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 치료
한국대 병원 VIP 병실.
학원을 가는 날을 제외하면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가연의 병실을 들린 하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가연의 병실에 앉아있었다.
"부모님 오늘 오신다고?"
오늘은 가연의 부모님께서 오시는 날.
평소 부모님이 오신다면 툴툴대면서도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던 가연이었지만,
"응."
어째서인지 오늘따라 표정이 굳어있었다.
"얼굴 좀 풀어. 좋은 날인데 뭐 그렇게 긴장하고 있어."
"그럼 긴장되지 안되겠냐?"
"긴장할 필요가 뭐가 있어. 그 지긋지긋한 병 고치는 날인데."
그 이유인즉슨 드디어 가연의 병을 치료할 약을 부모님이 들고오시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냥....기분이 싱숭생숭하네."
십년.
이 병을 달고 산지가 무려 십년이다.
저명한 의사도 찾아가보고 용하다는 한의원도 가봤다.
치료로는 차도가 없으니 무당에 민간요법, 비싸다는 산삼까지 시도해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
결국 부모님도 치료를 포기하시고 하루라도 더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에 가연을 병원에 입원시킨지 오 년.
부모님이 어떤 마음으로 약을 구하러 다녔는지 가연은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고맙고...미안하고..."
"그, 그러고보니 레이첼이 안 보이네? 어디 갔어?"
가연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려 하자 하나가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킁. 잠깐 전화하러 간다고 나갔어. 엄마아빠하고 같이 오는 분이 자기 상관 이랬거든."
"그래? 그럼 오빠도 같이 올 걸 그랬네."
"아. 그러고 보니 너희 오빠랑 레이첼 진짜 아무 관계도 아니래? "
가연도 하나에게 누리가 레이첼을 피해다닌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레이첼은 아직 그런거 물어보기 좀 그래서 아직 안 물어봤는데."
"믿음이 안 가긴 하는데 오빠 말로는 아니래."
"그래?"
그녀의 부정에 가연의 안색이 환해지는 것을 본 하나는 눈이 뾰족해졌다.
"너 왜 그렇게 좋아하냐?"
"뭐, 뭐가."
순식간에 낮아진 하나의 목소리에 가연이 시치미를 뗐지만 거짓말을 못하는 가연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야."
"으, 응?"
"조심해라."
꿀꺽.
"아, 알았어."
'썅년. 갈수록 브라콤이 심해지네.'
순순히 대답하면서도 속으로 욕을 한다.
저번 습격 이후로 누리에게 관심이 생긴 가연.
어떤사람이 위기의 순간에 나타나 구해주는 영웅에게 관심을 주지 않겠나.
그래서 자주 그의 동생인 하나에게 안부를 물었지만 자기가 여자친구라도 되는 것 마냥 경계를 하기 시작했다.
"....후우. 진짜 얼마 전엔 웬 모르는 여자까지 집에 들여서는."
"모르는 여자? 예뻤어?"
"응. 엄청."
며칠전 학원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니 웬 백발의 모르는 년이랑 단둘이 있던 오빠.
"하여간 방심할 수가 없다니까."
사람이 화가 너무 나면 오히려 차분해진다 했던가.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평소와 다름없이 누구냐고 물었건만 어떻게 눈치챘는지 오빠는 하얀머리년을 돌려보내더니 그냥 동료라고 말을 할 뿐.
눈치로 보아선 거짓말은 아닌 것 같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감히 집에 여자를 끌어들이다니.
"쯧. 빨리 대학을 합격하던가 해야지."
대학에 입학하면 마법을 가르쳐준다고 했으니 그때쯤이면 딱 붙어서 감시할수 있겠지.
똑.똑.
그렇게 가연과 하나가 한창 수다를 떠는 와중 들려온 노크소리.
드르륵.
평소와 달리 경호원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고 곧바로 문이 열린다.
"아빠! 엄마!"
가연의 부모님이 드디어 도착하신 것이다.
벌떡
타다닥.
덥썩.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부모님인 것을 알자마자 가연은 침대에서 순식간에 일어나 달려가 엄마의 품에 안겼다.
쓰담쓰담.
"우리 가연이. 그동안 잘 지냈어?"
품에 안긴 가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묻는 가연의 엄마. 이하연.
"응응. 엄마는?"
"엄마는 가연이 생각하면서 지냈지."
"헤헤."
"이년아 아빠는 보이지도 않냐?"
가연이 엄마랑만 이야기하고 있자 그녀의 아빠, 한웅이 서운하다는 듯이 말했다.
덥썩.
"에이. 당연히 아빠도 보고 싶었지."
"말은. 후후."
딸의 애교에 한웅은 결국 미소를 짓는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아줌마."
"그래. 퇴원했다는 소식은 들었다. 축하한다. 하나야."
"퇴원했는데 이렇게 병문안도 자주 와주고 정말 고마워. 정말 우리가 하나 덕분에 안심하고 돌아다닐 수 있다니까."
지난 일 년 동안 가연의 병실에서 죽치고 있던 하나였기에 가연의 부모님 또한 당연히 하나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또래의 친구들이 없는 가연에게 친구가 되어준 그녀에게 큰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에요. 저도 놀러 오는 거 인걸요."
"우리 가연이 퇴원하고도 잘 부탁한다."
자신의 아빠가 꺼낸 퇴원이란 말에 가연이 되물었다.
"아빠. 나 정말....나을수 있는거야?"
"그래. 나을 수 있어. 아직 자세히 말해줄 순 없지만 이번에 세상이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란 걸 알게 됐어."
"....알았어."
사실 이미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었지만 누리오빠에게 자신의 정체를 비밀로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기 때문에 모르는 척을 했다.
"레이첼은?"
"아차! 밖에 세워두고 너무 오래 시간을 끌고 있었네."
엄마인 하연이 깜짝 놀라며 문을 열고 문밖에 서 있던 누군가를 부른다.
"죄송해요. 너무 오래걸렸죠?"
"오랜만에 보는 가족의 해우는 아무리 시간을 들여도 모자란 법이지. 괜찮다."
저벅저벅.
레이첼과 함께 들어오는 한 명의 중년 남자.
그 남자를 본 가연의 머릿속엔 무심코 한가지 단어가 떠올랐다.
'단단하다.'
강직한 표정, 올곧은 자세,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복장.
안그래도 딱딱한 레이첼의 인상을 몇번이고 강화하면 딱 이렇게 변하지 않을까 싶은 인상의 남자였다.
"만나서 반갑다. 올리버 램파트라고 한다."
"아! 네. 한가연이에요."
가연은 강렬한 첫인상에 정신을 놓고 있다가 그의 인사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마주 인사했다.
"그럼 당장 시작하지."
"네?"
밑도 끝도 없이 시작하자는 그의 말에 가연은 되물을 수 밖에 없었다.
"더 필요한 것이 있나?"
"아니...."
빨라도 너무 빠른 진행에 말문을 잃은 가연.
다행히 그녀의 부모도 같은 마음이었는지 올리버의 행동을 만류했지만.
"올리버님. 그래도 준비란 게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준비? 어떤 준비를 말인가."
"그....마음에 준비라던지...."
"괜찮다. 어차피 순식간에 끝날 테니."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이 아이의 병은 매우 느리지만, 끊임없이 진행되는 병이다."
두꺼운 댐이 작은 실금 하나에 무너지듯 코어에 한번 손상이 간다면 코어에 한계가 찾아올 때까지 손상 끊임없이 늘어나게 된다.
"한계는 언제 찾아올지 아무도 알 수 없지."
마침 장소도 병원의 vip실. 이곳이라면 외부의 간섭을 최소화할 수 있다.
"지금이 적기다."
딸을 위해서라는데 어느 부모가 거절하겠는가.
"....네. 알겠습니다. 저희 딸, 잘 부탁드립니다."
"부탁드립니다."
결국 한웅과 이하연은 고개를 깊이 숙이며 올리버에게 부탁하였다.
"레이첼. 가방과 방음 마도구를."
"네. 마스터."
그때까지 조용히 뒤에 서 있던 레이첼이 올리버의 부름에 들고 있던 가방을 올리버에게 넘기고 혹시모를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방음마도구를 설치했다.
달칵.
"....무지개?"
가연의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하나가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받아든 가방을 올리버가 열자 가방속에서 새어나오기 시작한 은은한 무지갯빛.
그 빛은 가방속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자그마한 병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크기는 손가락 하나보다도 작은 크기로 내부에는 많아 봤자 세, 네방울밖에 안되어 보이는 무지갯빛 액체가 들어있었는데,
병의 외부에 새겨진 일정한 패턴의 무늬가 빛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잠시 비켜주겠나."
"네? 아! 네!"
그때까지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하나는 그제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렇게 허둥지둥 가연의 옆에서 일어나는 하나를 어째서인지 빤히 바라보던 올리버.
"자네는....."
"아! 저는 가연이 친구 김하나라고 해요. 저희 가연이 잘 부탁드립니다."
".....혹시..."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무언가 말을 하려다 마는 올리버의 행동에 하나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그가 아무렇지 않게 다시 준비를 시작하는 것을 보고 방해되지 않게 병실 밖으로 나갔다.
사실 특별한 준비랄 것도 없었다.
가연이 모조엘릭서를 마시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올리버가 약효가 끝날 때까지 집중할 뿐.
"금방 끝날 테니 걱정 말게."
물론 세상일이란 알 수 없기에 예상외의 일이 일어날 수 있겠지만 별다른 변수가 없는 이곳에선 자신이 충분히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
올리버의 앞뒤 없는 진행력은 이러한 자신감에서 기인하는 부분이 컸다.
"시작하겠네."
"네."
퐁.
가연이 긴장한 채로 받아든 병의 뚜껑을 열었다.
뚜껑을 열자마자 퍼지는 은은하게 달콤한 향.
"진짜 엘릭서는 오히려 무색무취라고 전해지니 화려하기는 이쪽이 더하겠군."
모조엘릭서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사용하는 것은 올리버 또한 처음이었기에 신기해했다.
"마시게."
"그럼....."
꿀꺽.
한모금이 채 안 되는 내용물을 한 번에 들이킨 가연.
화아악!
직후 모조엘릭서의 무지갯빛이 가연의 몸에 흡수된 듯 가연의 몸에서 무지갯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음."
그 모습을 보며 올리버는 제대로 진행된다 판단하며 일말의 긴장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올리버가 예상치 못한 변수가 이 병원에 존재하고 있었으니.
"어?"
며칠전까지 하나가 입원해있던 병실. 그곳에 설치되어있던 누리의 마법진.
하나가 퇴원할 때 지웠버렸지만 오랜기간 설치되어있던 마법진은 진한 흑마력의 잔향을 병원에 남기고 말았다.
화아악!
"검정색?"
변수는 모조엘릭서에도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고.
"흐윽!"
"가연아!"
가연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무지갯빛이 검정빛으로 물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