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 복수
시간을 조금 뒤로 돌려 12월 초.
누리는 사영에게 찾아가 보고를 받고 있었다.
"연구소?"
보고내용의 주체는 환현가문. 특히 그중 가주의 두 번째 자식인 현강식에 대한 보고였다.
환현자동차의 영업본부장이자 환현가문 전투대의 대주 및 소가주 후보.
그리고
우리 가족을, 나의 행복을 앗아간 장본인.
"네. 청량산 중턱 지하에 현강식이 '연구소'라 칭하는 시설의 존재를 확인했습니다."
지난 2년간 충분한 힘을 키웠고 반쯤 우연이지만 조직도 하나 손에 넣었다.
"내부는?"
당장이라도 복수하고 싶었지만, 명분이 부족했다.
교회가 개입할 수 없게 만들 명분이.
명분도 없이 환현을 건드리면 전쟁이 일어날 테고 분명 교회와 다른 세력이 개입하여 조사할 것이고 까딱 잘못하면 누리의 정체가 들어날수도 있다.
"죄송합니다. 기술적, 마법적 보안이 동시에 높은 수준으로 설치되어 있어 잠입에 실패했습니다."
아무리 강한 힘을 가지고 불멸의 육체를 소유하고 있어도 무적이 아니다.
잊어서는 안 된다. 자신은 '공략'될 존재라는 사실을.
부모님을 살리기 전까지 자신은 죽으면 안 된다.
"환현의 다른 인물들 또한 그곳에 뭐가 있는지 모르는 듯 합니다. 그런데."
하지만 명분이 있다면 다르다.
"조사 도중 노숙자 및 달동네의 빈민들이 그곳으로 납치되는 정황을 발견했습니다."
"납치?"
"네. 뒷골목 조직 몇개를 점조직으로 활용해 사라져도 신고되지 않을만한 사람들로 납치하고 있습니다."
환현가를 공격해도 교회 및 다른 세력은 개입하지 않을 만한 정당한 명분이 있다면 가능하다.
그리고.
".....인체실험인가?"
"현재로선 그렇게 추측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 명분이 생겼다.
명분뿐만이 아니다. 만약 추측이 사실이라면 복수를 더욱 효과적으로 이룰 수 있다.
"그놈 크리스마스에 파티가 있다고 했나?"
"네. 중요인맥들을 불러 진행한다고 합니다."
단순히 죽이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그녀석 또한 소중한 것을 잃어봐야 공평하지 않겠는가.
"좋아. 미끼를 풀고 준비해라."
저 밑바닥까지 추락시킬 준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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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오늘도 가장 늦게 퇴근하시네요. 현강태 이사님."
"하하. 윗사람이 일을 많이 해야 밑에 사람이 편해지죠."
"그 밑에 사람이 너무 편한거 아니에요?"
직원들은 철저하게 칼퇴근시키면서도 자신은 야근을 밥 먹듯이 한다.
자신같은 경비에게도 일일이 존댓말을 하며 존중해준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이 어찌 존경하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과찬이십니다. 하하."
"아이고. 퇴근하시는 분 너무 붙잡고 있었네요. 얼른 들어가서 쉬세요."
"그럼 들어가보겠습니다. 고생하세요."
"네에~."
저벅저벅.
선한 인상의 현강태이사는 경비원과 헤어지고도 은은한 미소를 잃지 않으며 지하주차장으로 향했다.
철컥.
기사도 퇴근시켰기에 운전석에 올라타는 현강태.
달칵.
치직.
그는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후우."
깊게 들이마신 담배 연기를 뿜어내는 그의 얼굴엔 방금 전의 미소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씨발. 언제까지 이짓거리를 해야 하는지."
방금까지 경비원과 친절하게 대화했던 사람과 동일인물이란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표정과 어투가 바뀌어있었다.
"이미지 만들기 한번 지랄맞네."
사실 이쪽이 현강태의 진짜 성격이었다.
오로지 소가주 쟁탈을 위한 이미지 메이킹. 소가주가 되기 위해선 능력도 중요하지만 사람들의 지지도 중요하다.
특히 자신의 경쟁자인 동생놈이 쓰레기 같은 성격으로 유명하기에 이러한 이미지 메이킹은 몇배의 효과를 내고 있었다.
"훗. 평생 방해만 되던 놈이 이런데서 도움이 되는군."
사실 자신도 동생의 본성과 큰 차이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참는법을 아냐 모르냐의 차이일 뿐.
아무튼 회사와 가문의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기 위해 맞지 않는 가면을 쓰고 다닌지 몇 년 표정과 어투를 바꾸는 건 달인의 경지에 다달았지만 아직 소가주의 자리는 요원하기만 하다.
"빌어먹을 그놈의 재능."
이유는 바로 재능.
환현가는 기업을 운용하고 있긴 하지만 근본은 이능사회의 무력집단이다.
무력집단의 수장으로서 무력은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요소. 강태 또한 또래에 비해 강한 힘을 소유하고 있지만 동생 강식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사고만 치는 개차반 쓰레기로 살면서도 유력한 소가주 후보일 수 있는 이유.
압도적인 재능. 그리고 무력.
현강식은 무력 하나로 현강태와 비슷한 지지를 얻고 있는 것이다.
"결정적인 뭔가가 필요한데..."
현강식을 완전히 제칠 무언가가 필요하기에 이것저것 시도해보고 있지만 결과가 영 시원치 않다.
강식이 무언가를 하고 있는 낌새를 눈치채고 방해하려고도 몇 차례 시도는 해봤지만, 쓸데없이 조심성만 많아서는 제대로 알아내지도 못했다.
아마 이대로 가단간......
"후우....."
강태가 답답한 마음에 담배연기와 함께 한숨을 내뱉었을 때.
"내가 도와줄까?"
"!!!!"
휙!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놀란 강태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며 뒷자석으로 주먹을 뻗었다.
투웅!
하지만 주먹에 느껴지는 감각은 타격감이 아닌 물속에 주먹이 빠지는 듯한 느낌.
아니. 주먹에 기가 잔뜩 실려있었으니 실제로 수면을 때려도 이런 느낌은 나지 않았을 것이다.
고개를 완전히 돌려 눈으로 확인한 자신의 주먹은 회오리치는 어둠으로 둘러싸여져 있었다.
"진정해."
"....."
스윽.
강태는 순순히 주먹을 내렸다.
말을 걸때까지 존재조차 눈치채지 못한 은밀성,
갑작스러운 상황에 제대로 힘을 싣지 못했다 하더라도 충격과 함께 강태에게 올 반발력마저 모두 흡수한 한수.
적어도 이렇게 좁은 차 안에서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이 아니다.
몸을 다시 돌려 백미러로 뒷자석을 확인했지만 보이는것은 어둠 뿐.
"....어떻게 도와주겠다는 거지?"
"호. 바로 받아들이는 건가?"
"내 적이라면 말을 거는게 아니라 날 죽이려 했겠지. 거래 내용도 들어보지 않고 거절하는 건 멍청이나 하는 짓이고."
"후후."
목소리는 흥미롭다는 듯이 낮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현강식을 제칠 방법을 알려주지."
"...너의 무엇을 믿고?"
"믿지 않아도 상관없어. 네가 거절하면 난 다른 자를 찾아가 거래를 할 뿐이니까."
"......"
정체불명의 상대가 그 어떠한 증명도 없이 내미는 거래.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거부하는 게 맞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 답이 보이지 않는 미래에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정체불명의 목소리에 첫인상이 강했던 걸까.
"다시 한번 물을게. 도와줄까?"
목소리는 마치 악마의 속삭임처럼 강태에게 유혹적으로 다가왔고.
"......잘부탁드립니다."
강태는 악마의 유혹을 수락했다.
씨익.
분명 백미러로 보이는 것은 어둠밖에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강태는 어둠이 웃고 있다고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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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급소를 알아내고
적을 붙잡아둘 조력자를 구했으며
적이 풀어둔 미끼를 물었다.
미끼를 물었으니 이제 급소에 칼을 꽂을 일만 남았다. 아주 날카로운 칼을.
"흠. 여긴가."
그리고 지금 눈앞에 적의 급소가 있다.
등산로와 떨어진 청량산의 중턱. 누리는 그곳에서 바위하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딱히 이상할 것도 없고 주변과 잘 어울리는 조금 큰 바위.
하지만 누리의 눈에는 확실하게 보였다.
"입구부터 환영에 결계이라."
일반인의 접근을 차단하는 결계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평범한 바위로 보이게 하는 환영,
이중으로 마법을 설치해둔 것으로도 모자라 지문인식과 홍채인식까지.
"이러니 잠입을 못하지."
입구부터 이정도니 마스터급의 암살자인 사영이 잠입을 실패한 것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이런 보안이라도 누리를 막을 순 없었다.
{쉐도우 점프}
어둠은 어디에나 존재하니까.
암린갑을 두르고 지하의 어둠을 인식하여 나의 어둠과 연결하여 이동한다.
"....."
도착한곳은 마치 병원처럼 새하얀 색으로 꾸며져 있는 복도의 구석에 드리워져 있던 그림자.
지하라는 것을 몰랐다면 그저 평범한 병원이라고 착각했을 것이다.
'어지간히 돈을 쏟아 부었나 보군.'
얼마나 많은 마법이 설치되어 있는지 지하임에도 마력이 가득 들어차 있어 누리의 감각으로도 내부를 정확하게 파악할수 없었다.
그나마 알수 있는 건 어둠이 있는 곳.
일단 납치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감각을 넓힌다.
딱히 정의에 불타올라 구출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연구소의 존재를 증언해줘야 되니까.'
그들의 증언이 현강식을 더욱 나락으로 이끌 것이다.
'어둠속에서 생명체가 느껴지는 곳이....어라?'
점차 감각의 권역을 넓혀가며 탐지하던 누리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격리시설인듯 개별로 나눠진 좁은공간 여러 개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공간마다 생명체가 느껴졌다.
아마 납치된 사람들이겠지.
그런데
'마력?'
분명 일반인이라 들은 사람들에게서 마력이 느껴졌다.
한둘이 아닌
'....설마.'
전부에게서.
납치된 사람들을 구할 때까지 조용히 움직이려 했던 계획은 이미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곧장 쉐도우점프를 사용하여 이동한다.
"....."
도착한곳은 예상대로 개별 격리시설. 두꺼운 철문으로 빼곡히 들어차 있는 복도였다.
분명 생명체가 이곳에 가득 있음에도 방음이 철저하게 되어있는지 복도는 고요했지만.....
"......하."
누리는 가장 가까운 철문으로 다가가 손을 뻗었다.
밖에서 감시할 수 있도록 철문의 중앙에는 일부분만 열수있도록 장치가 되어있었고 그것을 누리가 여는 순간.
덜컥.
"...아아아아악!!!!"
비명소리가 울려 퍼진다. 지옥의 밑바닥에서나 들릴법한 격통에 찬 비명소리.
여기 뿐만이 아니다.
누리의 귀에 들리는 이곳은,
-끄아아아악!!!
-꺄아아아아악!!!
-끄어어억!!
지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