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속 중간보스에 빙의했다-23화 (24/60)

EP.23 모순

'복수 끝에 남는 것은 허무함 뿐'라는 말이 있다.

복수가 낳는 것은 복수뿐이고 복수를 이뤄도 결국 후회하게 된다는 격언.

물론 이 말은 개소리다.

복수 뒤 찾아오는 허무는 그저 목표를 잃은 데서 오는 번아웃일 뿐, 복수 이후 또 다른 목표가 있다면 허무도 찾아오지 않는다.

그러니 복수를 원한다면 이후의 계획까지 수립해 건강하게 복수를 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복수를 이루면 결국 후회하게 된다고?

이건 복수를 해보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말이 확실하다.

왜냐고?

"으아아악!!!"

지금 경험하는 중이거든.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현강식을 가지고 '노는'중이다.

쾅쾅쾅쾅!!!

누리의 몸에 계속해서 부딪히고 있는 현강식의 피로 물든 주먹이 굉음을 터트리고 있지만 누리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그의 몸에 둘러져 있는 어둠, 암린갑이 현강식의 공격을 전부 막고 있었으니까.

마스터급이 아닌 이상 강식의 공격에 암린갑이 뚫릴 일은 없었다.

느긋하게 현강식의 발악을 바라보며 슬쩍 흑마력을 움직인다.

스윽.

콰당!

누리가 움직인 흑마력이 발이 걸려 성대하게 넘어지는 현강식.

"이 개새끼가아아아아!!!!!"

더욱 분노하며 달려드는 그를 보니 누리는 웃음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푸흐흐흐흐."

후회? 이렇게 신나고 재미있는데?

그의 공격을 막지 않고 받아들이며 적당히 농락하길 30분쯤.

방금처럼 발을 걸어 넘어뜨리기는 기본, 이마에 딱밤을 때리고 뒤통수를 치며 뺨 싸대기를 때리기도 했다.

현강식도 처음엔 경계하나 싶더니 가지고 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듯 분노에 차올라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다.

저 빨간 오뚝이 같은 꼴이 얼마나 우스운지. 해도해도 질리지 않는다.

"......"

하지만 누리의 뒤에서 그 모습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보고 있던 현강태는 등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기분 나쁠 정도의 타격이라지만, 그 타격이 쌓이며 몸 군데군에서 피가 흘러나와 현강식은 점점 온몸이 붉게 변하고 있었고

"으아아아!!!"

종내에는 피칠갑을 한 채 충혈된 눈으로 달려드는 모습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길이 없었다.

"맞아줘도 죽이질 못하네. 큭큭큭."

그가 원한다면 단숨에 제압할 수 있음에도 순진한 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농락하고 있을 뿐.

현강태의 눈에는 누리가 싸이코패스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최소 마스터급. 어쩌면 마스터급조차 뛰어넘는 실력자가 싸이코패스라니.'

그 존재 자체만으로 재앙이다.

아무리 동생을 끝장내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해도 저런 모습을 보는 가족 이전에 인간으로서 고욕이었다.

결국 참다못한 강태가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었다.

"저기...이제 슬슬 시간이......"

실제로 가문의 힘으로도 경찰의 출동을 막는 것은 한계가 있다. 앞으로 끽해봐야 십분.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겼네."

"크아아아악!!"

"넌 좀 이따가 더 놀아줄 테니까 잠깐 자라. {일장춘몽}."

털썩.

누리가 마법을 사용하자마자 쓰러지는 강식. 마스터급에 도달하지 못한 그는 누리의 마법에 저항할 수 없었다.

"이건 내가 가져갈 테니까 뒷일은 맡겨도 되겠지?"

"네. 현강식은 탈옥 후 실종으로 처리 하겠습니다."

"그래. 혹시 특이 사항 있으면 마도구로 연락하고. 그럼."

누리가 잠든 현강식을 들쳐맨 후 포털을 타고 사라지자 현강태의 몸이 휘청거렸다.

다리에 힘이 빠져 넘어질 뻔한 것을 겨우 버텨낸 강태는 다리가 떨리는 것을 도저히 멈출 수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장난치는 것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강식과 달리 평소 눈치가 좋았던 강태에게는 분명 보았다.

잠깐 마주친 누리의 눈 안에 타오르는 선명한 악의가.

현강식이 어떤꼴을 당할지 머리속으로 상상하던 강태는 결심했다.

절대 저 악의가 자신에게, 그리고 환현가에 향하게 두면 안 된다.

강태는 흔들리는 손으로 휴대폰으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사라진 현강식의 뒤처리를 맡기는 한편 전에 명령한 누리에 대한 조사를 전부 취소시켰다.

그리고 신분을 숨기는 것으로 보이는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만한 것을 찾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적으로 둘 수 없으면 친구가 되는 수밖에 없지."

다음날 아침. 당연하다면 당연히 난리가 났다.

인체실험을 진행하여 구속된 재벌 3세의 탈옥.

탈출중에 구치소 직원을 몇이나 살해하고는 사라져버렸으니 뉴스에선 하루종일 현강식의 탈옥에 대한 이야기만 퍼다 나르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이튿날이 되자 탈옥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씩 수그러져 가고 몇 가지 굵직한 스캔들이 터지더니 며칠이 지나 인터넷과 뉴스에선 탈옥에 대한 이야기는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이는 환현가에서 한국삼주 중 다른 두곳에 현강식이 사망했다고 알렸기 때문이다.

물론 증거도 없었지만 환현가에서 몇 가지 양보를 함으로써 다른 두 가문도 조용히 넘어가는 것에 동의했다.

그렇게 조용하게 넘어가게 된 사건의 범인 현강식은.

"이런 망가져 버렸나."

"......"

망가져버리고 말았다.

툭툭.

손으로 건드려봐도 풀린 눈으로 허공을 처다볼 뿐.

아쉬웠다. 좀 더 힘을 조절할 수 있었으면 며칠은 더 가지고 놀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자신에게 망가진 정신을 회복할 수단은 없으니 이제 끝내야겠지.

길고긴 복수의 종지부를 찍을 시간이다.

"또 보자고. 현강식."

콰직.

무려 2년이란 시간이 걸린 복수치고는 허무한 결말이었다.

여기서 더 이상 목표가 없다면 번아웃하여 허무함만이 남겠지만 나는 허무함을 받아들일 여유 따위 없다.

나에게는 부모님을 되살려야 한다는 더욱 커다란 목표가 있으니까.

허무도 후회도 남을 틈 따위 없다.

"음. 보람찬 복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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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쪽은 움직일 생각이 없음."

"후우. 다행이네. 너무 화려하게 해먹어서 어떨까 했는데."

"흔적 조사까지는 했지만, 마력과 흑마력의 잔향을 전혀 발견하지 못해서 마법은 시발점이고 폭발 자체는 화학적인 것이라고 판단함."

폭발당시가 찍힌 화면에 마법의 흔적이 찍혔지만,

누리가 이번엔 실수하지 않고 흑마력의 잔향까지 전부 거둬갔기 때문에 교회는 폭발의 시작이 마법일 뿐 대폭발이 일어난 이유는 연구소의 화학물질 때문이라고 판단, 조사를 끝마쳤다.

"그나저나 잘 갔다 왔어?"

실렌은 슬슬 돌아오라고 눈치를 주는 교회 때문에 임무연장을 위해 잠시 교회의 본단에 다녀왔다.

"임무연장 허가받음. 원래는 부정적이었지만 마침 당신이 일을 벌여줘서 쉽게 허가가 남."

마스터급을 뛰어넘었다는 올리버 램파트가 한국에 방문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규모 폭발사건이 일어났다.

심지어 그 폭발지는 한국의 대표적인 이능집단 중 하나인 환현가의 인체실험장.

그렇다고 교회 측에서 직접 개입하기엔 이미 퀸즈가드 측에서 환현가 측에 공식적인 항의를 보내 개입하기 난감해졌다.

그런와중 교회에서도 가장 잠입과 정보수집 능력이 뛰어난 실렌이 직접 한국에 남길 바란다니 교회의 수뇌부는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다행히 의도대로 됐네."

퀸즈가드 측에 현강식이 어둑시니에 의뢰한 정보를 흘려 현강식을 고립시키는 한편 교회의 개입 또한 차단한다.

중간에 사고를 치긴 했으나 결국 일의 흐름은 누리가 의도했던 데로 흘러갔다.

"복수는 끝남?"

"그래. 보람찬 복수였지."

"보람찬?"

누리의 단어선택에 이상함을 느낀 실렌이었지만 아직 한국어가 익숙하지 못해서 알아듣지 못했다고 판단하여 넘어갔다.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됨?"

"음....사실 딱히 계획은 없어."

메인스토리가 시작하기까지 3년.

힘을 다루는 것도 충분히 익숙해졌고 쓸만한 조직도 얻었으며 복수 또한 끝마쳤다.

이제 부모님을 되살려 내기 위해 부활아이템을 얻어야 되지만 세 가지 부활아이템은 전부 메인스토리가 시작된 이후에 나타난다.

물론 그전에도 실렌과 어둑시니를 통해 꾸준히 조사하겠지만 발견되지 않는다면 누리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원래는 세력을 키울까도 했지만...."

사실 실렌을 만나기 전까지는 흑탑을 접수하려는 계획도 있었다.

아무리 테러단체지만 흑탑의 소속원 모두가 악한건 아니다.

이 세계에선 고작 십여년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흑마력 사용자는 심한 차별을 받고 있었기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흑탑에 속하게 되었다.

지금에서는 조금 나아졌지만 흑마력 사용자를 대표하는 단체는 흑탑뿐이기에 아직도 흑탑으로 흘러들어가는 경우가 대다수다.

그렇기에 자신이 최대한 조용하게 흑탑을 지배해서 솎아내면 될 줄 알았다.

실제로 흑마력에 한에서 누리는 무적이나 다름없었고 자신이 예언 속의 왕임을 밝히면 정당성 또한 가질 수 있기에.

하지만.

"교회와 직접 연결되어 있으면 이야기가 달라지니까."

만약 흑탑을 정복하다 내 정체가 교회에 흘러들어 가게 되면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모른다.

그러니....

"잠깐."

그때 누리의 말을 끊는 실렌.

"전부터 궁금했음. 교회가 알면 뭐가 위험하다는 거임?"

"뭐가 위험하다니 그야 교회가....."

"그러니까 교회가 '왜' 위험하다는 거임?"

실렌의 질문에 누리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본인이 교회 소속이면서 교회가 가지는 위험성을 모르다니.

"교회가 알면 당연히 날 토벌하려 들 텐데 당연히 위험하지."

아무리 누리가 강하더라도 교회가 토벌하려고 마음먹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난 어떻게든 3년 뒤까지 살아남아야돼."

누리의 말을 들은 실렌은 잠시간 고민하더니 더욱 알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교회가 왜 당신을 토벌함?"

"무슨 소리야. 내가 죽은자들의 왕인건 너도 알고 있잖아?"

대화가 제자리를 도는 것에 답답함을 느낀 실렌은 한숨을 쉬며 다시 한번 정확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왜 교회가 죽은자들의 왕을 토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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