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속 중간보스에 빙의했다-21화 (22/60)

EP.21 복수

"......"

"쯧"

누리는 혀를 차며 쓰러져 있는 방금 전까지 살아있던 시체들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제대로 시작도 안 했건만 울며불며 살려 달라고 애원하더니 과도한 고통에 얼마 안 있어 쇼크사로 죽어버렸다.

실험체들이 느낀 고통은 이것의 몇 배나 되건만 겨우 이 정도에 죽어버리다니.

어처구니 없을 뿐이다.

"아가, 내 아가."

산발의 여자는 안쪽에서 꺼내주자마자 기절한 아이를 안고는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역시 너무 쉽게 죽였어."

하지만 이미 죽은 녀석들을 되살려서 다시 죽일 수도 없는 노릇.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근본적인 원인이 아직 남아있다는 점일까.

저벅저벅.

".....!"

누리가 가까이 다가가자 애 엄마는 아이를 힘줘 안으며 경계했다.

"....후우. 잠깐 자고 있어요. {일장춘몽}."

털썩.

아이와 아이 엄마를 재우고 다른 실험실에 있던 남은 두 명까지 포털을 열어 사영에게 맡겼다.

이제 이 연구소에 남은 건 몇몇 연구원들과 누리뿐.

고맙게도 기밀 유지를 위해 연구원을 제외한 인력은 운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즉.

"참지 않아도 된다는 거지."

마침 짜증도 제대로 풀지 못했으니 화풀이 정도는 괜찮겠지.

누리가 눈을 감고 집중하자 흑마력이 들끓기 시작한다.

마법이란 마력을 자연의 에너지와 공명시켜 자신의 의지를 현상세계에 관철시키는 이능.

하지만 나약한 인간의 의지로는 한계가 있고 어떻게든 모자란 의지를 강화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수단이 영창, 수인, 마법진 이었다.

"....영혼은 하늘로 육신은 땅으로."

초보 마법사는 보조수단 세개를 전부 사용해야 마법을 쓸 수 있고, 중위 마법사는 영창과 수인으로만, 고위 마법사가 되면 영창만으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이후 마스터급인 대마법사의 경지가 되면 영창을 단축하여 고속영창을 구사할 수 있다.

"흙은 재로, 재는 먼지로, 먼지는 다시 흙으로."

하지만 말 그대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뿐,

아무리 높은 경지라 해도 마법사가 자신의 전력을 내려면 세 가지 수단을 전부 사용해야 했다.

"죽음을 보듬는 불꽃이여 생명을 순환시키는 어버이여."

이러한 사실을 알게된 누리에게 든 한가지 의문.

게임 속에선 주구장창 시동어만 외치는 죽은자들의 왕이 마법진을 그리고, 수인을 맺고, 영창을 전부 외운다면?

"지금 이곳에 강림하여 스러진 생명들을 그대의 품에 품어라."

솔직히 셋 다 사용하면 감당하지 못할 것 같으니 지금은 완전 영창만 시도해본다.

"흙은 흙으로, 재는 재로, 먼지는 먼지로."

영창이 끝나자 들끓던 흑마력이 오히려 잠잠해진다.

폭풍 전의 고요.

방아쇠를 당기기만 기다리는 총알처럼 누리의 손안에 재구성된 흑마력이 완성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requiem(레퀴엠).}"

마지막으로 시동어를 내뱉어 영창으로 강화된 의지를 재구성된 흑마력에 담음으로서 마법에 정체성을 부여한다.

죽은자들의 왕. 1페이즈 범위기. 레퀴엠(진혼시).

게임의 설정대로라면 패턴을 어렵게 만들기 위한 적당한 범위공격 정도였기에 영창을 외운다 해도 큰 차이가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는 누리의 착각이었다.

후우우웅.

분명 지하이기에 바람이 불지 않건만 누리를 향해 바람이 몰려온다.

이러다 진공상태가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바람이 몰려올 때 쯤.

뚝.

바람이 멈추고,

화륵.

불씨가 붙었다. 아니 이것을 불'씨'라고 부를 수 있을까.

우웅. 우웅.

작게 진동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내뿜는 광채를 본 순간 누리는 자신의 예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번쩍.

이미 늦었다.

____--___----___!!!!!

인지를 뛰어넘는 소리와 광량, 그리고 열기가 뿜어져 나오며 연구소의 모든 것을 지워가기 시작했다.

그래. 태워지는 것이 아닌 지워지고 있다.

초월적인 열기는 태워지는 과정을 생략하고 오로지 결과만을 보여주고 있었다.

구구구궁!

물건, 사람 가릴 것 없이 모든 것을 지워내고 이내 팽창하던 열기가 지하를 벗어나 해방되는 순간.

콰가가가가강!!!!!!

장렬히 폭발한다.

한 순간 터져 나오는 붉디붉은 불꽃은 일견에 아름다워 보일 정도.

쿠구구구궁.

폭발은 어둠을 물리치고 땅을 뒤흔들며 자신의 존재감을 널리 알렸다.

화륵화륵.

폭발이 지나간 자리 또한 무사하지 못했다.

초열지옥이 이러할까.

거대한 크레이터 안쪽은 불길이 혀를 날름거리며 더 태울 것이 없나 찾아 헤매고 뜨거운 열기가 겨울의 한기마저 침입을 거부하며 주변을 위협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초월적인 열기가 태울 것들을 미리 소멸시켜 폭발에도 별다른 연기는 없다는 점이려나.

그렇게 조금 시간이 지나, 폭발이 지나가고 청량산의 일부가 삭제된 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누리는 실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교회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복잡하게 일을 처리한 건데,

"망했네."

이정도로 화려하게 저질러 버렸으니 교회의 개입은 피할 수 없겠지.

겨우 영창 몇줄 더 외웠다고 이 정도로 일이 커질지 누가 알았겠는가.

"하아. 일단 실렌의 지위를 이용해서 최대한 개입을 늦추고....."

그렇게 누리가 교회의 개입을 조금이라도 늦추는 방안을 고심하고 있을 때.

그가 서 있는 곳을 향해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계획 조금 당겨서 틈을 없애면....."

평소의 누리라면 당연히 알아챘겠지만,

첫째로 현재 누리 본인도 자신의 마법에 휘말려 재생한지 얼마 되지 않아 기감이 정상이 아니었고,

둘째로 마법의 여파로 흑마력의 잔향이 짙게 깔려 한층 더 기감을 방해하여

그녀의 접근을 눈치채지 못했다.

빠직.

"!!!"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반사적으로 누리는 뒤를 돌아봤고,

"당신...."

그 곳에는 레이첼이 누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그 택시?"

"....하하."

한번 꼬이기 시작하니까 진짜 끝이 없이 꼬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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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다음 날 아침.

뉴스, 신문, 인터넷 가릴 것 없이 크리스마스에 일어난 두 가지 사건들을 떠들어 대고 있었다.

하나는 재벌 3세이자 환현자동차의 영업본부장인 현강식의 마약파티 사건.

또 하나는 청량산에서 일어난 대규모 폭발 사건.

크리스마스날 저녁. 거의 동시에 일어난 두 가지 사건은 누가 더 화제가 되는지 겨루는 것 마냥 식을 줄 모르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두 가지 사건에 차이가 있다면 폭발 사건은 원인이 무엇인지 추측하는 것으로 화제였고 마약파티 사건은 현강식을 비난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미스터리보단 남을 비난하는 것에 더욱 화제가 몰리는 인터넷의 특성상 마약파티 사건에 밀려 화제성을 잃어가기 시작한 폭발 사건.

그런데 어느 순간 온갖 인터넷 게시판과 SNS에 뿌려지기 시작한 하나의 글 덕분에 폭발 사건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며칠 전 폭발이 일어났던 청량산의 진실을 말하려 합니다.]

글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러 했다.

청량산의 지하에는 인체실험을 진행하는 연구소가 있었고 그곳에서 여러 사람을 납치해 끔찍한 실험을 자행했다는 것이다.

처음 글이 올라오고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네. 다음 주작 글.

-어그로 끌려는 거면 성공했네.

-요즘 이런거에 누가 속아?

그저 사건에 편승하여 관심을 끌려는 관심병자의 소행으로만 봤을 뿐.

하지만 글과 같이 올라온 영상을 본 순간 사람들은 말문을 잃었다.

[으아아악!!!]

연구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한 남자에게 물리적인 고문을 가하는 영상.

[꺼어어어억!]

연구원이 주사를 놓자 온몸이 울긋불긋해지며 몸을 뒤트는 영상.

그리고,

[엄마아아아악!]

[아가아아아아아!!!]

엄마로 보이는 여자 앞에서 아이를 고문하는 영상.

-뭐야...이게.

-합성? CG인가?

-이게 진짜 21세기에 일어난 일이라고?

-아니. 마루타도 아니고.....

너무 비현실적이라 오히려 믿지 못하는 상황.

하지만 여기에 결정타를 꽂는 일이 있었으니.

[죄송합니다.]

환현그룹의 유력한 후계자이자 재무이사의 직책에 앉아 있는 현강태가 자신의 동생이 범인이라고 직접 밝혔기 때문이다.

환현그룹의 발표에 긴가민가하던 국민들은 일제히 분노를 폭발시켰다.

-이런 미친 새끼들.

-진짜 찢어 죽일 놈들이네.

-당장 사형시켜라!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인체실험이라니. 말이 돼?

[책임을 통감하며 그룹차원에서 모든 보상 문제를 해결할 것이고 현강식 영업본부장을 처벌하는데 모든 역량을 동원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환현그룹의 사과에도 시민들의 분노는 꺼질 줄 몰르고 환현그룹을 매도 했지만 환현은 아무 반박도 하지 않고 비판을 수용하며 모든 조사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했다.

실제로 환현그룹이 공개한 자료에는 현강식이 단독으로 저지른 일이란 게 명명백백히 적혀있었다.

하지만 현강식이 몸담고 있던 환현그룹의 말을 사람들이 믿을리 만무.

-딱봐도 조작했네.

-누가 믿음.

-환현그룹은 꼬리자르기 하지마라!

-환현그룹 불매하자!

이대로 가면 그룹본사 앞에서 시위라도 벌어질 판이었다.

실제로 몇몇 게시판에서 시위를 모집하고 있었고 여론에 움직여 정치권에서도 반응을 내보이고 있었다.

그렇게 뭐가 터져도 터지려고 할때쯤.

[안녕하세요. 얼마전 인체실험 피해글을 올렸던 피해자입니다.]

인체실험을 당한 피해자들이 다시 글을 올렸다.

자신들은 직접적인 가담자만 처벌받길 원하지 죄없는 사람들이 마녀사냥 당하길 원하는 것은 아니라고,

환현그룹 전체를 욕하는 것은 자제해 달라는 글을 올렸다.

사실 이는 피해자들에게 현창식에 대한 확실한 복수를 약속한 누리의 부탁으로 올린것이었지만,

이것을 모르는 일반인들은 피해자 본인들이 직접 원한다는데 어쩌겠는가.

이에 환현그룹전체를 향하던 분노는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환현그룹 전체를 욕하던 분위기는 어느정도 사그러졌지만 현강식에게 돌을 던지는 일은 멈추지 않는 사람들.

아니. 멈추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점점 과열되는 양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여론에 따라 이미 마약으로 인해 구속되어 있던 현강식에게 온갖 죄목이 씌워지며 점차 형량이 늘어나더니 마침내 사형까지 구형받게 되었다.

그래도 여기서 끝났으면 여론이 잠잠해진 이후 어떻게든 빠져나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강식에게 악재는 끝나지 않았으니.

"아버지가 알았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구치소에 마련된 면회소에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그게 퀸즈가드 측에서 항의를 보내왔습니다."

퀸즈가드 측에서 암살자를 고용해 가연을 죽여 모조엘릭서를 탈취하려 했다는 사실을 환현가에 직통으로 보내왔다.

"씨발 그걸 기사쟁이 새끼들이 어떻게 아는데!"

"그건 저도 잘......"

"무조건 아니라고 해! 어차피 증거도 남아있는 증거도 없으니까 무조건 잡아떼라고! 알았어?!"

절대 인정해서는 안 된다.

만약 이 상황에서 아버지에게 마저 버림 받으면 정말 모든 게 끝이다.

"그, 그게...."

하지만 현강식의 말에 비서는 무언가 망설이다가 겨우 입을 떼고 현강식이 잊고 있던 한가지 사실을 말해주었다.

"저번에 명령하신 회장님과의 약속 때문에 회장님께선 이미 확신하신 것 같습니다."

"아......"

며칠전 비서에게 내렸던 명령.

자신을 무시한 어둑시니에게 그룹차원의 제재를 하기 위해 잡았던 아버지와의 약속.

털썩.

끝났다. 모든 게.

"......아니. 아니지."

한참을 고개를 떨구고 있던 강식은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나 혼자만 끝날 수 없지. 누구 좋으라고. 씨발 내가 혼자 죽을 것 같아?"

그리고 고개를 올린 현강식의 눈은 불길하게 빛나고 있었다.

"절대 나 혼자 안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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