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속 중간보스에 빙의했다-9화 (10/60)

EP.9 이능사회

"......."

"......."

누리는 길게 이어지는 침묵에도 차분히 기다려줬다.

솔직히 이런 이야기를 듣고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겠는가?

사기치지 말라고 난리나 안치면 다행이지.

하나와 가연은 누리의 생각대로 각자 혼란스러운 머리를 정리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진짜 치료할수 있다고?'

가연은 나을 수 있다는 사실이 도저히 실감 나지 않았다.

병을 끌어안고 산지 햇수로만 십 년, 병원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오년이 넘었다.

'이제 나도 평범하게 살 수 있는거야?'

그토록 바라고 꿈꾸던 평범한 삶. 포기했다 하더라도 언제나 가슴 한켠에 그리고 있던 바람.

그 바람이 이뤄질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갑작스레 다가오자 가연은 이 감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오빠....'

하나의 머릿속은 온통 오빠의 걱정뿐이었다.

부모님께서 돌아가시기 전까지만 해도 오빠는 분명한 일반인이었다.

대학도 집에서 다녔기에 1년 내내 얼굴 보지 않는 날이 없었는데 자신이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내가 혼수상태에 빠진 1년.'

그사이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능력자니 이능사회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저리도 자세한 사정을 알고 있는 걸까.

이는 그저 누리가 빙의자였기에 게임의 설정을 자세히 알고 있을 뿐이었지만,

하나도 질문하길 망설이고 질문을 한다 해도 누리가 사실을 말할 수도 없으니 그저 오해가 깊어져 갈 뿐이었다.

"오ㅃ..."

결국 망설임을 끝내고 하나가 입을 때려는 찰나.

"아! 그리고 오늘내일로 너희 부모님께서 사람 하나 보낼 건데 내 이야기는 적당히 둘러대 줘."

이곳에 오기 전 사영에게 들었던 정보를 하나 기억해낸 누리가 말했다.

"저희 엄마아빠가요? 경호원은 추가 안 하기로 했는데."

"그러면 암행 경호일 수도 있겠네. 아마 이능력자 쪽에서 한명 올 거야."

세상 어떠한 부모가 자식이 습격받았는데 가만히 있겠나.

사영에게 들은 정보에 따르면 가연의 부모와 연이 닿은 이능력자가 힘을 써 가연에게 경호원 하나를 붙였다고 한다.

빠르면 오늘 안에 늦어도 내일까진 도착하겠지.

"어차피 날 알아보지도 못하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내 이야기는 하지 말고."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하나는 문득 드는 불안감에 입을 열었다.

"오빠."

"응? 왜?"

"혹시.....범죄자가 된거야?"

"........뭐?"

너무 뜬금없는 하나의 말에 순간 할 말 잃은 누리.

"그건 또 무슨 참신한 개소리니 동생아?"

"아니. 그렇잖아. 경찰에 신고하지 말라는 것도 그렇고 오빠 이야기 하지 말라는 것도 그렇고....."

생각해보면 수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딱히 회사에 다니거나 하지는 않는 것 같은데 아무리 부모님의 보험금이 있다고 해도 비싼 1인실 병원비를 아무렇지 않게 지불하고, 자신에게도 써도써도 남을정도로 많은 용돈을 매달 쥐여줬다.

게다가 이 목걸이와 팔찌도 설명을 들어보면 보통물건이 아닌데 선물로 준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했다.

"아니....그게....허어. 참."

너무 할 말이 많으니 되려 말이 나오지 않는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오해를 풀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으니.

"아니야."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의심이 담기기 시작하는 하나와 가연의 눈에 일단 부정하고 보는 누리.

"그럼 뭔데."

"그게...."

돈의 출처야 게임에 있던 파밍지역에서 재료를 캐내 암시장에 팔아 치운 것이니 게임이야기만 빼면 설명할 수 있지만,

신분을 숨기는 이유를 설명하자니 막막해진다.

'내가 '죽은자들의 왕이다!'라고 말할 수도 없고.'

결국 적당히 둘러대는 수밖에 없었다.

"원래 이쪽 일을 하다 보면 어쩔수 없이 적이 생기거든. 그래서 최대한 신분은 숨기는 게 좋아. 언제 어디서 공격당할지 모르니까."

실제로 이능사회에서 활동하다 보면 적이 늘어나기 마련. 종종 습격이 일어나기도 한다.

'마구잡이로 습격했다간 거대단체들한테 찍히니 웬만해선 하지 않지만.'

아직 이능사회의 구조에 대해 모르는 둘이기에 통할 수 있는 변명이었다.

이능사회에도 공권력과 협조하는 각 나라의 거대단체들이 경찰 역할을 하며 나름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

"....진짜지?"

하나가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내기에 이마에 딱밤을 먹여준다.

딱!

"아팟! 야! 미쳤냐?!"

딱밤 한번에 야 소리가 나오는 동생의 모습을 보니 절로 웃음이 새어나온다.

"후후. 그래. 이래야 김하나지. 언제부터 네가 나를 걱정했다고 그래?"

"아 진짜. 걱정해줘도 지랄이야."

"넌 걱정 말고 대학갈 준비나 해."

"흥.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신경쓰지마."

"그래그래."

어떻게든 말을 돌리는 데 성공한 누리는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누리는 그녀들에게 숨긴 것이 한가지 있었다.

바로 어둑시니에게 가연을 살인 청부한 집단의 이름.

그 이름을 사영에게 들었을때 얼마나 놀랐는지,

어쩌면 운명이란 게 실제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환현그룹.

한국 재계서열 3위이자 한국의 3대 이능집단 중 하나인 환현가문의 대외적인 이름. 그리고

'빌어먹을 악연이 말이야.'

누리의 부모님을 죽인 당사자가 있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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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게 무슨 개소리야?"

높디높은 마천루들이 줄지어 서 있는 도심. 그중에서도 유난이 높은 건물의 한 집무실에서는 고성이 터져 나왔다.

"말씀드린 데로 약속된 방법으로 연락해봤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지금 그 새끼들이 내 돈을 먹고 튀었단 말이야?"

"현재로선 확인되지 않습니다."

탁. 탁. 탁.

보고받던 남자는 계속해보란 듯이 손가락으로 책상으로 두드렸다.

"생각할 수 있는 경우는 두 가지. 본부장님의 말씀대로 돈을 먹고 잠적했거나,"

보고받는 남자나 보고하는 남자 둘 다 이 경우가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

신뢰를 업으로 먹고사는 청부조직이, 그것도 무려 백 년을 넘게 암흑가에서 청부업을 이어온 조직이 겨우 푼돈 좀 뜯자고 잠수를 탄다?

있을수 없는 일이었다.

"의뢰에 실패해 역공을 받아 조직이 전멸했을 경우입니다."

하지만 두 번째 경우의 수는 더욱더 말이 안된다.

어둑시니는 한국의 청부조직 중에서도 뒤처리가 깔끔하기로 소문난 곳.

아무리 의뢰에 실패했다 해도 뒤를 잡혔다는 것조차 믿기 힘든데 역공을 받아 전멸?

방금전 말했던 데로 어둑시니는 백 년을 넘게 이어온 청부조직.

조직의 최정예인 한자릿수 조직원은 모두 오러유저 중에서도 완숙의 경지인 익스퍼트였고,

수령이자 조직명과 같은 이름을 쓰는 어둑시니는 무려 마스터급의 강자였다.

"일단 가문을 통해 정보를 모으고 있으니 기다려보시죠."

"그럼 엘릭서는?"

"한윤의 사장이 퀸즈가드 측을 통해 이능력자를 딸의 호위로 보냈습니다."

"씨발."

후우.

본부장이라 불린 남자는 담배를 깊게 빨며 한숨을 내쉬었다.

모조 엘릭서. 현대에 와서는 반쯤 전설 취급받는 엘릭서를 모방해 만든 물건.

모방해서 만들었다곤 해도 진품의 효과가 효과인지라 모조조차도 기적에 가까운 효과를 낸다.

죽어가던 사람이 마시면 멀쩡해지고 이능력자가 마시면 자신의 경지를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다.

"빌어먹을 영감탱이. 내가 팔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다 죽어가는 년한테 넘겨?"

엄청난 효과만큼 장인의 경지에 이른 연금술사조차 한평생을 들여 하나를 만들 수 있을까 말까 한 물건이었다.

실제로 현재 전 세계에 확인된 모조엘릭서의 개수는 단 다섯 개뿐.

그중 그나마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물건을 작업하고 있었는데......

"나가리네."

퀸즈가드에서 호위를 보낸 만큼 딸 쪽도 건드리기 껄끄러워졌고 다른 네 개의 주인을 노리자니 꽁꽁 숨겨두고 꺼내지 않을 인사들만 한가득 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계속 틈을 찾아보고, 어둑시니쪽은 나한테 즉각 보고해."

도망이든 실패든 고작 일반인 하나 죽이지 못하고 일을 망쳤다.

"대가는 치르게 해줘야지."

"그리고....한가지 더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만."

"중요한 거 아니면 나중에 해. 이제 약속시간이니까."

본부장의 말에 보고하던 남자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안그래도 방금 전의 보고로 기분이 땅바닥으로 추락한 본부장이었기에 여기서 '약속'까지 늦춰 심기를 건드리면 재떨이가 날아올지도 모른다.

"네. 알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찜찜하기에 조사했던 정보.

한윤기업의 딸을 조사할 때 그녀와 하루종일 붙어있던 여자가 왠지 낯이 익어 조사했었다.

조사결과 여자의 정체는 2년 전 본부장이 일으킨 교통사고의 피해자.

부모는 즉사, 딸은 식물인간이 되었고 넷 중 아들만 살아남은 사고.

사실 아들 쪽도 본부장이 직접 죽였다기에 건드리지 않았던 것인데 어째서인지 살아있었고 뭔가 눈치챈 듯 귀찮은 짓을 하려고 했기에 권력으로 찍어눌러 줬었다.

그당시 사고의 처리를 직접 지휘했던 남자가 그였기에 기억하고 있던 것이다.

'그땐 분명 식물인간 상태라고 했었는데 말이지.'

어째서인지 식물인간인 채로 누워있어야 할 여자가 멀쩡히 돌아다니고 있었기에 보고를 할까 싶었지만,

'어차피 목격자도 없었고 증거조작도 깔끔하게 했으니 상관없겠지.'

지금 쓸데없는 말을 했다가는 본부장의 화가 자신에게 튈 수도 있다.

결국 남자의 머릿속에서 한구석으로 밀려난 정보.

그렇기에 남자는 알지 못했다.

자신이 재떨이를 피하고자 넘어간 정보가 거대한 폭풍이 되어 돌아오고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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