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속 중간보스에 빙의했다-11화 (12/60)

EP.11 레이첼

메인히로인. 주인공과 함께 이야기의 중심에서 활약하는 주인공의 짝.

게임의 공략게시판에 클리어 팁을 묻는 질문에 백이면 백 절대 빠지지 않는 요소가 바로 메인히로인이다.

그 외모는 디자이너가 영혼을 갈아 넣어 제작해 각자 개성이 뛰어난 미모를 소유하고 있었고,

각종 직군에 포진되어있는 메인히로인들은 각각의 직군 안에서 최상의 능력을 발휘했다.

각각의 메인히로인 팬덤이 따로 있을 정도.

이런 뛰어난 능력 때문인지 하렘 루트 따위는 없다는 듯이 오직 한 명만 파티 원으로 넣을 수 있었는데,

오죽하면 제작사가 밸런스 붕괴를 막기 위해 메인히로인이라는 설정을 억지로 집어넣었다는 소문이 정설로 자리 잡을 정도였다.

'이름이 분명.....'

그리고 지금 눈에 보이는 여자가 바로 기사 직군의 메인히로인.

"레이첼."

너무 당황한 나머지 속으로 생각한다 는게 그만 입 밖으로 중얼거려버렸고.

멈칫.

아무리 작은 중얼거림이라도 초월을 한 발자국 앞둔 기사의 청력을 피해 갈 순 없었다.

"아차."

휙!

내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정확히 나를 노려보는 여기사.

메인스토리 중반부에서나 나오는 그녀가 벌써 등장했다는 것에 놀라 평소라면 하지 않을 실수를 해버렸다.

저벅저벅.

여기사는 곧바로 누리를 향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부모님을 부활시키겠다고 마음먹은 시점부터 메인스토리에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이스트헌터스토리 또한 여느 게임처럼 최종 보스를 막지 않으면 결국 세계가 멸망하게 되는 스토리.

결국 어쩔수없이 주요 엔피씨, 특히 메인히로인들의 스토리만큼은 영향이 가지 않게 하려 했는데....

'이것도 나비효과인가.'

누리도 나름 억울했다.

서브퀘스트에 등장하는 암살자 한번 막았다고 마스터 나이트가 직접 움직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대응방안을 정해야 한다.

발뺌할까? 그도 아니면 순순히 인정할까?

그때 누리의 눈에 들어온 무언가.

그것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누리는 곧바로 움직였다.

"!"

갑자기 움직이는 누리의 행동에 여기사의 걸음이 빨라졌지만, 누리가 한발 빨랐다.

철컥. 탁.

"아저씨. 신수동으로 가주세요. 빨리요."

"네~."

누리가 선택한 방법은 삼십육계 줄행랑. 도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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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우웅.

레이첼은 멀어져가는 택시의 뒤를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녀의 실력이라면 택시를 따라잡는 정도야 식은 죽 먹기지만 그녀는 기사.

힘을 함부로 휘두루지 않겠다, 는 기사의 맹세를 한 그녀로서는 겨우 택시 하나 따라잡겠다고 일반인들 앞에서 이능을 쓰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렇다고 임무를 내팽개치고 자신도 택시를 탈 수는 없는 노릇이니....

"....알고 행동한 건가?"

분명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은 남자.

자신을 알고 있다면 자신의 성격 또한 알고 있을 수도 있다.

"쯧. 너무 안일했군."

기사에게 방심이란 수치이거늘. 촌구석이라고 자신도 모르게 정신이 해이해졌나 보다.

"후우."

크게 심호흡을 하고 다시금 신체와 정신에 긴장을 불어넣는다.

이미 놓친 일은 어쩔수 없다.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면 된다.

비겁하게 변명하지 않는다. 자신의 잘못을 똑바로 직시하고 반성하며 고쳐나간다.

그것이 바로 명예로운 퀸즈가드의 자세.

저벅저벅.

지금은 임무가 우선이니 호위대상을 만나러 간다.

호위대상이 있는 병실에 도착한 그녀는 기존의 경호원을 통해 기별을 넣고 병실에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오늘부터 호위를 맡게 된 레이첼 램파트입니다."

"잘부탁드려요. 저는 한가연이라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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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우."

택시를 타고 병원을 한참 벗어나서야 누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진짜 안 쫓아 오네."

게임 속 레이첼의 설정을 떠올리곤 즉흥적으로 선택한 줄행랑.

안그래도 기사들은 강직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특출난 레이첼이 기사의 자존심을 버리고 쫓아오진 않을 것이라는 도박이 들어맞았다.

이미 레이첼이 이시기에 한국에 있는 것부터가 충분히 꼬인 상황.

괜히 레이첼과 누리가 만나 상황이 더욱 꼬이는 것 보단 아예 만나지 않아 변수를 줄이는 것이 낫다.

하지만 누리는 모르고 있었다.

그의 그런 판단이 레이첼에게 더욱 경각심을 주고 그녀의 머릿속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는 것을.

누리는 그저 당장의 상황을 회피했다는 것에 만족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하나가 퇴원하는 날의 아침이 밝았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는 노릇.

병실에 설치되어있던 마법진도 어제 새벽 몰래 가서 지우고 왔다.

병실의 정리는 업자를 고용해 정리하고 하나에게는 옷만 갈아입고 병원 입구까지 나오라고 했다.

나올때 절대 가연이와 같이 나오지 말라는 신신당부를 하면서.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않고 렌트한 차를 병원 입구와 조금 떨어진 곳에 주차하기까지 했다.

우우웅.

"어. 나왔어?"

[병원 입군데. 오빠 어디야?]

"잠깐만."

통화를 끊고 입구에 혼자 서 있는 하나를 확인한 뒤 앞에 차를 댄다.

찰칵.

차에 타자마자 타박을 하기 시작하는 하나.

"도대체 레이첼씨랑 무슨 사이길래 그래?"

일주일 전, 레이첼이 가연의 경호원이 된 이후부터 오빠의 행동이 너무 수상했다.

병원에 올 때마다 그녀의 위치를 물어보는 것은 기본이고 어쩔 때는 자신을 시켜 레이첼을 다른 곳으로 유인하기도 했다.

"혹시....전 여친이야?"

"그건 또 무슨 참신한 개소리니. 동생아."

"꼭 하는 행동이 안 좋게 헤어진 전 여친 피해 다니는 남자 같잖아."

"그...."

변명을 하려던 누리는 그동안의 자신이 한 행동을 돌이켜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진짜 전 여친 눈치 보는 남자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수상했으니까.

"....어쨋든 전 여친은 아니야."

"그럼 뭔데?"

".......그런게 있어. 자세히 알려고 하지 마. 다쳐."

"뭔 개소리야?"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받은 누리는 필사적으로 말을 돌렸다.

"퇴원한 기념으로 어디 놀러 갈까? 가고 싶은데 있어? 혹시 몰라서 렌트는 내일까지 해뒀으니까 말만해."

"됐고. 또 렌트야? 오빠 돈 많다며. 차 좀 사라."

"차? 글쎄. 지금까지 딱히 필요한일이 없어서...."

하나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은 차의 필요함을 느끼지 못했다.

어차피 숨어다녀야 하기도 했고 차보단 {게이트}를 사용하는 편이 훨씬 더 빠르게, 그리고 편하게 이동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제 하나가 퇴원했으니 한 대쯤 필요하지 않을까.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럼 한 대 살까?"

"응응. 기왕이면 나도 하나 사주고."

"그게 목적이었구만."

"헤헤."

귀엽게 웃으며 얼버무리는 하나의 반응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럼 대학 입학하면 선물로 하나 사줄게."

"진짜지? 아싸!"

"수능 자신 있나 봐?"

"그럼. 내가 검정고시도 한 번에 통과한 여자야."

하나가 사고를 당한 게 고2가 끝나가던 시점.

2년이나 지난 지금 다시 고등학교로 복귀하기도 애매했기에 자퇴처리를 했다.

그렇다고 대학까지 포기할 수 없던 그녀는 재활하면서 동시에 공부까지 병행하여 올해 봄이 끝나갈 때 쯤 검정고시를 한 번에 통과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그 기세를 빌어 곧바로 치루기로 한 올해 수능.

누리도 그녀의 실력이라면 목표로 한 대학을 어렵지 않게 통과할 것이란 건 알고 있었다.

자신과 달리 동생은 공부머리가 좋았으니까.

그래서 부모님도 하나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오늘은 아빠엄마 보러 가자."

하나도 부모님 생각이 났는지 부모님을 찾아뵙자고 한다.

"그래. 그러자."

누리는 핸들의 방향을 부모님이 안치된 납골당으로 돌리며 한가지 고민에 빠져들었다.

얼마 전부터 계속 이어진 고민.

'부모님을 부활시키겠다는 계획을 말해줘야 될까.'

재활하는 동안은 충격받지 않게 일부로 숨겨왔다.

하지만 얼마 전 자신의 힘을 일부분이나마 들켰고 이제 퇴원까지 했으니 알려줘야 하나 싶었지만.

'두렵다.'

겨우 회복한 하나가 또다시 충격받을 수 있음이,

부모님의 부활이 옳지 못하다고 나를 비난할 수 있음이,

두려웠다.

결국 이번에도 답을 찾지 못한 채 납골당에 도착했다.

"엄마, 아빠. 잘 지냈어?"

"저번에 검정고시 붙었다고 말했었지? 그래서 이번에 수능까지 보려고."

"오빠랑 다르게 나는 엄마아빠 닮아서 공부 잘했잖아."

"대학은 한국대 경영학과 지원했어."

"나합격하는거 보면 엄마아빠도 좋아했을 텐데."

"너무 설레발인가? 헤헤."

"엄마아빠도 거기서 응원해줘. 멋지게 합격할 테니까."

".....보고싶다."

그런 하나의 모습을 지켜보던 누리는 말하고 말고는 자신이 결정할 일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나뿐이 아니다. 하나 또한 부모님을 그리고 보고 싶어한다.

그녀도 부모님의 일을 알 자격이 있다.

충격을 받더라도, 나를 비난하더라도 내가 감내해야 하는 일이다.

결국 그녀에게 모든 걸 솔직하게 말했다.

"하나야. 만약, 만약에 부모님을 살릴 수 있다면 너는 어떻게 할 거야?"

납골당을 나와 운을 띄우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게임에 관한 이야기를 빼면 모든 것을 말했다.

내가 예언 속의 존재이며 많은 이능자들이 나를 적대할 것이고 부모님을 살리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죽일 것이란 사실까지 전부.

그렇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야기가 끝나고.

"...그럼...."

역시 충격을 받았는지 한참을 침묵하던 하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엄마 아빠를....다시 살려낼 수 있다는 거야?"

"솔직히 나도 확신할 수 없어. 부활이 확실히 되는지, 부활한다 해도 어떤 형태로 되는지."

게임속에서는 그저 아이템을 쓰면 사망한 캐릭터가 그대로 부활했지만, 이곳은 현실.

반드시 게임 속 설정대로 흘러가리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난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포기하고 싶지 않아."

그것이 매우 작은 확률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포기할 수 없었다.

그저 절망과 외로움만이 가득했던 전생의 나날들, 그런 나에게 처음으로 찾아온 행복이었다.

절대, 절대 포기할 수 없다.

스윽.

누리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하나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내밀어 누리의 머리를 품에 안았다.

스윽스윽.

"혼자 많이 힘들었지?"

오빠는 옛날부터 이랬다.

어릴때도 고민하는 일이 있어도 가족에게 말하지 않고 해결될 때까지 혼자 끌어안고 있었다.

해결하지 못해도 혼자 끙끙 앓으면서 가족에겐 절대 표 내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고민이 가족들에게 피해를 줄까 두려워하는 것 처럼.

이번일 역시 그랬겠지.

"바보같이."

혼자 얼마나 고민했을까? 혼자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런 생각에 절로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오빠의 머리를 품에 안은 채 쓰다듬었다.

"가족이잖아. 괜찮아."

하나의 위로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도 모르는 새에 심적으로 지쳐있었던 걸까.

누리는 어느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을 숨기기 위해 더욱 하나의 품속으로 숨어들어 갔다.

"후후. 울보 오빠네."

자신의 앞섶이 젖기 시작한 걸 눈치챈 하나는 오빠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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