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 밴시
"흠흠."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누리는 멋쩍은 듯이 연신 헛기침을 내뱉었다.
"푸흐흐."
그런 누리를 옆에서 실실 웃으며 보는 하나.
"왜 이제 와서 부끄러워?"
"크흠! 크흠!"
더 크게 헛기침을 하는 오빠의 모습을 보며 더욱 놀리고 싶었지만 하나는 이쯤에서 끝내기로 했다.
"나도 엄마아빠 살리고 싶어."
".....정말?"
"순리고 자시고 알 바야. 부모님 얼굴 다시 볼 수 있다는데."
혼수상태에서 깨어났을 때.
이미 부모님이 돌아가신지 1년이나 지났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오열했던가.
몇날며칠을 울며 쓰러지길 반복했다.
"그때 밤마다 울면서 생각했던 게 엄마아빠 다시 볼 수 있으면 영혼이라도 팔 수 있다는 거였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에 겨우 마음을 접었었지만, 만약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면?
"포기할 리 없잖아?"
"....고맙다. 하나야. 내가 꼭 살ㄹ...."
"그 대신!"
그때 누리의 말을 끊고 들어오는 하나의 외침.
"대신?"
"대신 나도 돕게 해줘."
"뭐?"
"나도 오빠 일 돕게 해달라고."
".....안돼."
절대 안 된다.
자신의 앞을 얼마나 많은 적이 가로막을지 모르는 상황.
만에 하나 메인스토리가 꼬이고 자신이 전면에 나서야되는 상황이 오더라도 자신은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피가 강을 이루고 시체가 산처럼 쌓이더라도.
그러니 동생 만큼은 포함 시킬수는 없다.
"왜!"
"나 혼자면 충분해. 넌 대학이나 열심히 다녀."
"아! 진짜!"
그뒤로도 집에 귀가 하는동안 하나의 설득이 이어졌으나 누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양보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는 법.
이 부분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
이기적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손에 피를 묻히는 건 자신 혼자만으로 충분하니까.
끝내 오빠를 설득하지 못한 하나는 마음이 상했는지 집에 도착한 후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나오질 않았다.
똑똑.
"들어갈게."
[들어오지 마.]
누리는 하나의 말을 무시하고 문을 연다.
철컥.
"...들어오지 말라니까."
"문 안 잠가놨잖아?"
하나의 성격상 진짜 들어오는 게 싫었다면 애초에 문을 잠갔을 것이다.
하지만 문을 잠그지 않았다는 것은 들어와서 화난 자신을 달래달라는 의미이다.
어릴때부터 정해진 약속된 행동.
침대에 엎드려있는 하나의 곁에 앉아 이름을 부른다.
"하나야."
"......"
"안된다는 건 너도 잘 알잖아."
".....그럼 오빠가 고생하는 걸 보고만 있으라고?"
"각자 할수 있는 일을 하는 거지."
"나도 도울 수 있어."
"나 혼자서 활동하는 게 편해서 그래."
지금은 아무리 내가 마스터를 제압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더라도 결국 언젠가 '공략'되는 존재.
그렇기에 언제나 퇴각을 염두에 두고 행동하여야 하기 때문에 혼자인 편이 목적을 이루기 수월하다.
이는 어둑시니를 복종시긴 지금도, 이후에 수하를 늘리더라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돕는다는 말은 안 할 테니까 나도 마법 가르쳐줘."
"마법을?"
"응."
사실 처음부터 하나의 목적은 이것이었다.
자신이 돕는다고 해도 오빠가 반대할 것은 뻔할 뻔 자.
그렇다면 이것을 미끼로 마법을 요구한다. 어차피 지금으로선 하나가 할수 있는 건 없다.
그러니 일단 직접 이능에 발을 담가 오빠가 어떤 일을 하는지, 또 어떻게 목표를 향해가는지 직접 파악한다.
그후 멋대로 도우면 오빠가 어쩔 거야. 받아들여야지.
이런 동새의 앙큼한 계획을 눈치채지 못한 누리는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솔직히 아티팩트로는 좀 불안하긴 한데.'
아티팩트는 만능이 아니다. 얼마 전에 실제로 아티팩트가 깨질 뻔도 하였다.
그러니까 차라리 하나가 직접 이능을 배워 위기상황에 대처하는 것이 시간끌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좋아."
누리는 결국 결정을 내렸다.
"진짜?"
"너 대학 입학하고 네가 재능이 있다는 전제하에."
물론 재능이 없으면 그냥 포기해야겠지만.
"그래. 대신 대학은 똑바로 다녀야 된다."
메인스토리가 시작되면 사회가 조금 휘청거리긴 하지만 스토리대로라면 금방 정상적으로 돌아간다.
그러니 학교는 졸업해두는 게 낫겠지.
"고마워!"
꼭.
금세 웃음을 되찾으며 자신에게 안기는 동생의 머리를 토닥여주며 뭔가 속은 느낌이 들었지만, 동생이 행복해하니 그냥 넘어가기로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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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원한 하나를 축하하기 위해 열흘 동안 하나와 놀기만 했다.
물론 사영에게 명령을 내리고 정기적으로 보고를 받았지만.
요 열흘 동안 정말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싸돌아다녔다.
부우웅!
지금 타고 있는 차 또한 하나의 성화에 못 이겨 구매해 놀러 다닐 때 요긴하게 쓰인 차이다.
놀러다니는데 무슨 스포츠카가 필요하다는 건지.
유명한 브랜드라는데 차를 잘 모르는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가격을 주고 구매하였다
어둑시니가 암살을 위해 세워둔 페이퍼컴퍼니를 통해서 구매했기에 귀찮은 과정은 전부 생략하였고.
덕분에 놀러 다닌 첫날부터 가는 곳 마다 시선이 모여들었지만 하나가 좋아했으니 됐겠지.
지금도 하나의 부탁의 탈을 쓴 강요에 의해 학원에 마중해주고 오는 길이다.
시선모이는게 그렇게 좋은 걸까.
"내 동생이지만 정말 관종이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엑셀을 밟는다.
부우웅.
얼마안가 도착한 집.
"끄으응. 역시 집이 편하네."
익숙한 소파에 주저앉으며 기지개를 쭉 핀다.
각성하면서 체력적인 한계는 사라지다시피 했지만, 아직 정신적인 피로감은 남아있다.
누리는 이 정신적인 피로감을 나름 즐기고 있는 중이었다.
육체는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지 오래.
그나마 남아있는 정신적인 한계가 아직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하아."
소파에 기댄 채 멍하니 앉아 있기만 한지 몇 분이나 지났을까.
띵동.
집안을 울리는 초인종 소리.
"택배라도 왔나."
하나가 집에 온 이후로 하루에 한 번꼴로 택배가 왔기에 별생각 없이 현관문을 열었다.
철컥.
"....누구?"
하지만 문앞에 서 있던 사람은 택배기사가 아니었다.
"......"
깊게 눌러쓴 후드에 마스크, 선글라스까지 누가 봐도 수상해 보이는 차림새의 인물이 누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습격인가 싶어 감각을 눈앞의 인물에 감각 집중했지만 느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빤~히.
질문에도 아무 말 없이 누리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었기에 누리는 참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려는 찰나.
"저기, 누구 ㅅ..."
"찾았다."
마스크 안쪽에서 흘러나온 가녀린 목소리.
목소리와 체형으로 판단했을 땐 여성으로 보였다.
'그런데 찾았다니? 무엇을?'
이런 의문을 알고 있다는 듯이 곧바로 의문에 대한 답이 돌아왔다.
"죽은자들의 왕."
"!!!!!"
쿵!
누리는 경악함과 동시에 곧바로 의지를 담아 발을 굴렀다.
전개되는 영역. 심연
집의 내부의 빛이 순식간에 물러가고 어둠으로 들어찬다.
쾅! 콰직!
들어찬 어둠이 의문의 인물을 엄청난 질량으로 찍어눌렀고 그녀는 전혀 저항하지 않고 바닥에 무릎을 꿇다 못해 엎드리게 됐다.
"누구냐."
누리는 경직된 표정으로 제압된 인물에게 물었다.
"...십자구마회 부단장. 실렌지오."
"십자구마회?"
순순히 대답하는 상대.
아니. 그런데 교회의 십자구마회?
"신성력이 없는데 사제라고 주장할셈이냐?"
그리고 그중에서도 부단장이라면 분명 마스터급의 실력자이다.
하지만 마스터급의 실력이라도 누리의 감각을 피해 갈 수 없건만 이 실렌지오라는 인물에게선 신성력의 티끌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내 권능, '침묵의 베일(velo di silenzio)'의 효과. 소리, 냄새, 시야, 신성력, 코어의 생명력까지 모든 것을 원하는 만큼 지워줌."
"침묵의 베일.......잠깐. '침묵의 베일'?"
"내 권능 알고 있음? 교회에서도 모르는데."
"아니, 그게 아니라...."
권능. 게임 속의 엔피씨 또는 영입한 동료가 마스터급의 레벨에 오르면 생기는 고유의 스킬.
그녀의 설명이 사실이라면 게임속 권능중에서도 탑티어의 스킬이다.
사람이 기본적으로 외부를 인식하는데 사용되는 세 가지 감각과 이능, 거기에 인간의 기본적인 생명력까지 가려주는 엄청난 효과.
암살을 위한 완벽한 스킬. 사영의 은신도 이 정도 수준은 아니다.
하지만 누리가 당황한 이유는 스킬의 뛰어남 때문이 아니었다.
침묵의 베일. 분명 게임 속에서 본적이 있는 스킬이다.
문제는 교회 측 엔피씨의 스킬이 아니라.
"'밴시(Banshee)'?"
최종보스의 측근이자 최후반부의 네임드 몬스터 '밴시'의 트레이드 마크 스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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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시.
암살자 직군의 네임드 몬스터.
게임의 최후반부에 등장하지만 중간중간 자주 언급되어 플레이어들에겐 꽤나 익숙한 이름이다.
그 이유는 밴시의 설정 때문인데.
밴시는 흑마술사들을 매우, 극렬하고, 격렬하게 증오한다.
실제로 밴시를 공략할 때 흑마술사 직군을 포함하면 밴시는 광포화 상태에 빠져 공격력이 상승하고 회피율이 하락하게 된다.
하지만 밴시의 트레이드 마크인 '침묵의 베일'덕분에 회피율 하락은 있으나 마나한 디버프.
때문에 밴시의 공략에는 흑마술사를 빼놓고 가는 것이 정석으로 통한다.
"왜 밴시가..."
"밴시? 나를 지칭하는 거임?"
"....밴시를 몰라?"
"밴시. 아일랜드의 요정. 밴시의 울음소리는 누군가 사망할 징조로...."
"그게 아니라.....하아."
누리는 참을 수 없는 답답함에 한숨을 참지 못했다.
레이첼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그 지랄을 떨었는데 2주도 안돼서 밴시와 마주치다니.
눈앞의 여자가 밴시가 아닐 가능성도 있지만 게임 속에서의 권능은 절대 겹치지 않게 설계되어 있었다.
"왜 나를 찾아왔지?"
지금 이 여자가 싸우러 온 게 아니라는 것은 누리도 알 수 있다.
제압되면서도 일말의 반항도 없었고 질문에도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그렇기에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흑마술사를 증오하는 것 아니었나?"
어째서?
이 여자가 밴시라면 분명 흑마술사를 증오한다는 설정이 있을 텐데?
아니 밴시가 아니더라도 십자구마회 소속이라며.
그럼에도 흑마술사의 신격인 죽으자들의 왕을 찾아왔다?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흑마술사중 죽이고 싶은 놈이 있음. 당신에게 의뢰할 생각임."
"십자구마회의 부단장이라며. 흑마술사를 죽이려면 나보단 그쪽이 가장 수월할 텐데?"
"......"
십자구마회는 흑마술사의 토벌만을 위해 교회에서 설립한 특수전투단체.
흑마술사를 죽이는 일에는 이만한 단체도 없다.
무언가 자신이 놓친 설정이 있었나하고 고민할때쯤 그녀의 대답이 돌아왔고,
"....교회는 흑탑을 토벌할 생각이 없음."
그녀의 대답은 누리의 예상을 가뿐히 뛰어넘어 있었다.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교회가 흑마술사를 토벌하지 않는다니.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리인가?
이는 설정 때문이 아니더라도 누리가 2년전, 강목사를 통해 눈으로 직접 확인했기에 더욱 믿을 수 없었다.
"교회의 수뇌부는...타락했음."
표정은 가려져서 보이지 않지만, 그녀의 목소리에 넘쳐나는 절망감은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음을 알게 해줬다.
"하아."
우웅.
깊은 한숨을 내쉰 누리는 심연을 거두고 실렌을 일으켰다.
"이야기를 좀 해봐야겠네."
"감사함."
".....아까부터 묻고 싶었는데 말투는 왜 그따위인 거야?"
"이상함?"
"엄청."
"인터넷 SNS를 보며 한국어를 익힘."
"....."
갑자기 'SNS는 인생의 낭비다'라는 누군가의 명언이 떠오르는 누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