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 치료
"허어엉. 너무 잘됐다."
레이첼의 손에 이끌려 들어온 하나는 가연과 가연의 부모가 울면서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는 같이 펑펑 울기 시작했다.
"고마워. 흑."
그런 하나의 눈물에 겨우 눈물이 그쳐가던 가연의 눈에도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그렇게 한참을 눈물로 적시며 보내고 나서야 겨우 멈춘 울음바다.
올리버와 가연의 부모는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 잠시 밖으로 나갔고 레이첼도 본국에 임무 완수를 보고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리하여 병실에 남은 건 가연과 하나뿐.
"이제 진짜 놀러 다닐 수 있겠네."
"응. 그동안 가고 싶었던 곳은 다 가볼거야."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설레는지 가연의 얼굴엔 벌써 부터 미소가 꽃피어 있었다.
영원히 손에 넣지 못할 줄 알았던, 그토록 바라고 또 바라던 자유.
말로만 들어서는 제대로 실감 나지 않던 자유를 드디어 실감할 수 있었다.
아무리 크게 숨을 쉬어 숨이 차지 않고, 마음껏 움직여도 지치지 않는다.
어제까지만해도 온 세상이 자신을 구속하는 것 같았지만,
이제 자신을 구속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게 자유.'
먹고싶은 음식을 먹고, 자고싶을 때자고, 하고 싶은 행동을 하는.
"학교도 다니고 싶고 해외여행도 가고 싶어. 아! 가장 중요한 연애도 해봐야지."
"연애는 나도 아직 안 해봤거든. 어디서 감히 새치기를 하려고."
"어머. 네가 나보다 못생긴 걸 어쩌겠니. 현실을 받아들이렴."
"이년이 진짜."
말로는 싸우고 있었지만 둘의 입가에선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누리 오빠가 아직 여친이 없다고 했던가?~"
좋은 분위기를 틈타 가연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을 던져 하나의 반응을 확인해보았고.
"....."
사람의 표정과 감정이 얼마나 빨리 바뀔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아! 그러고 보니 너 누리 오빠한테 말했어?"
아직은 때가 아니다 싶은 가연은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뭐를?"
"아까 나 잘못됐을 때 누리오빠가 왔다 간 거 아니야?"
자신이 먹은약이 무언가 잘못되었을 때 나타났던 정체불명의 그림자.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그림자를 보았을 때부터 무언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고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서 누리 오빠라는 확신이 들었다.
"네가 부른 거 아니었어?"
"음. 중간에 네 비명소리 듣곤 오빠한테 전화하긴 했는데."
병실문을 뚫고 들리는 가연의 비명에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발만 동동구르던 하나는 제 오빠의 존재를 기억해내고 곧바로 전화했다.
사정을 들은 오빠는 대답하고서는 곧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 뒤로 전화도 꺼져있고 연락도 안 와서 모르겠네."
"흐음...."
"무슨 일이 있었는데?"
"그게..."
가연은 방금전 병실 안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나에게 설명했다.
"왠지 눈에 익더라고. 그래서 난 오빠인 줄 알았는데."
그래서 아는척하면 오빠가 곤란해질까 봐 입도 꾹 다물고 있었다.
"아니. 이 오빠는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가연의 말을 듣고 하나는 다시 누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전화는 꺼져있다.
그렇게 둘이 궁금해하던 누리는 지금 자신의 집에서 머리를 감싼 채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하아아아. 설마 거기서 그렇게 될 줄이야."
자신이 목표로 하는 것을 얻으려면 어느 정도 스토리가 꼬인다는 것도 각오했고 이미 꼬인 것도 있지만,
"어떻게 예상대로 되는 게 하나 없냐."
하나가 꼬이기 시작하더니 예상치 못한 일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온다.
밴시, 아니 실렌이 자신의 밑으로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이런 일이 생기다니.
조금 시간을 돌려 모조엘릭서가 막 폭주했을 무렵.
하나가 병실에서 들려오는 가연의 비명에 누리에게 전화한 시점.
뚜루루. 뚜루루.
[어. 하나야. 지금 병원에 있을 시간 아니ㄴ...]
"오빠! 가연이가, 가연이가."
[침착하고 천천히 말해봐.]
"그게, 방금 가연이 치료한다고 사람들 오고 난 밖으로 나왔는데, 갑자기 안에서 비명이 들려."
[...알았어. 오빠가 해결해볼 테니까 넌 들어가지 말고 거기 있어.]
뚝.
누리는 하나와의 통화를 끊자마자 병원의 옥상으로 포털을 열어 이동했다.
하나가 입원했을 때 확인한 바로는 병원의 옥상은 관계자 외에는 출입이 금지되어있기에 감시카메라도 얼마 설치되어있지 않았다.
그중 가연의 병실과 가장 가까운 사각지대로 이동한 누리는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감각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누리의 초월적인 감각은 떨어져 있는 가연의 병실도 마치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느끼게 해주었는데.
폭주하는 모조엘릭서의 기운. 그것을 옆에서 억누르는 마스터 나이트로 보이는 인물.
그리고 폭주하는 기운에 섞여 있는 흑마력까지.
"하. 이건 내잘못이군."
병실의 상황을 파악한 누리는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곧바로 눈치챘다.
바로 누리가 설치해놓은 준 요새 급의 마법진.
누리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설치해 놓았다가 하나가 퇴원할 당시 직접 지웠지만
마법진의 수준이 수준이었기에 그 잔향이 병원 전체에 진하게 남아있었다.
게다가 죽은자들의 왕인 누리가 설치했던 마법진이었기에 남아있는 잔향 또한 당연히 일반적으로 눈치채기 힘든 흑마력.
거기에 누리의 힘으로 한층 더 은밀해졌기에 올리버의 경지로도 잔향의 존재를 눈치챌 수 없었던 것이다.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병실로 진입할 준비를 했다.
지금 당장 병실로 이동할 수도 있지만 얼굴은 숨겨야 되지 안겠는가.
스으윽.
누리의 몸에서 어둠이 뿜어져 나온다.
영역을 전개하되 극도로 억제한다.
줄이고 줄이고 줄여서 최대한 얇게.
'몸에 딱 맞는 옷을 입는 느낌으로.'
김누리 오리지널. 암린갑.
그렇게 완성된 누리의 모습은 마치 사람의 그림자가 그대로 일어선듯한 모습이었다.
한창 숨어다니며 힘을 키우고 수련할 때 어비스(심연)를 응용하여 만들어본 기술.
어둠을 압축하여 온몸에 감싸 방어력을 올려주고 누구도 내부를 볼 수 없기에 정체를 숨기고 흔적을 남기지 않는 일에 딱 좋다.
준비를 마치자마자 병실 안으로 진입한다.
병실의 그림자를 인식하고 그림자의 어둠과 나의 어둠을 이어.
슈욱.
단일 이동기. 쉐도우 점프.
"흐으윽."
병실에 이동하자마자 보이는 것은 힘이 빠졌는지 신음을 흘리며 검은빛을 흘리고 있는 가연과 그런 가연의 검은빛을 푸른빛으로 억제하고 있는 남자.
아마 저 남자가 마스터 나이트이자 히로인 레이첼의 아버지인 올리버 램파트겠지.
우선 폭주하는 흑마력을 진정시키고 가연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손을 뻗는다.
콰각.
".....넌 누구냐."
하지만 올리버의 손에 잡혀버린 팔.
여기서 싸울 수도 없기에 우선 제압한다. 잠깐의 시간만 벌면 되니까.
"네놈...."
사아악.
몸에 둘러져있는 심연을 잡혀있는 팔을 통해 확장시켜 올리버를 가둔다.
'빨리 해결해야겠네.'
올리버는 마스터급 중에서도 끝자락에 다다른 강자.
누리도 함부로 볼 수 없는 인물이기에 저런 임시방편으로는 얼마 붙잡아두지 못할 것이다.
스윽.
가연의 머리에 손을 올린 누리는 순식간에 그녀의 상태를 파악했다.
'....이건 또 뭐야.'
모조엘릭서의 약효에 흑마력이 섞여 폭주했다는 것은 자신의 예상대로였다.
문제는 가연의 상태.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어,
'신체가...진화했어?'
그래. 이건 진화라는 말이 어울린다.
코어가 단순히 회복된 것을 넘어 몸이 약화되어 걸렸던 자질구레한 병마들이 사라졌고,
정상인의 범주를 넘어 뼈와 근육, 장기가 강화되었다.
마지막으로 흑마력을 타고나지 못했을 터인 가연의 신체가
'흑마력에 적응했다.'
무협소설속의 환골탈태가 이러할까.
기본적인 신체구성요소부터 근본적인 마력의 성질까지 전부 바뀌었다.
'이거...어디선가 본듯한....'
그리고 그런 가연의 변화에 왠지 모를 기시감을 느끼던 누리는 올리버를 묶어뒀던 속박이 벌써 풀릴 조짐이 보이기에 가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급하게 빠져나왔다.
집에 도착한 후 예상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푸념을 하다가
"어떻게 예상대로 되는 게 하나 없냐. 어둑시니부터 실렌까지.......잠깐. 어둑시니?"
가연의 변화에서 느낀 기시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떠올랐다.
"그래. 사영."
사영의 부하들을 몰살시키고 정신을 흔들어 복종시켰을 때 사영에게 일어났던 변화.
가연에게 일어난 마력의 성질변화는 분명 사영이 보였던 변화와 동일했다.
당시에는 그저 사영의 각성덕분인 줄 알고 그냥 넘어갔지만 한달도 지나지 않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예상가는 것이 없는것은 아니만 아직 확신할 수 없는 상황.
만약 한번더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확신할 수 있겠지.
"한번이면 우연, 두번이면 필연, 세번이면 운명이던가."
원래는 만남을 표현하는 표어였지만 누리는 왠지 지금의 상황에 이 문구가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사실 알아내려면 지금 당장에라도 실험하여 알아낼 수 있을것이다.
실렌의 정보력, 어둑시니의 조직력을 이용해 실험체를 조달하고 자신의 힘을 이용하여 생체실험을 하면 얼마 걸리지 않겠지.
"후우. 안 하는게 맞겠지."
하지만 하지 않는다.
나 스스로 인간이라 믿고 있기에 최소한의 인간성은 지키고 싶었다.
동생과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해서라도.
"왠지 이게 마지막일 것 같지는 않고."
그리고 일부로 알아내려 하지 않아도 조만간 알 수 있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뭐.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그것 또한 운명이겠지.
"아. 그러고 보니 방음 마도구도 설치돼 있던데 하나는 어떻게 알고 전화한 거지?"
분명 하나가 전화했을 때 병실 안에서 소리가 들려온다고 말했다.
그러면 처음부터 밖에 있었다는 소리인데....
"...하아. 골 아프다~~."
많아지는 고민에 한숨만 늘어가는 누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