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속 중간보스에 빙의했다-27화 (28/60)

EP.27 메인스토리

"당신은....누구십니까."

왠지 이말 요즘 자주 듣는 것 같은데.

속으로 실없는 생각을 하며 누리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여성을 바라보았다.

레이첼 램파트.

퀸즈가드의 로열나이트이자 마스터나이트의 딸.

이스트헌터 스토리의 메인히로인 중 하나.

그녀를 칭하는 수많은 말이 있었지만 누리는 그것들을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누리가 아는 그녀의 정보는 전부 게임 내에서의 정보.

이곳은 현실이고 설정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이상 그녀를 게임 속 메인히로인이 아닌 그저 '레이첼'로서 바라봐야 한다.

".....아니. 생각해보니 당신이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군요."

물론 게임에서의 정보를 아예 무시할 생각은 없지만 절대 주가 되어선 안 된다.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와 싸워주십시오."

이런 모습을 알고 싶던 건 아닌데 말이지.

연구소를 폭발시킨 직후. 그녀와 마주치긴 했지만 곧바로 쉐도우점프를 사용하여 자리를 벗어났다.

누리는 당연히 그 이후 그녀와 접점이 없을 줄 알았지만,

뒤탈없이 일을 끝마쳤다 생각한 복수극에 한가지 치명적인 실수를 남기고 말았다.

바로 퀸즈가드로 흘린 어둑시니의 정보.

퀸즈가드가 환현가에 항의 했다는 사실은 당연히 레이첼에게도 흘러들어 갔고,

거기에 누리와 마주쳤던 장소가 환현가의 연구소라는 것까지 알게된 그녀는 일련의 사건에 누리가 관련되어 있음을 판단.

그저 은둔하고 있는 실력자의 변덕인줄로만 알았던 가연의 회복을 도운 일이 좀 더 깊은 관계로 얽혀 있음을 확신하였다.

여기서 가연을 직접적으로 추궁하는 것은 하수의 행동.

'그때 그 그림자는 왜 병원에 있었던 걸까요.'

'네? 뭐가요?'

'보통 은둔자는 사람이 많은 곳을 피하기 마련입니다만.'

'가, 가족 병문안이라도 왔나 보죠.'

'하긴. 은둔자라해도 가족은 있겠죠.'

'뭐, 뭐. 여동생이라던가....'

'....호오. 여동생이군요. 아. 하나양에게도 오빠가 한 분 있었죠.'

'흠! 크흠! 그, 그것참 우연이네요.'

'우연치고는 겹치는 부분이 많네요. 혹시....'

'네?! 겹치는 부분이라고 해봤자 둘 다 남자라는 것 밖엔....'

'남자요?'

'네?'

'저는 은둔자가 남자란 말은 한번도 한적이 없습니다만.'

'아....'

조금만 방비를 해도 걸려들 일이 없는 초보적인 유도신문이었지만 순수한 가연은 간단하게 걸려들고 말았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의 상황.

"저와 싸워주십시오."

"....대련 말인가요?"

누리는 어떻게든 납득하여 받아들이려 노력했지만,

"아뇨. 대련 말고 전력을 다해 부탁드립니다."

그녀는 게임에서나 현실에서나 당당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말하시는 거죠?"

이미 모든 걸 확신하고 온 그녀에게 누리도 숨김없이 물었다.

자신의 정확한 정체는 모르겠지만 힘의 차이는 그녀도 어느 정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만약 제가 죽는다 하더라도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신경쓰지 않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하아."

내가 무슨 사이코패스 살인마도 아니고.

.....아무튼 아니다. 흠흠.

"저는 그날 겁을 먹고 싸움에서 도망쳤습니다."

"기사로서 임무를 저버리고 비겁하게 변명하며 저는 제 자신의 명예를 스스로 땅바닥에 추락시켰습니다."

"그러니 당신과 다시 싸움으로서 명예를 회복시키려 합니다."

털썩.

"부디 저와 싸워주십시오."

무릎까지 꿇고 부탁하는 레이첼을 보며 누리는 곤란함을 느꼈다.

싸워주는 건 어렵지 않다.

다만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그녀가 만족하지 못할 것이고 전력을 다하면 그녀는 확실히 죽을 것이다.

'역시 이럴 땐 작전상 후퇴를....'

"만약 거부하신다면 전 이자리에서 목숨을 끊겠습니다."

....이래서 눈치 빠른 것들은.

외통수다.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기사는 명예를 위해 목숨도 초개와 같이 다룰 수 있다는 말이 머릿속에서 맴도는 누리는 성격상 차마 도망칠 수 없었다.

"...이러니까 착한 사람들이 손해 보고 사는 거라니까."

후우우.

깊은 한숨을 내쉰 누리는 레이첼을 일으켰다.

"좋아요. 싸워 드리겠습니다."

"정말 감사ㅎ....!!"

"단!"

기뻐하는 것은 아직 이르다는 듯 레이첼의 말을 중간에 끊고 말을 이어나가는 누리.

"당신을 죽이긴 싫으니 전력을 다하지 않겠습니다."

"네? 그게 무슨...."

"대신 당신이 만족할 때까지 주기적으로 싸워 드리겠습니다."

질이 안 되면 양으로 때운다.

"...."

"왜 저에겐 영원히 이길 자신이 없습니까? 그럼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돌아가십시오. 약자에게 두려움은 창피한 일이 아닙니다."

빠직.

"....그말 후회하게 해드리죠."

적절한 조건과 적절한 도발.

잘 어우러진 두 요소로 이끌어낸 적절한 타협점.

"물론 공짜는 아닙니다. 싸워주는 동안에는 제 밑에서 일해 주셔야겠습니다."

계약후 추가 조건 통보까지.

내가 생각해도 완벽하다.

"알겠습니다."

"그럼 계약 성립이군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레이첼과 악수를 나누던 누리는 생각했다.

계약서는 언제나 꼼꼼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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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와 현재.

캉! 캉! 카강!

정직하면서도 파괴적인 기사의 검격이 연신 누리를 향해 날아든다.

쾅!

그리고 어느 순간 강렬한 폭음이 나며 레이첼의 검이 크게 튕겨 나갔는데 순식간에 한 바퀴를 돌며 다시금 누리에게 향한다.

램퍼트 소드맨십. 제3형. Trebuchet(트레뷰셋).

콰광!

좀전 보다 더욱 커다란 폭음을 내며 부딪히는 검이었지만 아직 누리의 어둠을 뚫기에는 역부족.

콰광! 콰과강! 콰아앙!

그럼에도 레이첼은 포기하지 않았는지 검의 반발력과 원심력을 더하며 계속해서 누리의 어둠에 부딪혀간다.

하지만 레이첼의 노력에도 끝은 다가왔으니.

캉!

폭음을 내뱉던 레이첼의 검이 어느 순간 맑은소리를 내며 부러지고 말았다.

"자. 오늘도 끝."

둘의 대련, 아니 싸움의 끝은 늘 같았다.

레이첼이 공격을 퍼붓고 누리는 방어를 한다.

그러다 사용하던 임시용 검이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부러지면 종료.

솔직히 이 이상 해주고 싶어도 누리로서는 불가능하다.

엄연히 따지자면 누리는 흑마술사.

그가 아무리 대단한 죽은자들의 왕이더라도 검술 쪽은 검의 ㄱ자도 모르는 문외한이다.

그렇기에 금방 질린 레이첼이 떠나가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져도 보았지만.

"음. 확실히 트레뷰셋을 사용할 때는 부딪히는 순간 예기보다는 내구도에 치중하는 게 오히려 공격적인 측면에서도 더 효과적이네."

무언가 효과가 있긴 있는지 검이 망가지는 시점이 나날이 증가하고 있었다.

'괜히 메인히로인이 아니라는 건가.'

자신이 메인히로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그녀의 실력은 날이 갈수록 몰라보게 성장하고 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좋아해야 하는지 싫어해야 하는지 헷갈려하는 누리에게 다가와 인사를 하는 레이첼.

"오늘도 감사합니다."

"됐어. 어쨋든 약속은 약속이니까. 그럼 난 간다."

"안녕히 들어가십시오."

슬슬 손님이 올시간이기에 레이첼의 인사를 손을 흔들며 받고 손님받을 채비를 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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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가.

한국 재계 서열 2위의 기업집단이자, 한국 이능사회를 떠받드는 한국 삼주 중 두 번째 기둥.

한국 삼주가 각각 기업체를 이끌고 있다곤 하지만 그 근본은 이능집단이기에

가문 구성원의 무력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가문을 이끄는 가주의 무력은 가문의 무력으로 대변되어 한국 삼주의 가주들이 곧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강자를 뜻했다.

이런 한국 삼주에게는 각각의 가문을 상징한다고 할만한 이능적 특징들이 하나씩 있었는 데.

환연가는 권각술,

천유가가 검술로 유명하다면,

일성가는 한국에서 보기 드문 마법사 가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과거에는 서양의 마법과는 체계가 다른 술법이라는 이능을 추구했지만,

몇대 전부터 서양의 마법을 받아들여 마법과 술법의 장점만 취해 힘을 쌓는 데 성공하였고,

그 힘으로 이룩한 것이 지금의 일성가였다.

이런 일성가의 가주인 성수언은 가주답게 마스터급의 마법사인 대마법사의 경지를 이룩한 인물이다.

그에게 마법이란 수족이나 마찬가지.

숨쉬듯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그에게 타인의 감시 따위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흐음."

원한다면 지금 당장 파불라 엑시티움의 수장을 남몰래 만날 수 있다고 자신하는 성수언.

문제는 만남을 가진 당사자가 소문을 퍼트리는 것이겠지.

"됐다."

그 해결책이 바로 지금 성수언의 눈앞에 있는 물건.

의자위에 놓여 있는 물건은 언뜻 보기엔 좀 특이한 문양이 새겨진 목각인형처럼 보였다.

하지만 목각인형이 만들어지는데 사용된 재료들을 보면 범상치 않음을 누구나 알 수 있으니.

벼락맞은 천 년 된 대추나무에 싹을 틔운 첫 번째 가지.

줄어든 자연 에너지 덕에 이젠 보기 힘들어진 재해급 마수의 심장.

화룡정점으로 더 이상 채굴이 안 된다는 진은, 미스릴까지.

"후후후. 이제 써볼까."

아무리 일성가의 가주라 해도 모으기 힘든 재료들을 뭣 빠지게 모아 가문 최고의 장인과 대마법사인 성수언 본인이 직접 제작에 참여하여 만든 역작.

우우웅.

성수언의 마력을 받아든 목각인형의 표면에 새겨진 마법진이 빛을 발하더니 이내 그 크기를 키워가기 시작했다.

스스슥.

크기가 사람만 한 크기까지 커졌을 때 성장이 멈추고 빛이 사라지는 목각인형.

아니. 그것은 이제 목각인형이 아닌 진짜 사람이 되었다.

"오오오! 성공이군!"

그것도 성수언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좋아. 그럼... 일단 내 주위를 걸어보도록."

스윽.

저벅저벅.

성수언의 명령을 그대로 행하는 인형.

"흠. 기동은 문제없는 것 같고, 그럼 {Fire}를 사용행라."

중얼중얼.

"......{Fire(파이어).}"

화륵.

인형의 앞 허공에서 타오르는 불꽃.

"좋아! 완벽해!"

그 모습을 본 성수언은 남이 보면 주책없다고 표할 정도로 활짝 웃으며 기쁨을 표출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것을 만들기 위해 투자한 돈과 시간이 얼마이던가.

"3년이나 걸려서 겨우 완성했군. 마리오네트."

언뜻 보기엔 전투인형인 골렘과 비슷해 보이지만 단순한 명령만 시행할 수 있는 골렘과는 차원이 다른 물건이다.

자율사고형 아티팩트 마리오네트.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가능한, 소위말해 고도의 마법적 인공지능을 탑재한 아티팩트.

중위 마법까지 사용 가능해 그 자체로 중위마법사나 다름 없엇고 심지어 사용자가 원하면 사용자의 모습과 마력패턴을 흉내내며 사용자의 대역이 될 수도 있다.

"좋아. 알리바이는 해결됐군."

어쩌다보니 딱 완성되는 시점에서 일이 생겨 전투보다 알리바이용으로 먼저 사용하게 생겼지만 나쁘지 않다.

이번 기회에 마리오네트가 어디까지 연기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렇게 마리오네트에게 행동패턴을 주입하기 몇 시간.

"좋아. 그러면 돌아올 때까지 부탁한다."

"네. 주인님."

제법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게 된 마리오네트를 뒤로하고 집을 나서는 성수언.

"침묵하는 세계의 투명커튼을 펼쳐라.{Silent(사일런트).}{Invisible(인비지블).}"

고속영창에 더해 이중영창.

대마법사다운 일을 아무렇지 않게 행한 그는 재빠르게 목표지점으로 향했다.

"지치지 않는 체력과 재빠른 신체의 축복을. {Strength(스트렝스).}{Haste(헤이스트).}"

"창공을 가르는 보이지 않는 날개. {Fly(플라이).}"

다시 한번 더블 캐스팅과 공중부양 마법까지 사용해 한층 더 빠른 속력으로 이동하던 수언은 혀를 차며 불만을 내비쳤다.

"쯧. 공간이동 마법만 복구할 수 있었으면 이런 귀찮은 짓 안 해도 되는데 말이지."

먼 과거에는 개인이 공간이동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지금은 그 방법이 소실되어 마법진의 도움 없이는 공간이동이 불가능하다.

당연히 수많은 마법사들이 개인 공간이동 마법을 복구하려고 노력 중이지만 현재까지도 성과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없는 것을 바란다고 지금 당장 생기는 것도 아니고.

성수언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조금 더 속력을 높여 목적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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