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8 메인스토리
조금의 시간이 지나 목표로 했던 파불라 엑시티움의 본부에 도착한 수언.
"입구는....열려있군."
하긴 한낮인데 잠겨 있을리는 없나.
그런데
"보안 장치도 없고, 경비도 따로 없는 것 같고."
뭔가 허술한데?
성수언은 수장이 있을 법한 곳을 찾으러 돌아다니며 생각했다.
아무리 작다 하더라도 엄연히 이능집단.
가장 활발히 활동할 한낮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대마법사인 자신의 감각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의미는 상대의 경지가 자신의 경지를 뛰어넘거나,
"단체로 어디 나갔나?"
이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흐음. 어쩔 수 없지. 오늘은 위치만 확인하고 갈까."
처음 사용한 마리오네트에게 너무 오래 대역을 맡길 수도 없는 노릇.
"여기가 수장실인가 보군."
아주 대놓고 문에 사장실이라 적혀있으니 여기가 맞겠지.
그렇게 위치를 알아내고 돌아서려는 순간.
철컥.
끼이익.
기름칠이 되어 있지 않은 철문이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렸다.
"그냥 가시지 말고 들어오시지요."
스스로 열린문.
그리고 문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
그 목소리에 당장 자리를 빠져나가려던 수언은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에서 치열하게 고민하며 저울질 하던 그는 결국.
저벅저벅.
상대의 초대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지금은 돌아가는 것 보다 상대를 만나 정보를 얻는 것이 이득이라는 판단.
물론 생각의 저변에 깔려있는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큰 비중을 차지했기에 간으한 일이다.
"안녕하십니까."
방에 들어가자 보인 것은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양측으로 놓여 있는 널다란 손님용 소파 두개.
그리고 한쪽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
아마 예상컨데 파불라 엑시티움의 수장인 김누리이겠지.
그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한 가지더.
테이블위의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 두 개.
"....내가 올 걸 알고 있었나?"
마치 자신이 올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마냥 준비되어있는 찻잔에 성수언은 얼굴을 굳혔다.
"말씀 드릴 테니 일단 앉으시죠."
털썩.
누리의 말에 별 대꾸 없이 그의 맞은 편에 앉은 성수언.
그는 망설임 없이 찻잔을 들어 차를 한모금 맛보았다.
후륵.
"흠. 괜찮군."
"제가 차를 잘 몰라서 부하에게 준비시켰는데 괜찮으시다니 다행이군요."
후륵.
후르륵.
누리의 말을 끝으로 대화가 끊기고 잠시간 차 마시는 소리만 들려왔다.
탁.
이내 빈 찻잔을 내려둔 성수언은 입을 열었다.
"자네는 누군가?"
"또 이말."
"응?"
"아. 아닙니다."
정체를 묻는 질문을 도대체 몇 번째 듣는 건지.
반사적으로 내뱉은 말을 수습하고는 다시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흠흠. 처음 뵙겠습니다. 파불라 엑시티움을 이끌고 있는 김누리라고 합니다."
"그걸 물어본 게 아니네만 자기소개를 들었으니 일단 나도 내 소개를 해야겠지 일성가를 이끌고 있는 성수언이라 하네."
"흑탑의 금제 때문에 찾아오셨습니까."
"....진정 알고 있었나보군."
누리의 말에 성수언의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상대방은 자신이 찾아온 이유와 시간, 그리고 목적까지 알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한국 삼주간의 회의는 가주들 말고는 가족조차도, 후계인 소가주 조차도 모르는 일.
오로지 가주자리에 올라서야만 알 수 있다.
그런 삼주의 회의에서 나온 내용을 알고 있다?
그래. 한발 양보해서 스스로의 가치 판단을 잘하여 누군가 찾아올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까지는 어찌어찌 가능하다 하더라도 찾아오는 날짜와 시간을 어떻게 알아낸단 말인가.
심지어 언제 찾아갈지는 다른 가주들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출발 후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자신이 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에 대비하여 건물 차제를 비워뒀다.
이러한 사실들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
자신의 행동이 처음부터 끝까지 노출되었다.
어쩌면 자신뿐만이 아닌 삼가주 전부가.
'환현가주님의 말대로 회의장소를 옮겨야 될지도 모르겠군.'
환현가주 현창식의 의문의 1승 이후 성수언은 입을 열 수 있었다.
"하. 정말 무서운 친구로군."
"...네?"
"모른 척 하지 말게."
정말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누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수언이 오는 것을 알고 있는 이유는 누리의 초월적인 감각 덕분이었고,
직원들이 없는 것은 그저 이곳은 공개적인 용도로 쓰기 위한 임시본부일 뿐, 어둑시니의 기지를 진짜 본부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을 관리하는 일반인 직원이 한명 있긴 하지만 아까 전 차를 부탁하고 퇴근시켰을 뿐.
하지만 이를 알 리 없는 성수언은 혼자 말을 이어갔다.
"다 알고 있는 것 같으니 돌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흑탑의 금제 풀 수 있나?"
말할 틈도 주지 않고 혼자 쭉쭉 진행하는 성수언의 모습에 누리는 당황했지만 어쨋든 자신도 원하던 이야기였으니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네. 풀 수 있습니다."
"....자네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는 알고 하는 것인가?"
누리의 당당한 대답에 한참이나 침묵하던 일성가주 성수언이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당당히 대답하는 누리.
"네. 알고 있습니다."
어찌 모르겠는가.
만약 이 사실이 퍼지면 흑탑이 어떻게든 자신을 죽이려 하겠지.
"하지만 퍼지지 않으면 그만이지 않습니까?"
"...정보통제가 그렇게 쉬웠다면 내가 이 고생을 하진 않았겠지."
수언이 마리오네트까지 써가며 이곳에 온 이유가 무엇인가.
혹시라도 증거가 남아 자신이 이곳에 방문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알리바이를 들이밀어 부정하려고 함이 아닌가.
정보통제만 아니라면 그냥 적당히 통신마도구, 아니 그냥 핸드폰으로 전화하면 될 것을.
"혹시 일성가주님께서 퍼트리실 겁니까?"
"내가 왜 그 사실을 퍼트리겠나?"
성수언의 말대로 일성가주인 그가 무분별한 테러가 일어날 만한 일을 할 리 없었다.
"그렇다면 다른 천유가주님과 환현가주님께서 퍼트리실 분들입니까?"
"천유가주님은 절대 그럴 일 없고 환현가주님이 기분파이긴 하지만 생각이 없으신 건 아니지."
"그럼 뭐가 문제입니까?"
"자네는 그렇다 쳐도 자네가 거둔 흑마술사들. 믿을 수 있겠나."
확실히 흑탑의 금제를 풀 수 있다면 소모품처럼 쓰이는 흑마술사들에게는 지옥 속의 구원이나 마찬가지 였다.
하지만.
"사람이란 게 화장실 들어갈 적 마음 다르고 올 적 마음 다르지."
여측이심(如廁二心).
금제를 풀어줬다는 사실에 지금 당장은 충성할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어찌 될지 모른다.
사람은 그 어떤 동물보다 간사한 동물이니까.
"일성가주님께서 상상하시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감이 넘치는군. 혹시 내가 그 자신감의 이유를 알 수 있겠나."
자. 드디어 본론이다.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갑자기 낮아진 목소리와 진지해진 누리의 얼굴.
"뭐?"
순간 급변한 분위기에 성수언은 당황한 채 되묻고 말았다.
"진실을 들으면 감당하실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
도대체 눈앞의 청년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방금 전까지 띄고 있던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진 채 갑자기 분위기가 무거워지며 정체불명의 기세를 뿌리고 있었다.
"진실이라...."
하지만 일성가의 가주정도 되는 사람이 겨우 이 정도로 기세가 밀릴 수는 없는 노릇.
마력을 개방하여 그의 기세에 맞선다.
후우웅.
성수언이 마력을 개방하자 밀폐된 방 안에서 바람이 불어오며 하늘색의 마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공간을 장악하며 뻗어 나가는 하늘색 마력에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진다.
"어때 이 정도면 감당할만하지 않은가?"
실로 대마법사다운 기세였지만
"역시 일성가주님. 대단하시군요."
누리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는다.
"....숨기고 있는 한 수는 있나 보군."
처음부터 이상하긴 했다.
분명 눈앞의 청년은 이능집단의 수장.
하지만 수언은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 이 건물 안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일반인조차 피해 갈 수 없는 대마법사의 감각을 눈앞의 청년이 피해 간 것이다.
'아티팩트는 아니야.'
자신의 경지를 숨겨주는 아티팩트도 존재하긴 하지만 그것도 낮은 경지에게나 통하기 마련.
대마법사 쯤 되면 아티팩트의 유무 정도는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씨익.
아무말 없이 미소 짓는 그의 표정에 결국 백기를 든 성수언.
도심 한가운데에서 제대로 힘을 쓸 수도 없으니 아쉬운 건 이쪽이다.
"내가 졌네. 무엇을 원하나."
"제가 뭐 큰 걸 바라는 건 아닙니다. "
누구나 가지고 있고, 누구나 줄 수 있는 것.
그렇기에 주고받기 어려운 것.
"믿음."
"믿음?"
"일성가주님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이라. 참 어려운 걸 요구 하는구만."
일성가주인 자신이 이자리에 오기까지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믿을 주고, 또 얼마나 많은 배신을 당해 왔던가.
지난 자신의 세월이 처절하고 실감 나게 알려주고 있었다. 믿음만큼 중요하지만 부질없는 것도 없다고.
"아는지 모르겠지만 믿음이란 게 단순히 내가 준다고 성립할 수 있는 게 아니네."
일방적인 믿음은 언젠가 파국으로 치닫기 마련.
믿음이란 서로 주고받아야 성립될 수 있다.
말뿐만이 아닌 진실로 믿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절대 쉬운일이 아니다.
"자네는 나에게 믿음을 줄 수 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