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4 모순
그동안 누리가 교회에 들키지 않으려 노력에 노력을 기울였던 이유.
게임 내에서 교회는 흑마력 사용자를 무조건 적대한다는 설정.
죽은자들의 왕이 아무리 중간보스라 해도 교회에서 토벌을 나서면 당해낼 수가 없다.
물론 게임과 현실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점만큼은 다르지 않다고 누리는 믿고 있었다.
2년전 강목사가 스스로 목숨까지 끊으며 똑똑히 알려줬으니까.
당시에는 10년간 평범한 세상이라고 알아왔던 이곳이 게임속이란 사실 때문에 혼란스러워 넘어갔지만 사실 그 일은 누리의 뇌리에 상당히 깊게 박혀있었다.
가족을 제외하고 가장 믿었던 사람의 배신.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얼굴에 방아쇠를 당기는 모습은 절대 잊을 수 없다.
"교회가 토벌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실렌은 이런 누리의 생각을 정면에서 부정하고 있었다.
"맞음. 만약 교회에서 알게 되어도 당신을 토벌하지 않음."
실렌은 확신을 담아 단호하게 말했다.
"...어째서?"
누리는 할 말이 많았지만 일단 실렌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그녀는 적어도 이런 상황에서 헛소리 할 사람이 아니니까.
"저번에 말했듯이 교회는 흑탑과 거래하고 있음. 당신 정도의 흑마력을 사용하는 강자가 나타난다 해도 곧바로 움직임을 보이진 않을 거임."
"교회가 흑탑과 거래한다 해도 수뇌부만 그런 거 아닌가? 교회 내부의 여론이 움직이면 수뇌부도 무시 못할텐 데."
겉으로는 흑탑과 적대적인 교회가 대놓고 활동하는 흑마술사를 토벌하지 않는다? 교회 소속원들의 반발을 살 것이 분명했다.
"교회의 타락은 당신의 생각보다 깊음."
흑탑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인사는 수뇌부 한정이지만 윗물이 탁해서야 아랫물이 맑을 리 없었다.
반발하는 인사들을 재물과 권력으로 유혹하고 그래도 통하지 않는다면 가차 없이 쳐내버렸다.
"아직 제대로 된 생각을 가진 인사들이 남아있긴 하지만 권력을 잡고 있는 사람은 없음."
지금의 교회는 정의를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 이익을 좇을 뿐.
그러니 동양의 작은 나라에 좀 강한 흑마력 사용자 하나 나타났다고 교회가 움직일 리 없다.
".....그럼 흑탑은? 흑탑이 자신의 산하에 들어오지 않고 대놓고 활동하는 흑마력 사용자를 가만히 두겠어?"
흑탑의 모두가 악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만은 단언할 수 있다. 흑탑의 수뇌부는 '악'하다고.
흑탑의 탑주와 부탑주, 그리고 장로들.
인신매매를 일삼으며 생명을 제물로 바쳐 수명을 늘리고 자신의 부하들을 소모품처럼 사용하여 테러를 일으킨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악의 화신이자 욕망에 들어찬 괴물들.
오랜세월 흑탑과 흑마력 사용자들이 차별받게 만든 장본인들이다.
"그 노괴들이 가만히 있을까?"
자신들의 지위가 흔들리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탐욕 가득한 노괴들은 늦든 빠르든 누리를 짓밟으려 할 것이다.
물론 누리가 흑마술사들 한테 당할리 없지만 자신들의 힘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채면 교회를 이용하겠지.
"그래도 교회는 움직이지 않을 거임."
"뭐?"
그럼에도 이어지는 실렌의 단호한 대답에 누리는 되물을 밖에 없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교회의 타락은 당신의 생각보다 깊음."
흑탑이 교회를 타락시키며 한 가지 예상 못 했던 것이 있다면 교회의 수뇌부 또한 만만치 않게 탐욕스럽다는 것이다.
흑탑이 물질을 제공하면 할수록 교회는 더욱 큰 것을 요구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흑탑이 제공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지금 와서는 흑탑을 써먹기 편하고 돈까지 가져다 바치는 도구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교회의 수뇌부.
당연히 흑탑쪽에선 불만이 있겠지만,
"교회를 타락시켜 세력을 키웠다고 해도 아직 흑탑이 교회에 맞먹지 못함."
몇년쯤 더 지나면 모를까 아직 흑탑이 교회를 맞상대하기엔 부족했다.
"게다가 지금 한국엔 내가 있음."
마침 마스터급인 십자구마회의 부단장이 한국 파견되어 있으니 굳이 병력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핑계도 있다.
"...하지만 결국 네 가정은 저들이 나를 그저 강한 흑마술사로 알고 있을 경우잖아?"
만약 저들이 누리가 죽은자들의 왕이란 것을 구체적으로 알게 된다면,
과연 그때도 교회가 가만히 있을까.
"네 말대로 교회가 흑탑을 신경 쓰지 않는다면 내 정체가 탄로 났을 때 교회가 가만히 있지 않겠지."
솔직히 흑탑의 반응은 예상가지 않는다.
예언대로 그를 떠받들지 아니면 욕심에 잡아먹혀 적대할지는.
하지만 교회는 다르다.
"아니. 교회도 다르지 않음."
"......어..."
너무 단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단호한 반박에 순간적으로 말문을 잃은 누리.
"교회의 추잡한 꼰대들이, 자신들이 무시하는 흑탑의 예언을 믿을 것 같음?"
자신들이 세상의 왕인 것 마냥 생각하는 교회의 늙은 꼰대들.
머리가 굳을대로 굳어 흑마술사의 예언따위 믿을 리 없었다.
비웃음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아마 개무시를 당하겠지.
실제로 최근 수뇌부에서 사제교육의 예언을 빼자고 말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미 누리의 모든 생각을 논파한 실렌은 아직 말할 것이 남았는지 말을 이었다.
"만약 흑탑이 욕심에 잡아먹혀 어떻게든 교회를 움직이고 교회의 수뇌부가 변덕을 부려 직접 병력을 보낸다고 가정함."
실렌이 누리를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던 이상함.
"당신이라면 충분히 물리칠 힘이 있지 않음?"
교회에게 향하는 누리의 과도한 두려움.
"...무슨 소리야. 교회가 전력으로 나서면 나따위...."
"물. 론."
누리가 반박했지만, 곧바로 말을 끊는 실렌.
"교회가 전력을 다한다면 당신이라도 못 당해냄. 아니, 당신뿐만이 아니라 세상 그 누구도 교회의 전력엔 대적하지 못함."
"그럼 왜...."
"하지만 교회가 이곳에 전력을 투사할 수 있다고 생각함? 작 작은 땅덩이에 꽤나 수준 높은 이능집단들이 지배를 하고 있으며 미국과 동맹에 중국, 일본과 이웃하고 있는 이나라에?"
전 세계 어디를 봐도 손에 꼽을 만큼 복잡하디 복잡한 이해관계를 얽힌 한국에,
교회의 전력.
신성기사단, 십자구마회, 성광수도회, 성천병단 등. 많디 많은 교회의 전력을.
"전부 투사할 수 있다고 봄? 난 절대 아니라고 봄."
교회가 아무리 진지하게 일을 처리해도 기껏해야 한 개, 많아봤자 두 개의 전투단이 파견되겠지.
그리고 그동안 실렌이 본 누리의 힘이라면
"전투단 한두개 정도의 전력은 충분히 감당함."
".........."
"그리고 혼자 상대해야 할 필요가 있음? 혼자가 안되면 세력을 이루면 됨."
"....세력?"
"맞음. 세력."
뭔가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던 누리는 실렌의 마지막 말에 누리는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랬다.
세력.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
혼자가 모자라면 여럿이서 상대하면 된다. 어린아이도 알만한 간단한 이치.
'그런데 왜 나는 그 생각을 안 했지?'
하지만 어째서인지 누리는 지금까지 혼자서만 싸워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이미 어둑시니라는 단체를 얻었고,
실렌이라는 조력자를 얻었으며,
환현가문의 소가주와 인맥이 있고,
간접적이지만 퀸즈가드와도 선이 닿아있다.
이미 웬만한 이능집단도 무시하지 못할만한 전력과 인맥.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러한 사실을 부모님, 하나, 교회 등의 변명을 해오며 무시해왔다.
반드시는 혼자 싸워야만 한다는 것처럼.
마치
'게임속 중간보스같이.'
그리고 이 순간 누리는 뭔가 머릿속이 개이는 기분을 느꼈다.
이와동시에 자신의 머릿속을 막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도 깨달았다.
자신이 이 몸에 빙의한지 12년.
빙의한 당시 본체의 기억이나 의식은 전혀 남아있지 않아 당연히 죽거나 사라진 줄 알았지만,
'....남아있었던 건가.'
미묘하게 달라진 입맛, 미묘하게 차분해진 성격, 살인한번 해본 적 없음에도 망설임 없이 손을 쓰는 냉정함.
증거는 도처에 널려 있었지만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 눈치채지 못하게 한 건가?'
죽은자들의 왕으로서 본능이 남은 것인지 아니면 게임속 설정의 억지력이 남은 것인지,
이 또한 아니면 나를 이곳에 보낸 빌어먹을 신의 의도인지 모르겠지만,
무언가 남아 자신의 눈을 가리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지금도 실시간으로 사고의 흐름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향하려 하고 있었다.
실렌에게 전부 논파 당하지 않았다면 또 같잖은 변명을 하고 억지로 눈을 돌렸겠지.
'운명....인가.'
나는 공략될 운명이니 혼자 싸워야 한다.
나는 공략될 운명이니 들키지 않아야 한다.
나는 공략될 운명이니 늘 죽음을 염두에 둬야 한다.
그러니 운명대로 메인스토리에 영향을 끼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사고과정 끊임 없이 반복되며 누리의 생각을 가로 막았다.
"후후후."
놀아나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자신도 모르는 새에 놀아나고 있던 건가.
"그래. 그랬다 이거지. 큭큭."
분노가 극에 이르니 되려 웃음이 나온다.
쿠구구궁.
실렌의 만나기 위해 온 임시거처가 통째로 흔들리고,
스르륵. 스륵.
누리의 몸에서 줄기줄기 흘러나오는 어둠이 주변을 위협하듯 날름거린다.
"푸흐흐흐흐."
그래. 가만히 앉아서 중간보스 역할이나 하라 이건가?
적당히 주인공 앞길 좀 막다가 적당한 시점에 주인공한테 뒈지는, 뭐 그런 몬스터?
"이런 좆같은 새끼가....!!!!"
그동안 알게 모르게 무너져가던 누리의 정신이 갑작스런 충격에 폭주하기 시작했다.
"...리!"
그냥 행복하게 살 수 있길 바란 것뿐인데,
나는 메인 스토리대로 불행하게 죽어야 한다 이건가?
"...ㄴ리!"
그렇게 메인스토리가 중요하다면 내가 직접 망가트려 주마.
이 세상을 전부 부숴서라ㄷ....
"누리!!"
쾅!
그 순간 한없이 가라앉던 누리의 의식을 다시금 강제로 끄집어 올리는 외부의 충격.
쿠우우.....
거처를 흔들던 진동이 사라지고 뿜어져 나오던 어둠도 누리의 몸속으로 흡수되었다.
뚝. 뚝.
정신이 돌아온 누리의 눈에 처음 보인 것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실렌.
그리고 그녀의 손에서 흐르는 피.
"...미안하다."
"괜찮음. 그나저나 역시 죽은자들의 왕. 어둠을 뚫는 데에만 손이 날아갈 뻔 했음."
실렌은 신성력으로 자신의 손을 치료하며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자 누리가 물었다.
"...안 물어봐?"
"백 명의 사람이 있으면 백 가지의 사정이 있는 법임. 당신에게도 당신만의 사정이 있어도 이상할 건 없음."
자신은 간단한 충격 하나에 폭주해버렸는데 상처 입어가면서 자신을 정신 차리게 한 그녀의 침착함에 들리지 않는 고개.
전생까지 합치면 누리의 나이가 훨씬 많지만, 그녀의 어른스러운 대처 앞에 한없이 작아진다.
"....고맙다."
"이래 봬도 사제임. 회복은 기본이니 이 정도 상처는 별것 아님."
"하긴."
하는 행동은 암살자에 가깝지만, 그녀는 엄연히 신성력을 쓰는 성직자 직군에 포함된다.
....잠깐.
"사제?"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한 가지 기억.
그래. 분명 실렌은 신성력을 사용하는 사제이다.
그런데 어떻게 내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거지?
갑작스러운 만남과 당황, 그리고 실렌의 침착함 때문에 전혀 생각지 못했던 모순.
강목사가 뇌리에 새겨준,
'성직자 직군은 죽은자들의 왕을 마주하면 혼란에 빠져 무조건 공격모션을 취하게 된다.'
누리의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게임속 설정.
하지만 실렌은 자신을 처음 봤을 때부터 적대감이 전혀 없었다.
심지어 모르고 찾아온 것도 아니고 자신이 직접 누리가 죽은자들의 왕이란 것을 알아내고 찾아왔다.
'그런데 왜 실렌은 나에게 적대감을 보이지 않지? 이것도 숨은 설정?'
아니, 숨은 설정이 아니다.
왜냐하면,
'만날일 없는 보스몬스터와 네임드몬스터 사이에 설정따위 있을 리 없으니까.'
출현지역이 정해져 있는 보스와 네임드가 마주치는 것은 게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교회와 흑탑은 어떻게든 숨은 설정으로 취급할 수 있지만, 이 경우는 명백한 설정 충돌.
'아니. 설정 충돌 보단 설정 공백인가?'
공백이든 충돌이든 상관없다.
오류가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중요할 뿐.
'설정도 완벽하지 않다는 뜻.'
설정이든 운명이든 파고들 틈이 있다는 것이다.
"정말 고맙다. 실렌."
"?"
방금 전까지 실렌의 논파로 설정에 묶여있단 사실에 절망했지만, 다시 실렌 덕분에 희망을 엿볼수 있었다.
저번 숨은 설정부터 이번 설정오류까지 그녀가 아니었다면 아무것도 모른 채 뭔지 모를 것에 끌려다녔겠지.
하지만 이젠 다르다.
가족도, 힘도, 세력도 포기하지 않고 얻어주겠다.
"전부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