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속 중간보스에 빙의했다-13화 (14/60)

EP.13 숨은 설정?

달칵.

"마셔."

"감사."

일단 손님 취급하기로 했으니 차를 한잔내주며 누리도 생각을 정리한다.

'그래. 확실히 밴시가 최종 보스의 수하이긴 했지만 사용하던 코스트는 분명 신성력이었어.'

게다가 밴시의 설정 중 원래는 다른 집단의 소속이었다가 복수를 위해 인류를 배신하고 최종 보스의 산하로 들어갔다는 내용이 분명 존재했다.

'복수대상이 흑마술사라면 '다른 집단'이 교회라고 해도 충분히 말이 되지.'

교회와 흑마술사는 게임상의 대표적인 적대 집단.

하지만 어째서인지 밴시의 게임 설정상 교회를 포기하고 최종 보스의 수하로 들어가게 된다.

흑마술사를 죽이는 것이 목표라면 교회만큼 좋은 선택지도 없건만.

"좋아.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여기서 교회가 타락했다는 그녀의 주장이 맞다면 모든 것이 말이 되지만

누리는 설정집에서도, 플레이 중에도 타락한 교회라는 설정은 듣도 보도 못했다.

"교회는 흑탑과 거래하고 있음."

이어진 실렌의 설명은 첫마디부터 가히 충격적이었다.

"현대에 들어서 교회의 위상이 추락하고 흑마력의 인식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함."

교회는 분명히 강력한 이능집단이 맞지만, 과거에 비해 빛이 많이 바랜 것도, 위상이 줄어들고 있는 것도 사실.

거기에 흑마력을 금기시한 과거와 달리 흑마력이 악한게 아닌 흑마력을 악하게 사용하는 사람이 잘못되었다는 인식이 빠르게 퍼지며 흑마력 사용자에 대한 무차별적인 토벌은 잘못되었다는 성토까지 받고 있었다.

"흑마술사들을 토벌하며 힘을 과시해온 교회는 위기감을 느낌."

"그때 흑탑에서 거래를 제안해옴."

자신들이 미리 테러할 장소와 시간을 알려줄 테니 교회가 그것을 막고 명성을 쌓아 위상을 되찾아라.

"흑탑은 교회가 흑탑의 여러 사업과 이권을 못본채 넘어가기를 요구함."

미리 말을 맞춰두기에 희생자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교회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다.

흑탑의 요구도 그저 눈을 돌리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

결국 교회의 수뇌부는 흑탑의 거래를 수락했다.

그것이 흑탑의 노림수인지도 모르고.

"흑탑은 아주 조금씩 요구를 늘려감."

처음은 사소한 '부탁'을 하고 그 이상으로 큰 보상을 제공했다.

이후 점차 요구하는 '부탁'이 커지며 보상 또한 커져만 갔다.

흑탑은 가랑비에 옷이 젖어가듯, 천천히 교회에 스며들어 갔다.

그렇게 20여년.

"지금은 교회가 직접 흑탑에 적을 향한 테러를 지시하는 지경까지 오게 됨."

테러를 이용해 정적을 제거하고 이득을 챙긴다.

마치 흑탑처럼.

"허어...."

그녀의 이야기가 끝나자 누리는 탄식을 금치 못했다.

교회가 타락했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게 아니다.

교회가 타락했다는 '설정'이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타락한 사제가 없는것은 아니지만 교회는 게임속에서 분명한 '선'의 집단이었다.

그런데 교회의 수뇌부 전체가 타락했다?

'숨겨진 설정? 아니면 진정 이 세계는 이스트헌터스토리와는 관련 없는건가?'

만약 지금까지 확인했던 설정은 전부 우연일 뿐이고 이 세계가 게임과 관련이 없다면....

'....아니 그래도 상관없어.'

게임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나는 그저 가족을 되찾고 싶을 뿐.

부활아이템이 없으면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된다.

'무조건 해낸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아니었다.

누리는 모르고 있었지만 그의 정신은 상당히 불안정한 상태였다.

그가 빙의한 죽은자들의 왕이 아무리 대단한 몬스터라도 빙의한 당사자는 20대의 평범한 청년.

부모님의 죽음, 죽음의 공포, 학살의 죄책감.

죽은자들의 왕으로서의 본능이 억지로 누르며 마비시키고 있을 뿐.

누리의 정신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괜찮음?"

"아. 괜찮아.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실렌의 말에 겨우 정신을 차린누리는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래서 복수를 이루기 위해 나를 찾아왔다? 굳이 다른 세력들을 냅두고?"

교회가 최강이긴 하지만 그 뒤를 있는 세력들은 분명 존재한다.

영국의 퀸즈가드와 상아탑이 그랬고, 중국의 무림맹도 뒤를 바짝 쫓고며, 미국의 히어로즈도 만만치 않았다.

"어차피 거대세력들은 눈치만 보고 도와주지 않을 거임. 오히려 정보를 빼먹고 버려지지 않으면 다행임."

"그건 그렇지."

겨우 증거 몇 개로 어설프게 교회를 건드렸다간 오히려 역공을 맞게 될수도 있으니.

게다가 역공을 맞으면 피라냐 같은 다른 세력들에게 신나게 물어뜯길 테니 까딱 잘못하면 세력 자체가 사라질수 있는 위험한 일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말하자면 당신을 찾아온 게 아님."

그래서 실렌은 십자구마회의 부단장이라는 위치를 이용해 세력을 이루지 않은 실력자, 숨어있는 실력자들을 찾아 전 세계를 헤매었다.

교회와 흑탑의 눈치를 보지 않고 실렌의 복수를 이뤄줄 수 있을만한 절대적인 실력자.

프랑스의 '백작', 중국의 '투선', 멕시코의 '학살자', 아프리카의 '대전사'.

"전부 거절당함."

괜히 세력을 이루지 않고 혼자 활동하는게 아니라는 듯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한국에도 그저 실력자를 찾아왔다?"

"파견된 이유는 따로 있지만, 맞음."

2년전 한국에서 축성탄이 사용된 일로 파견이 결정 났을 때 실렌은 일부러 자원하였다.

한국은 아직 조사하지 않은 국가 중 하나.

축성탄을 맞고도 살아남을 정도면 숨어있는 실력자가 분명하다.

거기에 이유는 모르지만 특급의 구마사제가 축성탄을 사용했다면 교회와 적대적인 인물일 확률도 높다.

"문제는 같은 부단장인 포코도 파견됨."

만약 포코가 먼저 발견하게 되면 교회의 명령에 따라 사살해야할수도 있기에 먼저 발견하려고 최선을 다해 한국을 뒤졌다.

결국 임무의 장기화로 인해 1년뒤 포코가 돌아갈 때까지 아무 단서도 발견하지 못했지만.

"응? 그럼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온 거야?"

누리는 그동안 다른 이능집단, 특히 교회 측에 발각되지 않기 위해 이능력자의 눈을 피해 활동해왔다.

"확실히 내가 널 감지하지 못하는건 치명적이긴 하지만 네가 날 감지할수도 없을텐데."

이를 가능하게 해준 것이 누리의, 아니 죽은자들의 왕의 초월적인 흑마력 조작능력.

이것은 이미 조작의 범주를 넘어선 지배의 영역이었다.

자연의 흑마력이 스스로 '왕'의 의지에 따른다.

원하는 정보를 진상하고

성벽이 되어 왕을 숨기며

불경한 침입자를 배제한다.

"모조 엘릭서에 관한 정보는 교회의 정보부도 확보함."

"당연히 그렇겠지."

세계에서도 정상급의 능력을 자랑하는 교회의 정보부가 이런 정보를 놓칠 리 없었다.

"하지만 교회는 개입하지 않았을 텐데?"

말그대로 파악만 하고 있을 뿐 교회가 이런일에 개입할 리 없었다.

흑탑이 관련된 것도 아니고 딱히 대형 범죄조직이 얽힌 것도 아니다.

영국의 퀸즈가드가 얽혀있지만 퀸즈가드와 교회는 동맹에 가까운 사이였기에 도우면 도왔지 모조엘릭서를 노리진 않을 것이다.

"애초에 어떤 멍청이가 미친 짓만 안했어도 조용히 넘어갈 일이었으니까."

다수의 마스터급 실력자와 마스터의 경지조차 뛰어넘었다는 마스터 나이트가 포진한 퀸즈가드는 교회의 뒤를 잇는 강력한 이능집단이다.

이런 퀸즈가드가 직접 관여하는 일에 훼방을 놓는 것은 퀸즈가드와 전쟁을 하겠다고 선전포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하지만 어느 집단이나 용기와 만용을 착각하는 멍청이는 존재하는 법이었다.

"맞음. 교회에선 방관하라고 지시함."

"'교회에선'? 그럼 너는 아니란 건가?"

"이번 사건만이 아닌 한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무차별적으로 수집했음."

포코가 귀환한 이후 실렌은 한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이능사회의 사건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한국 전부를?"

"한국은 의외로 이능집단간의 균형이 잘 맞춰져있어서 의외로 쉬웠음."

그렇게 다시금 1년.

이번에도 허탕이라 생각하고 복귀를 결심할 때쯤 모조엘릭서 사건이 터졌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한가연을 주시했음."

"당첨이었군."

"맞음."

한가연을 습격한 암살자. 그것을 갑자기 나타나 막은 누리.

분명 실렌이 느끼기에 누리는 일반인이건만 아무렇지 않게 이능력자를 제압했다.

경우의 수는 두 가지.

실렌보다 압도적인 실력자이거나.

아니면 감지하기 힘든 흑마력 사용자 이거나.

둘중 어느 것이라도 확인할 가치는 있었기에 즉시 추적에 나선 실렌.

물론 누리의 흑마력 통제는 완벽하기에 추적이 불가능했지만 그가 데리고 간 암살자는 달랐다.

"환현가에서 어둑시니에 의뢰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기에 미리 가서 대기했음."

그곳에서 목격한 전율스러운 힘.

흑마력과 어둠 그 자체를 다루는, 신화나 전설 속에서나 나올법한 광경.

그 광경을 지켜보던 실렌의 머릿속에 떠오른 흑마술사들의 예언중 한 구절.

'모든 어둠은 왕에게 무릎꿇을지니.'

실렌 또한 교회의 소속이었기에 예언에 대한 교육을 받았고 예언 속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다.

죽은자들의 왕.

그리고 이 사실을 눈치챈 실렌은 환희했다.

이 사람이다.

이 사람이야 말로 자신이 찾던 인물이다.

타락한 교회를 향해 철퇴를 내리치고 가증스러운 '그새끼'를 죽여

복수를 이뤄줄 나의 구원자.

실렌은 확신을 가지고 누리를 만나기 위한 적절한 타이밍을 기다렸다.

"며칠간 동생과 휴가를 즐기는 것 같기에 지금 찾아왔음."

"...확실히 이건 내가 방심한게 맞네."

가연의 암살미수 사건은 교회에서 신경쓰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별 대비 없이 병원을 들락거렸었다.

실제로 누리의 감지에 아무것도 걸리지 않기도 했고.

누가 알았겠는가.

밴시가, 그것도 교회에 소속되어 나를 찾을 줄이야.

"......후우."

전부 납득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머릿속이 정리되어가는 느낌이다.

어렵게 생각할 거 없다.

원래의 스토리에서 교회의 타락을 알게 되어 최종 보스 측에 붙은 실렌이 나의 행동으로 인해 최종보스보다 먼저 '나'라는 가능성을 찾아오게 된 것이다.....

"...씨발."

어렵게 생각할거 없긴 개뿔.

벌써 주요 몬스터였던 밴시가 최종보스 대신 누리를 선택했다.

심지어 교회는 최강의 이능집단답게 스토리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곳.

그런 교회가 타락했으니 모든 스토리를 이 사실에 맞춰 생각하고 행동할 필요가 있다.

즉.

"머리 깨지겠네."

".....혹시 나 때문임?"

갑작스런 누리의 욕설에 눈치를 보던 실렌이 조용히 물었다.

"아니아니. 오히려 너한텐 고맙다고 해야겠지."

이미 자신이 저지른 일들, 그리고 앞으로 저지를 일들로 스토리는 크고 작게 꼬여갈 것이다.

그래도 이는 누리의 판단하에 일어나는 일이기에 인과관계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인과관계를 파악하지 못하게 되면

어떤일이 자신과 관련된 일인지, 이 일이 어느 방향을 진행될지 예측할수 없게 된다.

만약 오늘 그녀가 찾아오지 않고 이 사실을 모른 채 행동하게 되었다면....상상만해도 끔찍하다.

"그래. 좋아. 복수 대상은?"

어차피 밴시는 후반부에 나오는 몬스터. 지금 자신의 수하로 들어온다고 해도 메인스토리의 초중반부는 크게 엇나가진 않을 것이다.

'후반부는 이미 꼬일대로 꼬인것 같지만.'

교회의 한국개입, 밴시는 밴시가 아니게 됐고, 아마 모조 엘릭서도 원래는 실패했겠지.

차라리 이렇게 된김에 밴시를 밑에 두고 써먹는 편이 예상치 못한 상황을 대처하기 수월할 것이다.

"해주는 거임?!"

덜컹!

그의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반색하는 실렌.

"후우. 일단 들어보고."

꾸욱.

정신이 지치는 느낌에 소파에 등을 깊게 묻던 누리는 실렌이 아직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벗지 않았다는 걸 깨닳았다.

"차까지 내왔는데 그건 언제까지 쓰고 있으려고?"

"아! 긴장해서 깜빡함."

스윽.

후드를 내리고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벗는 실렌.

그 모습을 보던 누리는 잊고 있던 두 가지 사실이 문득 떠올랐다.

"잘 부탁함."

게임내의 밴시는 메인히로인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팬덤이 존재할 정도의 미인이란것.

띠리릭.

"오빠 나왔ㅇ...."

어느새 하나가 돌아올 시간이 다되었다는 것.

"..........누구야? 오. 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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