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속 중간보스에 빙의했다-10화 (11/60)

EP.10 레이첼

인천공항.

세계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큰 규모의 공항으로 하루 이용객이 수십만명에 달하는 장소이다.

인천공항 한복판.

힐끔. 힐끔.

오늘또한 수많은 사람이 지나가고 있어야 할 장소에서 진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멈칫.

지나가던 사람이 걸음을 멈추더니 어느 한 곳을 힐끔거리는 것 아니겠는가.

심지어 한두 명이 아닌 수많은 사람이 동일한 행동을 하고 있으니 길이 막히는 것은 당연한 수순.

"하아~."

그들의 시선이 모이는 곳에는 한 명의 여자가 정장차림을 한 채 서 있었다.

진짜 황금으로 실을 짜낸듯한 찬란하게 빛나는 금발.

날렵한 코는 한 치의 어긋남이 없고 하얀 피부는 백옥이 부럽지 않다.

그런 하얀 피부와 대조되어 더욱 강렬한 존재감을 내뿜는 새빨간 입술.

마지막으로 투명한 하늘을 떠오르게 하는 스카이블루의 커다란 눈동자까지.

정말 이 세상의 것이 맞나 싶은 미모의 여자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고 있으니,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제자리에 서서 뒤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하아아~."

정작 그런 현상을 일으킨 당사자는 주변에 전혀 관심이 없는 듯 더욱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었지만.

금발의 여자. 레이첼은 이 상황이 도저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퀸즈가드의 일원이자 영예로운 로열나이트인 자신이 이런 변방까지 와서 기껏 하는 일이 고작 여자한 명 호위하는 것이라니.

아무리 마스터 나이트의 명령이라지만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그냥 적당히 수습 녀석들이나 보낼 것이지. 망할 영감탱이."

퀸즈가드의 수장이자 영국을 대표하는 강자. 마스터 나이트.

레이첼의 아버지이기도 한 그가 평생을 영국에서 수련만 해온 딸의 견문을 넓히기 위해 그녀를 한국에 보낸 것이다.

물론 그녀는 거절하려 했지만 퀸즈가드의 수장으로서 명령을 내린 이상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퀸즈가드임을 누구보다 자랑스러워하는 그녀이기에.

"하아. 그래도 몇 주 뒤에 직접 오신다니까 그때 돌아갈 수 있겠지."

그때까지만 어떻게든 참고 버티자 다짐하며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그녀.

"이, 익스큐스..."

"꺼져."

"넵."

다가오는 머저리를 쫓아내고 택시에 탑승해 능숙한 한국어로 목적지를 말했다.

"한국대 병원으로 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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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누리도 처음 환현기업이란 이름을 찾아낸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힘을 키우기 바빴으니까.'

누리가 죽은자들의 왕으로 각성했다 하더라도 곧바로 힘을 다룰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기에 힘이 익숙해지는 것만으로도 약 일 년의 시간을 허비했다.

힘이 익숙해진 직후는 우선 혼수상태인 하나에게 사용할 영약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고

'하나를 깨운 뒤에는 계획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려고 바쁘게 돌아다녔고.'

그동안 복수를 잊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날이 지날수록 복수심 더욱더 거세게 타올랐다.

하지만 복수보단 가족이 먼저다.

부모님을 부활시키기 위해선 압도적인 힘이 필요하고 힘을 키우기 위해선 다른 세력, 특히 교회의 감시망에 발각되어서는 안된다.

'흔적을 지웠어도 강 목사의 일은 교회에서 눈치챘을 테지.'

교회.

이스트헌터스토리의 세계관에서 가장 강대한 세력 중 하나.

마스터급의 성전사와 사제가 즐비해 있고 수십, 수백만의 신자를 토대로 거대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기에 정보력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런 교회가 축성탄이 사용되었음을 모른다는 것은 너무 낙관적인 생각.

'직접적인 추적이 없는 이유도 눈치는 챘지만 흔적이 없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서일 테고.'

실제로 사영에게 들은 정보에 의하면 약 2년 전부터 한국  내 교회 정보원의 숫자가 늘어났다고 한다.

단서가 없으니 물량으로 커버하려는 거겠지.

'설마 아직도 쫓고 있을 줄이야. 2년이나 지났으면 포기할만한데. 독한 것들.'

아무튼 숨어다니며 힘을 키운 지 2년이 다 돼갈 무렵,

"망할 년. 만날 때마다 지랄이 점점 심해지네."

오랜만에 하나의 병문안을 마치고 저녁쯤 집으로 돌아가던 길.

"......!"

".....!"

저멀리서부터 고성이 들려왔다.

근처에 술집이 많은 거리가 있었기에 취객이겠거니 하고 무시한 채 갈 길을 가려 했지만.

"..이...년이!"

"꺼.....레기야!"

고성이 점점 누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후우."

귀찮은 일에 엮이지 않으려 했지만 경찰에 신고만이라도 할까 하고 핸드폰을 꺼내 112에 전화하려던 순간.

"야 이 씨발년아 거기 안 서!"

"꺄아악!"

멈칫.

누리는 통화버튼을 누르려던 손가락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여자의 비명소리에 같잖은 영웅심리가 발동된 것이 아니라,

비명소리 직전에 들린 쌍욕을 뱉어낸 목소리.

분명 낯익은 목소리다.

'사고를 당해 기억에 혼란이 오신 것 같은데...'

'사고로 망가진 건지 블랙박스 메모리가 읽히지 않네요.'

'여기서 그렇게 떼써봤자 아무것도 나오지 않습니다.'

지금도 종종 꾸는 악몽에서 나오는 목소리 중 하나.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진상을 알기 위해 어떻게든 발버둥을 치고 있을 때.

내게 무력감을 심어준 장본인.

"왜? 신고하게? 해봐 씨발년아. 내가 경찰이야 경찰."

'좆같은 새끼가 다 된 밥에 재를 뿌리고 있어.'

"닥치고 가만히 있어."

'닥치고 얌전히 있어.'

쾅!

"쿠억!"

아. 저질러버렸다.

쿠당탕탕!

참지 못하고 나가버린 주먹에 중년의 남자가 날듯이 굴러간다.

"에? 에?"

협박당하던 여성은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얼이 빠진 표정으로 당황한 소리만 내고 있었다.

"하아."

누리는 그 모습에 한숨을 내쉬며 참지 못한 자신을 질책하고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세요?"

"아? 아! 네! 괜찮아요."

그제서야 정신차린 여자는 조금 상황파악이 됐는지 감사인사를 전해왔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흑. 저 진짜 너무 무서워서 흑."

"자자. 진정하세요."

누리는 주머니에 있던 손수건을 꺼내 건네며 여자를 다독였다.

"감사합니다. 크흥."

"어. 음. 네."

망설임 없이 손수건에 코를 푸는 여자를 보며 당황한 누리는 이내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여자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오늘 일은 경찰에 신고하지 말아주실 수 있을까요?"

"네?"

"저 남자 진짜 경찰이거든요. 어차피 신고해봤자 증거도 없어서 유야무야 될테고."

여자를 달래주며  주변을 살펴본 결과 목격자도 없고 cctv도 없는 골목이기에 신고해도 큰 처벌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럼...."

"아. 걱정 마세요. 제가 개인적으로 볼일 있어서 그런거니까. 아마. 깨어나면 아가씨 얼굴도 기억 못할 겁니다."

틀린말은 아니다.

'산채로 깨어난다고 한 적은 없으니까.'

그렇게 불안에 떠는 여자를 안심시켜 보내고 기절해있는 남자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것도 운명이려나."

부모님이 돌아가신 사고의 담당형사이자 경찰의 뒤에 무언가 있다는 확신을 준 장본인.

"읏차. 어떻게 생각해요? 장 형사님."

대답할리 없는 장형사를 어깨에 들춰맨 누리는 흑마력을 일으킨다.

{Portal.(포털)}

공명하던 흑마력이 허공의 한 점으로 모이고 압축되어 하나의 '문'을 만들어낸다.

누리가 망설임 없이 문 안으로 들어가자 순식간에 사라지는 문.

.....

아무도 남아있지 않은 골목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금 정적을 되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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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반항은 없었다.

일반인인 장 형사가 고문을 버틸 수 있을 리 없었고 있는 대로 전부 털어놨을 뿐.

흔하디 흔한 이야기.

재벌2세가 마약을 한 채로 사고를 쳐 사람을 죽였고, 그것을 덮기 위해 언론과 경찰에게 손을 썼다. 라는

드라마에서 한 번쯤 봤을 법한 클리셰.

드라마로 봤을 때는 감정이입까지 해가며 쌍욕을 했었지만 정작 당사자가 되어보니 생각보다 침착할수 있었다.

"환현그룹, 환현그룹....그래. 모조엘릭서를 노리던 게 환현가문이었다 이거지?"

분노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쓸데 없는 곳에 표출하지 않을뿐

눌러담고 눌러담아, 더욱 단단하고 날카롭게 분노를 제련한다.

적의 목을 가르고 심장을 꿰뚫을 수 있도록.

"게임에서 제작을 제외하고 얻을 수 있던 모조 엘릭서는 4개."

사영에게 얻은 정보에 의하면 현시점에 세계에 존재하는 모조엘릭서는 5개.

즉 게임의 시작 시점인 3년후까지 사용되는 모조엘릭서는 하나뿐.

내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이 모조엘릭서는 환현가에서 가져갔겠지.

"환현가, 한윤기업, 퀸즈가드."

모조엘릭서에 얽힌 조직들.

여기에 어둑시니또한 끼어있지만, 누리의 손에 괴멸 직전까지 갔으니 제외.

".....아니. 제외할 필요가 있나?"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가는 한가지 생각.

사영을 살려둔 이유는 동료와 조직의 부재에서 오는 한계를 느꼈기 때문.

괴멸직전이긴 하지만 정예인 한자릿수는 절반이 살아남았고 청부조직인만큼 넘쳐나는 게 돈이니 그 외 조직원들은 다시 키우면 된다.

"잘만하면.....엮을 수 있겠군."

씨익.

갑자기 떠오른 아이디어였지만 썩 나쁘지 않아 보였기에 한번 구체화해본다.

그렇게 벤치에 앉아 고심하길 얼마나 지났을까.

"응?"

누리의 기감에 잡힌 기척.

상당한 강자다.

단단하고 강직한, 마치 성벽을 보는 듯한 오러.

기사다.

"퀸즈가드에서 직접 보냈나? 의외네."

오러의 성향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기사들은 좋은 말로는 강직하지만 나쁜 말로는 똥고집이 강하다.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굽히지 않는다.

어떠한 외압에도 무너지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지켜낸다.

그렇기에 강하다.

"퀸즈가드의 이름으로 용병이나 보낼 줄 알았더니."

기사로서의 명예를 무엇보다 중시하는 그들이 여왕의 곁을 뒤로하고 자신의 고국을 떠난다?

여왕이나 마스터 나이트의 명령이 없는 이상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가연이의 부모가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보군."

즉 이 일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어있는 인물이자 모조엘릭서의 주인인 마스터 나이트의 입김이 들어갔다는 것이다.

웅성웅성.

누가 왔는지 일단 얼굴이라도 확인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자니 병원의 입구부터 웅성거림이 번져간다.

저벅저벅.

조금씩 모여들기 시작하는 사람들 사이를 뚫고 나오는 한 명의 여자.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듯한 미모의 여자는 기사다운 강직한 표정을 짓고 병원으로 걸어 들어간다.

부릅!

그리고 여자의 얼굴은 본 누리는 눈을 찢어져라 뜰수 밖에 없었으니.

그녀의 미모에 놀란 것이 아니다.

처음 보는 얼굴이 아니다. 아니 익숙한 얼굴이다.

"왜 이시점에 저 여자가....."

누리가 경악할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누리가 이 세상에 빙의한 이후로 처음 보는 메인 NPC이자.

메인히로인중 하나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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