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9 메인스토리
"자네는 나에게 믿음을 줄 수 있겠나?"
달칵.
성수언의 질문에 손에 쥐고 있던 찾잔을 내려놓는 누리.
"그럼 먼저 보여 드리죠."
쿵.
그가 발을 한번 구름과 동시에
스스슥.
누리의 몸에서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어둠.
"...!!!"
우우웅.
그에 놀란 성수언은 얼굴을 굳힌 채 하늘색 마력을 전력으로 뿜어내며 자신의 몸을 보호했지만, 어둠은 성수언을 공격하지 않고 주변을 물들 뿐이었다.
스르륵.
순식간에 주변을 어둠으로 물들여 하나의 단절된 세계를 구축한다.
세계구축. {Abyss(어비스).}
"이건...."
역시 대마법사라는 걸까.
어느새 굳은 표정을 풀고 믿을 수 없는 것을 목격했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벌리는 수언.
"....심상세계?"
성수언 또한 대마법사로 경지가 오르면서 심상세계를 구축했기에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이 하나의 심상세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소우주. 심상에만 존재하는 세계이기에 심상세계이거늘 도대체 이건 무엇이란 말인가.
"세계를 구현? 아니. 이건 구현 보단 구축이....구축은 불가능.....하지만 에너지 총량 이론은...."
마법사는 마법사라는 걸까.
몸을 쓰는 오러사용자와 달리 자신의 의지로 마력을 재구축해야하는 마법사는 평생을 공부와 연구에 할애 해야 한다.
그렇기에 궁금한 것이 생기면 일단 분석하고 보는 것이 마법사의 습성.
눈앞에서 혼자 중얼거리고 있는 성수언의 모습을 보면 습성은 대마법사가 된다 해도 딱히 달라지지는 않나 보다.
후륵.
"음. 좋군."
그렇게 차를 마시며 기다리길 몇 분이나 지났을까.
"그럼 역시.....아. 미안하군."
"괜찮습니다. 마법사시니까요."
"이해해줘서 고맙네."
"궁금한 게 있으시면 들어 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듣자 얼굴이 환해지면 곧바로 질문을 시작하는 성수언.
"그럼....."
질문을 쏟아낼 것 같은 기세를 입을 열었다가 어째서인지 말을 하다말고 멈추었다.
"일성가주님?"
이에 의아함을 느낀 누리가 불렀음에도 무언가 또 생각에 빠진 듯 고심하는 표정의 성수언은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진지한 표정으로 누리에게 물었다.
"자네는.....신인가?"
"....네?"
너무 뜬금없는 질문에 누리는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신....이라면 제가 알고 있는 신....말씀이신가요?"
"그러면 신이 의미하는 게 또 있던가?"
"...우선 대답에 앞서 왜 그런 질문을 하셨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흐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을 정리하고 설명을 시작하는 성수언.
"자네는 심상세계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나."
심상세계.
의지 또한 근육과 마찬가지로 사용하면 할수록 그 크기가 확장되고,
일정수준 이상으로 의지가 확장되면 자신의 소우주에 가상의 세계를 새길 수 있게 되는데 그것을 바로 심상세계라 한다.
"생각보다 자세히 알고 있군. 낮은 경지의 이능력자들은 그 순서도 모르는 사람이 많은데 말이지."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서 심상세계가 생기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소우주에 세계를 구축해야 심상세계의 주인 즉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다.
"그럼 그 다음의 경지에 대해서는 알고 있나?"
"다음...경지 말입니까."
"그래. 심상세계, 그 너머를."
꿀꺽. 탁.
"사실 모르는 게 당연하네. 아니 이 세상 그 누구도 모르지."
성수언은 목이 타는지 찻잔에 남은 차를 한 번에 들이키고 다시 말을 이었다.
"인간인 이상 절대 알 수 없으니까."
흔히들 마스터의 경지가 인간을 초월했다고들 하지만 대마법사의 경지에 도달하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수언은 깨달았다.
"심상세계가 인간의 한계라고 말이야."
재능의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말그대로 한계.
"심상세계를 확장시킬 수는 있지만, 그 이상으로 가는 것은 불가능해."
세계에는 마스터의 경지를 뛰어넘었다 칭해지는 인물이 몇몇 있었지만, 그들의 대부분을 직접 만나본 성수언은 단언 할 수 있다.
그들은 그저 심상세계가 조금 클 뿐 결국은 같은 마스터라고.
격의 상승은 이뤄내지 못했다고.
그렇다면 심상세계의 다음이 대체 무엇이길레 단 한 명의 마스터도 오르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그것을 현상세계 그 자체라고 생각하네."
가상의 세계를 담았으니 그것을 진짜로 만들어야지 않겠는가.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지."
세계에 속한 인간이 다시 세계를 담다니.
이런 모순이 또 없다.
"사실 이것들은 전부 내 이론이네."
결국은 경험해보지 못한, 성수언만의 주관적인 의견이었다.
방금 전까지는.
"자네가 보여줬지. 일부이긴 하지만 자신의 소우주에 세계를 담아낸 것을."
가상의 세계가 아닌 진짜 현상세계를 담고 있기에 현실에 그저 힘만 끌어오는 것이 아닌 직접 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것이다.
"방금 전 말했듯이 인간에겐 불가능한 일을 자네가 해냈어."
세계에 속한 인간이 세계를 담기에는
신체가, 정신이, 그리고 의지가
너무 나약하다.
그래서 성수언은 지금까지 이렇게 생각해왔다.
"만약 세계를 담을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신'이 아닐까 라고."
길고 긴 설명을 끝마치고 성수언은 다시금 누리에게 물었다.
"자. 다시 묻겠네. 자네는 '신'인가?"
신
초자연적이며 절대적이고 신령스럽고 신성한 '무언가'
종교의 신앙으로서 다수의 사람에게 추앙받고 경외 받는 '무언가'.
이 '무언가'는
사람일 수도 있고,
동물일 수도 있으며,
자연현상일 수도 있고,
그저 존재하지 않는 추상적인 개념일 수도 있다.
그 기원은 정확히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되었으며 아직도 활발히 연구되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신... 이라'
예언에 나오기도 하고 흑마술사들에겐 신과 같으니 신이 맞나?
'라고 하기엔 딱히 절대적이지도, 신령스럽지도, 신성하지도 않으니.'
확실히 일반적인 마법사에 비해 할 수 있는 것이 많긴 하지만 또 못하는 건 절대 못 한다.
예를 들어 마법사는 신성력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회복마법을 쓸 수 있지만 나는 회복마법을 못 쓴다.
이건 설정이 아니라 직접 확인해 보았다.
흑마력이 워낙 자유로운 힘이기에 안정적인 통제가 필요한 회복마법은 불가능한 흑마술사.
혹시 나는? 하는 마음에 시도해 보았지만 혹시는 역시였다.
아무리 흑마력이 나에게 충성한다 해도 본질적인 성격이 자체가 다르니까.
즉
"저는 신이 아닙니다."
"그럼 인간이란 말인가?
"...일성가주님. 혹시 흑마술사의 예언에 대해 들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예언? 그거야 꽤 유명한 이야기니 당연ㅎ.....설마."
'모든 어둠은 왕에게 무릎 꿇을지니.'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예언의 일부.
스으윽.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여전히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어둠의 세계.
"허. 그렇군. 그런 거였어. 예언 속의 존재라....흥미롭군."
이 세상엔 수많은 신화와 전설이 있지만 개중 남아있는 것은 몇 개 없었다.
시간의 흐름에, 혹은 인위적인 말소에 많은 것들이 소실되었다.
그중에서 몇 개는 성수언 본인이 직접 보거나 사용해본 적 있지만 전부 이능의 범위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들.
하지만 흑마술사의 예언은 다르다.
딱히 문서화 돼 있지 않은데도 잊혀지지 않고, 그것도 흑마술사들 사이에서만 내려오는 예언이라니.
마법사로서 어떻게 그냥 넘어가겠는가.
당연히 이것저것 알아보았지만 예언 외엔 단서랄게 아무것도 없어서 결국 포기했었는데....
왜 자네가 신이 아니란 거지?"
전지전능해야만 신이 아니다.
인간을 초월하고 신앙으로서 다수의 사람에게 추앙받으면 그것 또한 충분히 신이라 부를만하다.
"왜냐하면 제가 그러고 싶기 때문입니다."
인간이고 싶다.
인간으로서 살아가고, 인간으로서 행복을 느끼며, 인간으로서 죽고 싶다.
아무리 불멸의 몸을 얻고 인간을 초월하는 힘을 얻었음에도 나는
인간이고 싶다.
"그래서 저는 신이 아닙니다. 저는 인간입니다."
"...하하. 으하하하하!!"
누리의 말을 듣고 그를 빤히 바라보던 성수언은 갑자기 폭소를 터트렸다.
"이거 아주 걸작이군! 초월을 원하는 인간과 인간이고 싶은 초월자라니! 하하하!"
자신이 원하던 경지를 지니고 있는 존재가 고작 인간이기를 원하다니.
저만한 힘이라면 웬만한건 다 얻을 수 있을 텐데 고작 인가이라니.
성수언은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좋아."
한참을 웃던 그는 웃음을 멈추고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로 말했다.
"자네를 돕겠네."
"네?"
아직 무엇을 할지도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혼자서 결정을 내려버린 성수언.
"자네가 가는 길 끝에 무엇을 이루는지 보고 싶어졌어."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 따위 상관없다.
그저 눈앞의 모순적인 존재가 가는 길 끝에서 무엇을 이룰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떠한 변화를 겪게 될지 두 눈으로 보지 않는 이상 직성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서라도 반드시 보고싶다.
"진심이시군요."
처음엔 무슨 소리인가 싶었지만 타오르듯이 빛나고 있는 그의 눈을 보고 그가 진심이란 것을 깨달은 누리.
"좋습니다."
여기서 거절하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다.
"단."
그래도 안전장치는 걸어둬야겠지.
"마나의 맹세를 해주셔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