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속 중간보스에 빙의했다-35화 (36/60)

EP.35 삼주

삶이란 선택의 연속이라는 말이 있다.

단순히 식사의 메뉴를 정하는 선택부터 휴일에 무엇을 해야 될지, 퇴근은 언제해야 될지, 회사를 때려치우고 이직할지 등등.

사소한 선택부터 자신의 미래를 바꿀만한 중대한 선택까지 수많은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중대한 선택이라고 무조건 미래를 바꾼다는 법이 없고, 사소한 선택이라고 해도 자신의 미래를 바꾸지 않는다는 법은 없다.

퇴근길에 뜬금없이 산 복권이 1등에 당첨될 수도 있고

길이 막혀 돌아간 골목길에서 교통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

사활을 건 투자에서 이익도 손해도 없이 본전만 건질 수도 있다.

이러한 크고 작은 선택들에 있어 딱 두 가지 확실한 공통점이 있다면,

결과를 알 수 없다는 점과

선택한 순간 결과는 어떤 방식으로든 선택한 본인에게 다가온다는 점.

자신이 예상했던 결과가 다가올 수도 있고 예상치 못한 변수에 예상치 못한 결과가 다가올 수도 있다.

"그러니까."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하지 않나.

"죽은자들의 왕이 나타났다고요?"

내 선택이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어떤 변수가 영향을 미치면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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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조금 돌려 이른 아침.

누리는 오늘도 삼주의 회의가 이뤄지는 오두막에 방문한 상태였다.

오늘은 드디어 삼주의 첫 번째 가문 천유가의 유시윤가주를 만나는 날.

"후우."

살짝 긴장되는 마음에 얕은 숨을 내뱉고는 천유가주가 오길 기다린다.

성수언의 말에 의하면 유신윤가주는 험한 세월을 버텨낸 사람이라 성정이 거칠고 입이 험하지만 자신의 사람은 그 누구보다 아끼는 외강내유의 전형.

'천유가주님을 설득하려면 진심으로 맞부딪히는 수밖에 없네.'

괜히 돌려 말하거나 거짓을 꾸며내면 그녀의 미움만 살 뿐,

그녀의 믿음을 얻으려면 진심을 내보여야 한다.

그래서 오늘은 성수언과 현창식을 동행하지 않은 채 혼자서 이곳을 방문한 누리.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덜컥.

문이 열리고 노년의 여성 한 명이 오두막에 들어왔다.

첫인상을 말하자면 한 미모 했던 여성이 곱게 늙으면 저런 느낌이려나?

도저히 성수언의 입이 험하다는 말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단아한 차림과 외모의 여성이었다.

"처음 ㅂ...."

"뭐야 씨발."

"....."

멍.

말을 끊고 날아온 쌍욕에 누리는 순간 당황하여 벙쪄버리고 말았다.

"성수언이하고 현창식이는 어디 가고 웬 핏덩이야? 아. 네가 그 소개 해주겠다는 동맹인가 뭔가냐?"

"....김누리라고 합니다."

드르륵.

털썩.

누리의 자기소개에 유시윤은 아무 말 없이 테이블에 다가와 의자에 앉았다.

"응? 뭐야 의자가 바뀌었네? 저번에 현창식이가 부순 건 테이블이었는데."

저번 현창식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부서진 집기를 현창식이 다시 채워놨는데 그것을 곧바로 알아본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녀의 일방적인 추리.

"그러고보니 성수언이가 파불라 뭐시기인가 찾아간다고 했었지."

"지금까지 아무 말 없는 걸 보면 일이 잘못됐거나 일이 너무 잘됐거나 둘 중 하나."

"불러 놓고 여기 없는 걸 보면 일이 너무 잘 됐나 보네."

"그 미친놈은 자기 궁금증이 생기면 물불 안 가리니 궁금한 게 생겼으면 쉽게 넘어갔을 테고."

"현창식이 그 까칠한 놈은 그냥 안 넘어갔을 테니 여기서 현창식이 하고 싸운 건가?"

"그런데 현창식이 그놈이 아무리 쓰레기라도 함부로 힘을 쓸 정도로 멍청하진 않으니 뭔가 화가 날 만한 짓을 했다는 건데."

".....실종된 그놈 막내아들 현강식. 그래. 청량산 날려 먹은 게 너구나?"

꿀꺽.

틈도 주지 않고 몰아치는 그녀의 말에 누리는 등에 소름이 돋았다.

오두막의 테이블과 의자가 바뀌었다는 사실만으로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몇 가지 단서와 정황으로 거의 완벽하게 모든 상황을 알아맞추는 통찰력.

진정 사람이 가질 수 있는 통찰이 맞단 말인가.

그녀의 투명한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머릿속이 전부 꿰뚫리는 느낌이라 저절로 눈을 피하게 된다.

"...정말 대단하시군요."

그래도 가만히 쫄아서 있을 수는 없이 일단 무슨 말이든 해보자.

"실없는 칭찬은 됐고. 파불라 뭐시깽이. 거기 수장 맞아?"

"네. 파불라 엑시티움을 이끌고 있는 김누리입니다."

"파불라.... 라틴어네? 하여간 뭣도 모르는 놈들이 겉멋만 들어서는 라틴어 쓴단 말이야."

"....."

하지만 마음을 푹푹 쑤셔대는 그녀의 말에 저절로 입이 다물어지는 누리.

"파불라 엑시티움....파괴의 이야기? 이야기 파괴? 니미 라틴어는 아무리 봐도 모르겠네."

한동안 투덜거리던 그녀는 그제서야 본론으로 들어간다.

"일성, 환현 둘을 설득했으니 이제 내 차례인가?"

"...다 눈치채신 것 같으니 가감 없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를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이유는?"

마수의 폭증을 증거로 들어 예언, 멸망, 그리고 자신이 죽은자들의 왕이란 것까지 빼놓지 않고 전부 설명하고.

중간에 마스터의 힘을 뛰어넘는 본신의 힘도 적당히 내비치며 말에 설득력을 더한다.

"....해서 저는 멸망에 저항하려 합니다. 인간답게."

"흐으음."

누리가 설명을 끝마치고 유시윤은 잠시간 팔짱을 낀 채 고민했다.

"확실히 성수언 그놈이 넘어갈만 하네. 현창식 그놈도 당할만한 힘이기도 하고."

지식욕에 빠져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일성가주라면 당연히 넘어갔을 테고 그 오만한 환현가주가 충분히 굴복할 만한 힘이다.

"심지어 명분도 좋아."

세상의 멸망을 막기 위해서라니.

이 얼마나 고귀한 명분인가.

하지만

"내가 왜?"

"....네?"

"그러니까 내가 왜 널 도와줘야 되냐고."

결국 멸망의 예언도 가설에 불과하다.

역사적으로 보면 마수의 폭증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성수언은 네 힘에 매료되었을 테고 현창식이라면 힘과 협박에 굴복했겠지만 나는 다르거든."

성수언은 그렇다 치고 아마 현창식은 힘으로 굴복시키고 막내아들로 협박했겠지.

"확실히 내가 내 사람을 많이 아끼긴 하지만 가문을 통째로 넘길 정도는 아니야."

유시윤은 어떤 때 무엇을 우선해야 하는지 지난 세월 동안 뼈가 시릴 정도로 경험했다.

때로는 희생도 필요한 법.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확실히 네 힘은 대단하긴 하지만 네가 죽은자들의 왕이라고?"

"네. 그렇습니다."

"그것참 이상하네."

"무엇이 이상하다는 말씀이신지?"

"아. 너는 나보다 여기 일찍 왔으니까 모르려나?"

누리는 유시윤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핸드폰 한번 확인해봐. 네가 죽은자들의 왕이 맞다면 보고했겠지."

유시윤의 말에 의문을 가지면서도 순순히 스마트폰을 꺼내 드는 누리.

중요한 이야기가 오갈 것이기에 당연히 무음모드로 해둔 스마트폰에는 유시윤의 말대로 부재중 전화 여럿과 문자가 찍혀있었다.

문자를 천천히 읽어내려가던 누리는 점차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는데.

"표정을 보니까 보고가 들어와 있나보군."

"그러니까....."

문자의 내용은.

"죽은자들의 왕이 나타났다고요?"

스스로 죽은자들의 왕이라 자칭하는 인물이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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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출처는 알 수 없지만, 어제부터 흑마술사들 사이에서 죽은자들의 왕이 강림했다고 소문이 도는 모양이야.'

유시윤에게는 이야기를 뒤로 미루자는 양해를 구하고 곧바로 돌아왔다.

그녀도 별말 없이 보내줬기에 곧바로 전 어둑시니의 본거지로 향해 사영과 실렌을 부르려 했지만 둘은 누리의 행동을 예상했는지 이미 도착해있는 상태였다.

"죽은자들의 왕이 나타났다고?"

"네. 정확히는 흑마력 사용자들 사이로 소문이 퍼지고 있답니다."

사영의 말을 옆에 있던 실렌이 이어받는다.

"소문이 퍼지는 속도와 장소를 봤을 때 인위적인 소문으로 판단됨."

여러장소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매우 빠르게 퍼지는 소문은 절대 자연적이라 볼 수 없었다.

"소문의 내용은?"

"'예언 속의 왕이 강림해 핍박받는 흑마술사들을 이끌고 세상을 평정한다'임."

즉 세계정복.

"하. 나타나자마자 세계정복이라. 정말 정형적인 악당포지션이군."

하지만 전형적이기에 흑마력사용자들을 쉽게 끌어들이겠지.

"반응은?"

"흑탑은 물론 흑탑에 속하지 않은 흑마력 사용자들도 꽤나 동요하고 있는 모양임."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차별에 대한 공포와 아픔이 머릿속에 심어져 있는 대부분의 흑마력 사용자들.

괜히 대부분의 흑마력 사용자가 흑탑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흑탑의 테러를 끌어들이기 위해 대놓고 흑마술사임을 들어냈을 때 누리는 은근한 차별과 무시를 경험했었다.

"그래서 어딘데?"

인위적인 소문이라면 소문을 퍼트리는 근원지 또한 있는 법.

"아직 정확한 정보는 나오지 않았지만 실렌님과 토론해본 결과 근원지는 흑탑이라고 생각됩니다."

"흑탑?"

"소문이 처음 퍼진 곳이 대부분 흑탑에 소속을 두지 않은 흑마력 사용자들 이었음."

"그 소문이 역으로 흑탑까지 퍼지더군요."

확실히 의심스러웠다.

"만약 그들이 흑마력 사용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이런 소문을 냈다면 조만간 추가적인 소문이나 발표가 있을 겁니다."

"그러면 그때 움직이면 되겠군."

사영과 실렌의 예상대로 며칠이 지나 대부분의 흑마력 사용자들이 소문을 알게 되었을 때쯤 한 가지 소문이 더 퍼져 나갔다.

'흑탑의 탑주가 죽은자들의 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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