰러지면서도 운동을 멈추지 않았고 부모님이 구해 다 주신 몸에 좋은 것들은 망설임 없이 전부 입에 넣고 봤다.
하지만 그럴수록 상태는 더욱 악화되어만 갔고 결국 가연은 모든 걸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모든 걸 포기하고 있었는데.
"치료가 가능하다고요?"
"확실히 가능해. 너희 부모님도 이번 사건에 엮인 이유가 네 치료법을 찾다가 그런 거니까."
코어를 치료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수 있는데.
첫번째로 사제에게 치료받는 것.
단 코어를 치료하려면 추기경급의 신성력으로도 치료할 수 없고 교황이나 성녀에게 직접 치료를 받아야 하기에 불가능이나 다름없다.
교황이나 성녀가 고작 사람 하나 치료하려고 한국까지 행차할 리 없으니까.
다른 하나의 방법은 바로 영약.
세상의 곳곳에는 비이상적으로 자연의 에너지가 집중되는 장소가 존재하고,
그런 장소에서 수백 년간 집중된 에너지를 쬐며 자란 생명체 또는 물건은 엄청난 에너지를 지니게 된다.
그렇게 비정상적인 에너지를 지닌 것을 영물이라하는데 그 영물을 다시한번 정제하여 만들어낸 것이 바로 영약이다.
"당연히 영약은커녕 영물도 구하는 게 하늘의 별 따기이지만 교황이나 성녀보단 확률이 높겠지."
가연의 부모는 이능사회와 연관 점이 없었지만 가연을 치료하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았고 결국 이능사회와 접점이 생긴 것도 모자라 천운이 닿아 영약까지 구하게 되었다.
문제는 가연의 부모가 영약을 구했다는 정보가 퍼져버렸다는 점.
"다행히 너희 부모님은 만만치 않은 이능력자가 같이 있어서 괜찮았지만 정작 영약을 사용할 너에겐 아직 별다른 방비가 안 돼 있다는 점을 파고든 거지."
이능사회를 접한지 얼마 안 되었기에 일어난 실수. 이 빈틈을 영약을 노린 자가 파고든 것이다.
그걸 운 좋게 누리가 막은 것이고.
"자. 여기까지 설명 끝. 질문 있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