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6 흑탑
"재밌네."
흑탑의 탑주가 죽은자들의 왕이라는 소문을 듣게 된 누리는 자신을 사칭한 것에 대한 분노보다는 궁금증이 먼저 들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뻔히 보이는 수작질을 하는 것일까?
아마 조금만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저 세력을 키우기 위한 수작이란 것은 눈치챘을 것이다.
하지만 흑탑정도 되는 집단이 뻔한 일을 대놓고 한다는 것은.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그 자신감이 실력인지 아니면 다른 요소인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소문을 진실로 만들만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아니면 저런 바보 같은 짓을 할 리 없으니까.
"아직 흑탑에서 직접적인 의견 표명은 없지만, 일주일 뒤 무언가를 발표하려는 듯합니다."
"그런 그때 보여주겠군. 자신감의 근원이 무엇인지."
여기서 취할 수 있을만한 행동은 두 가지.
무시하거나 직접 밝히거나.
무시한다면 죽은자들의 왕이라는 이름은 뺏기겠지만, 자신을 대신할 총알받이가 생긴다.
하지만 직접 밝힌다면 죽은자들의 왕이라는 이름은 지키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누리가 전면에 나서게 된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사영의 물음에 고민에 빠진다.
결국 '죽은자들의 왕'이라는 이름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의 문제.
죽은자들의 왕.
사실 이 이름 또한 스스로 지은 것도 아닌 예언을 접한 사람들 사이에서 어느새 자연스럽게 칭해지던 이름.
자신 또한 게임 속에서 봤던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을 뿐.
하지만 몇 년간 스스로 죽은자들의 왕이라 칭해서일까 아니면 이 또한 운명 또는 설정의 강제성일까.
죽은자들의 왕이라는 이름에 알 수 없는 익숙함과 집착이 느껴졌다.
"...좋아."
이내 누리가 내린 결정은.
"이름도 흑탑도 전부 가진다."
3년전 결심했던 것처럼
설정이든 아니든 가지고 싶은 것은 전부 가진다.
그것이 사람이든 이름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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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없는 말이 천 리 간다고 했던가.
처음에는 흑마력 사용자들 사이에서만 떠돌던 소문이 어느새 이능사회 전체에 떠돌기 시작했고.
당연히 웬만한 이능력자, 이능집단들은 소문의 근원지가 흑탑이란 것을 눈치챌 수 있었지만,
그들도 흑탑이 대놓고 이런 일을 꾸미는 자신감의 정체는 알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각각의 단체는 흑탑이 무언가를 발표한다는 소식을 듣자 흑탑의 자신감의 근원을 알아내기 위해 사람을 보냈고.
결국 흑탑이 발표를 한다는 장소에는 수많은 이능집단의 소속원들이 모이게 되었다.
"어우. 찐다쪄."
남미의 브라질 아마조나스주 마나우스 인근의 자우국립공원.
세계 유산이자 남미에서 가장 큰 열대 우림 보호구역.
"뭐. 이딴 곳에서 발표를 한다는 거야?"
흑탑에서 무언갈 발표하겠다는 장소가 바로 이곳 자우국립공원의 경계선이었다.
평소 흑탑이 숨어있는 곳이 아마존 어딘가라는 말은 있었지만, 설마 이곳일 줄이야.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소문을 이용한 허점을 노린 것일 수도 있지요."
유시윤의 투덜거림에 성수언이 옆에서 덧붙였다.
"중국에 미국에 일본, 러시아, 어쭈 북한놈들도 보이네."
"세계 이능력자 모임도 할 수 있겠습니다."
"모임은 개뿔. 전부 따까리들만 왔구만."
"뭐. 이해는 갑니다. 테러집단에서 공식으로 발표를 한다니 무시는 못하겠고 높으신 분들이 이런 오지에 올리도 없으니 기껏해야 총알받이겠죠."
유시윤은 성수언의 말을 듣기 싫다는 듯이 손을 내젓고는 물었다.
"아아. 됐고. 그래서 왜 여기 오라고 한 건데."
사실 그녀도 이곳에 직접 올 생각은 없었다.
남들처럼 적당히 부하를 보내놓고 보고나 받을 생각이었건만 얼마 전 만났던 김누리라는 놈이 재밌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이곳으로 불러낸 것이다.
"글쎄요."
"야. 그놈한테 붙어 먹어놓고 네가 모르면 어쩌자는 거야?"
"어허. 붙어먹다니요. 그저 순수한 지식욕을 채우기 위해서 협력하고 있는 겁니다."
"지랄. 그놈의 지식욕 때문에 간이고 쓸개고 다 줄 새끼가."
"흠흠."
유시윤의 독설에 할 말이 없어진 성수언은 연신 헛기침을 하며 딴청을 피웠다.
"그래서 언제 시작하는데?"
"아마 슬슬..."
쿠구구구.
성수언이 말을 늘어뜨리며 주변을 둘러보던 그때 땅이 조금씩 진동하기 시작하고.
휘이이잉.
스스스스.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나무들이 부딪히며 스산한 소음을 만들어 내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소름이 돋을만한 장면이었지만,
"쓸데없는 연출하고는."
둘에게는 뻔한 너무 뻔히 보이는 연출이었다.
"하하. 노력하는데 좀 봐주죠. 다른 사람들에게는 잘 통하고 있지 않습니까."
실제로 둘을 제외한 나머지, 흑마력 사용자와 각 집단의 사람들은 얼굴이 조금씩 굳어있었으니까.
스으으으.
이내 우림에서 검정색 안개가 새어 나오더니 그 안개 사이에서 검정색 로브를 두른 사람들 수십명이 나타났다.
"보아하니 장로들까지 다 모였나 봅니다."
"어지간히 화려하게 하고 싶나 보네."
"우선."
로브를 두른 사람들 중 대표로 보이는 한 명이 앞에 나서서 로브의 모자를 내리며 입을 열었다.
스륵.
"이렇게 모여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지."
로브가 내려가며 보인 얼굴은 중년으로 보이는, 수염이 인상적인 남성으로.
한가지 특이한점은 수염과 머리카락색이 전부 노인처럼 하얗게 세어있었다.
분명 얼굴은 많아 봤자 30대 후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온통 세치뿐이니 보면 볼수록 무언가 어색함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응? 탑주가 아니네?"
"그렇습니까?"
"어. 한 20년 전에 본적 있는데 탑주는 확실히 아니야."
그녀의 말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듯 남자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흑탑의 부탑주를 맏고 있는 알렉스라고 한다."
"호오. 부탑주라 나도 처음 보는군."
흑탑의 부탑주는 마스터급에 오르기 어렵다는 흑마력의 오러로 마스터급에 도달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
하지만 탑주와 마찬가지로 외부에 알려진 정보가 거의 없다시피 한 인물이기도 하다.
"오늘 한가지 알릴 것이 있기에..."
"세상에 혼돈을 몰아오는 악의 종자들이 무슨 할 말이 있다는 것이냐!!"
그때 알렉스의 말을 끊고 들려온 우렁찬 목소리.
그쪽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새하얀 정복을 입고 한쪽 허리에 검을 패용하고 있는 남자가 인상을 찌푸린 채 부탑주 알렉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복장을 보아하니 성기사인 모양이군."
"그래! 나 위대하신 주님의 검 알레시오의 이름으로 경고하겠다. 지금 당장 투항하지 않으면...."
"아아. 시끄러우니까 닥쳐주게."
서걱.
무언가 잘려나가는 소리와 함께.
툭.
알레시오라 소개한 남자의 목이 땅 바닥에 떨어지고.
푸쉬이익!
털썩.
새하얀 제복이 붉게 물들며 머리없는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푸쉭. 퓌쉭.
완전히 바닥에 쓰러지고도 간헐적으로 움찔대며 피를 뿜어내는 시체.
그것을 바라보는 모두가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는 관경이었다.
"호오. 제법이군요."
"꼴에 마스터라 이거지."
단둘만 빼고.
"이제 좀 조용해졌군."
자신의 말을 방해하는 인물을 순식간에 침묵시킨 알렉스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오늘은 역사적인 날이다."
"우리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한차원 높은 곳으로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냈다."
"우리의 주인께서 스스로 인간의 껍질을 벗고 종의 한계를 뛰어넘어 스스로 예언 속의 존재가 되셨으니."
"보아라! 우리의 주인을! 보아라! 우리의 신을! 보아라!"
"죽은자들의 왕을!"
사아악.
그와동시에 우림의 안쪽부터 어둠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하는 대지.
풀, 나무, 바위, 흙, 모든 대지가 순식간에 색을 잃고 어둠으로 물들었다.
마치 모든 것이 검정색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만 같은 무채색의 세계.
만약 하늘을 올려다 보지 못했다면 이곳이 같은 세계인지 의심마저 들었을 것이다.
"이건 대체...."
이곳에 모인 이들은 모두 이능력자.
심상세계를 구축한 마스터급의 경지는 둘을 빼고는 없다고 해도 무언가 심상치 않은 현상이란 것은 충분히 눈치챌 수 있었다.
그리고 마스터급의 둘은.
"...."
"...."
이와 비슷한 현상을 얼마 전에 경험했기에 얼굴을 굳히며 대비를 한다.
스르륵.
완전히 어둠으로 물들은 대지에서 사람의 형체가 그림자처럼 솟아올랐다.
척척척척.
그러자 동시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부탑주를 위시한 흑탑의 소속원들.
"신이시여!"
""신이시여!""
가만히 무릎 꿇은 이들을 내려보던 그림자는 아직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Gravity(그래비티).}"
쿵.쿵.쿵.쿵.
"커억."
"크윽."
"이 힘은!"
갑작스런 강력한 찍어누르는 힘에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게 된 사람들.
하지만 이 와중에도 마법사와 흑마술사는 마법의 강력함이 아닌 다른 요소 때문에 경악하고 있었는데.
"말도 안 돼."
"무영창?"
"무영창은 불가능한 게..."
마법진도 수인도 영창도 없는 완전한 무영창.
방금의 마법은 분명 지금까지 불가능하다는 것이 정론으로 여겨져왔던 무영창으로 발현되었다.
"보아라. 이것이 신의 힘일지니."
그림자는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주변을 둘러본다.
그림자의 정체는 모두가 예상했듯이 바로 흑탑주.
흑탑주는 자신이 마치 진짜 신이 된 것 같은 고양감을 느꼈다.
'그래. 난 인간을 초월했으니 신이나 다름없다.'
점점 느려지는 세력 확장. 타락하다 못해 흑탑을 노예처럼 부리려는 교회. 갑자기 튀어나온 동양의 흑마술사까지.
결국 위기감을 느낀 흑탑주는 탑에 봉인되어있던 한가지 유물을 꺼내들었다.
유물을 사용하기 위해 큰 희생이 필요했지만 지금 이 관경을 보면 희생 따위 별것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힘만 있다면 교회따위는.....'
"신의 이름으로 명령하니 지금 당장 돌아가 내가 이곳에 강림했다는 것을 각 집단에게 ㅇ...."
그렇게 고양감에 빠져 진짜 신이라도 되는 것 마냥 흉내내며 명령하던 찰나.
"지랄 똥 싸고 자빠졌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