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7 흑탑
"지랄 똥 싸고 자빠졌네."
뒤에서 들려온 걸쭉한 욕설.
휙.
자신의 말을 끊은 범인을 찾기 위해 흑탑주는 고개를 뒤로 돌렸고 그곳에는 남녀 두 명이 자신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시발. 괜히 쫄았네."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어설프더라도 한계를 뛰어넘은 건 맞으니까요."
쫀것은 성수언도 마찬가지였는지 유시윤의 옆에서 뒷머리를 긁적이며 변명을 한다.
"한계를 뛰어넘긴. 그냥 힘만 때려 박아서 크기만 키우고 격은 뛰어넘지도 못했구만."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모두는 어처구니없는 감정을 느꼈다.
어설프다고?
힘만 때려박아?
마스터의 경지는 무언가 다르다는 건가?
그리고 이런 감정은 흑탑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신의 힘을 보고 머리가 맛이 간 건가?"
"신의 힘은 개뿔. 딱 봐도 억지로 크기만 확장시켰구만. 영역도 제대로 펼치지도 못하고."
아마 자신도 며칠 전 그것을 보지 못했다면 흑탑주가 마스터의 경지를 뛰어넘었다고 착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절대 그 '심연'에는 못 미치지.'
유시윤은 며칠전 스스로를 예언속의 죽은자들의 왕이라 칭하던 남자가 보여주었던 것은 떠올렸다.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소름이 돋는 완전한 심연.
'아무렇지 않은 척하느라 고생했지.'
그때 보았던 심연과 흑탑주의 어설픈 영역을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
완전무결한 하나의 '세계'을 목격한 그녀로서는 흑탑주가 펼친 영역은 그의 세계를 어설프게 따라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솔직히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게 맞긴 맞지요."
어쨋든 어설프더라도 심상세계를 벗어난 경지에 발을 걸친 것이다.
기물이든 제물이든 외력을 빌렸더라도 충분히 대단한 일.
"물론 자연스러운 방법이 아니니 분명 반동은 오겠지만요."
정도가 아닌 사도를 선택했으니 분명 반동이 올 것이다.
흑탑주가 그것을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감히."
어처구니 없다는 얼굴로 듣고 있던 흑탑주의 얼굴에 점점 분노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뭐? 자연스럽지 않아?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고?
"감히 신의 힘을 의심해?"
이미 자신을 신이라 확신하기 시작한 흑탑주에게 그들의 대화는 매우 심각한 모욕으로 느껴졌고,
"천벌을 내려주마!"
쿠구구궁.
분노한 흑탑주의 의지에 거대한 흑마력이 뿜어져 나온다.
뿜어져 나온 흑마력은 자연의 흑마력과 공명하며 해체되고 재구성되어 하나의 마법을 만들어내니.
"{Raise Death Knights(레이즈 데스나이츠).}"
쿠구구궁.
흑탑주가 시동어를 내뱉자마자 땅이 흔들리기 시작하며 이내 땅의 군데군데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쩌저적. 쩌저저적.
그리고 그 갈라짐 사이에서 빠져나오는 존재들.
흑마력으로 이루어진 오러로 경지를 올리기 어려운 이유가 흑마력의 자유롭고 활동적인 특성때문에 오러로 정제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흑마력을 정제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면 언제 폭주가 일어날지도 모르기에 흑마력의 오러, 통칭 다크오러를 사용하는 이능력자가 매우 드문 것이지만.
역설적으로 이 활동적인 특성은 시체를 일으키는데 매우 효과적으로 작용했다.
쿵. 쿵. 쿵.
그런 언데드 중에서도 몇몇 특수한 개체는 흑마술을 사용하거나 다크오러를 사용할 수 있었는데.
스릉. 스릉.
개중 검을 사용하는 것이 마치 기사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
데스나이트.
흔히 네크로맨서라 불리는 흑마술사 계파중 사령술사들이 다루는 대표적인 고위 언데드.
그어어억!
쿠아악!
땅속에서 빠져나와 완전히 몸을 일으킨 데스나이트들이 포효를 내뱉었다.
"....많군요."
시체야 미리 묻어뒀다 쳐도 일반적인 마스터급 사령술사가 사역할 수 있는 데스나이트는 많아봤자 10기 정도.
하지만 지금 땅속에서 기어올라온 데스나이트의 숫자는 언뜻봐도 50기는 한참 넘어 보였다.
"힘을 때려 박았든 어쨌든 넘어선건 넘어선 거란 건가. 그래서 그 빌어먹을 새끼는 언제 오는 건데? 설마 여기까지 불러놓고 안 온다는 개소리는 하지 않겠지?"
"저도 잘...하하."
"하아아. 이딴 새끼가 같은 삼주라니."
유시윤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허리띠에 손을 가져다 대고는 그대로 뽑았다.
스릉.
하지만 뽑혀져 나온 것은 허리띠가 아닌 하나의 검. 그런데 일반적인 검과 달리 검신이 낭창낭창 휘청거렸다.
"오! 연화. 오랜만에 보는군요."
"씁. 시체따위한테 연화를 쓰긴 싫은데."
웅성웅성.
어느새 무릎을 피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구경꾼들.
"지들일 아니라고 안심하기는."
"흑탑주가 자기 힘을 알리려고 이렇게 모아뒀으니 죽을 일은 없다고 판단한 거겠죠."
"잡담은 그만."
태연하게 떠들고 있는 두 사람의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흑탑주가 말을 자른다.
"피할 수 없는 죽음에 절망해라. 어리석은 자들아."
우어어어!
쿠어어!
흑탑주가 말을 마친 순간 검은 오러를 줄기줄기 뿜어대며 돌진하는 수십기의 데스나이트.
"씨발. 너든 그 새끼든 돌아가면 내가 꼭 칼침 놓는다."
"하하하."
그렇게 둘과 수십의 격돌이 일어나려는 순간.
사아아악.
심연이 몰려왔다.
우뚝.
불어오던 바람도,
진동한 대지도,
맹렬하게 달려가던 죽음의 기사들도
몰려오는 어둠에 닿는 순간 정지하였다.
순식간에 하늘마저 덮어버린 어둠.
"뭐, 뭐냐!"
보는이로 하여금 공간감마저 잃어버리게 만드는 어둠은 한눈에 보기에도 흑탑주가 펼친 어둠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준비한 쇼는 잘 봤다}."
그때 어둠을 울리는 목소리 하나.
"{기획, 각본, 연출 전부 준비가 잘되었더군.}"
어느 한 방향에서 들려오는 것이 아니라 사방에서 동시에 들려오는 목소리는 듣는 것만으로도 중압감이 느껴졌다.
"{딱 하나 아쉬운 점을 꼽자면 주인공의 능력이 너무 부족해}."
"누구냐! 당장 모습을 드러내라!"
겁먹은 모습을 숨기기 위해 본능적으로 목소리를 높이는 흑탑주.
"{후후. 꼭 겁먹은 개새끼마냥 소리높여 짖는군}."
"네 이놈!!"
"{내 모습을 보고 싶다고 했나}."
목소리는 흑탑주가 소리치든 말든 무시하고 말을 잇는다.
"{내 모습이라면 지금도 보고 있지 않나}."
스슥.
어둠의 어느 한지점.
허공인지 아닌지 구별조차 안되는 그곳에서 무언가 나타났다.
아니. '떳다'라고 하는 게 맞으려나.
"...눈?"
그래. 어둠의 한가운데서 갑자기 갈라짐이 나타나더니 거대한 눈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스스스스스스슥.
눈.눈.눈.눈.눈.눈.눈.눈.눈.눈.눈.눈.눈.
수많은 눈동자들이 사방을 가득 채우며 눈을 '떳다'.
"{내가 곧 심연이니라}."
죽은자들의 왕. 마지막 페이즈. 세계 동화. 비욘드 더 어비스(Beyond The Abyss).
"{어때 이제 좀 잘 보이나}?"
압도적인 광경에 잠시 넋이 나가 있던 흑탑주는 마치 놀리는 듯한 어조에 분기탱천하였다.
"감히!!"
움찔움찔.
어떻게든 다시 데스나이트를 움직이려 했지만 움찔거리기만 할 뿐.
"이이익!!"
무언가 잘못되었는지 얼굴에 검정색 핏줄이 나올정도로 흑마력을 움직이려했지만 흑마력은 요지부동이었다.
"{흑마력은 그렇게 다루는 게 아니지}."
"{일어나라}."
쿠구구구구궁.
목소리가 명령하자 흑탑주가 마법을 사용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진동이 울려 퍼진다.
웅성웅성.
흑탑의 소속원들, 흑탑에 속하지 않은 흑마력 사용자, 정보를 얻기 위해 온 각 이능집단의 소속원들 까지.
하늘이 어둠을 덮인 이후로 그저 굳어있기만 했던 그들은 심상치 않은 현상에 당황해 했다.
"도대체 이건..."
"미친."
"설마...이 느낌은."
특히 그중 흑마력 사용자들은 기절할 것만 같은 아득함을 느끼고 있었다.
단순히 거대한 흑마력이 움직인다가 아닌 세계 전체가 움직이는 것만 같은 압도적인 감각.
이쯤되면 아무리 경지가 낮아도 흑마술사로서 눈치채지 못할 수가 없었다.
만약 세상에 예언속의 왕이 실존한다면 흑탑주가 아닌 지금 이 목소리의 존재가 진짜라고.
쩌저적.
설명은 길었지만 일이 일어난 것은 한순간.
진동이 끝난 직후 흑탑주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거대한 균열이 생기고 '그것'이 몸을 일으켰다.
쿵! 쿵! 쿵!
거대한 몸체.
발을 구를 때마다 흔들리는 대지.
어둠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기괴함은 독보적인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그 이유는.
"....시체?"
구어어어.
끄어어!
키에엑!
그 거대한 몸 전체가 시체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각각의 전부가 살아 움직이는 시체로.
흑탑에서 미리 묻어둔 것으로 보이는 인간의 시체들과 우림에서 서식하는 여러 종류의 동물 시체들.
거기에 흑탑주가 사역했던 수십 기의 데스나이트까지 거인의 일부가 되었다.
"....하하하."
그 모습을 본 흑탑주는 흑마력의 통제도 포기하고 허탈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처음부터, 하늘이 어둠으로 뒤덮일 때부터 자신은 알고 있었다.
그저 그럴 리 없다고 부정하며 현실에서 눈을 돌렸을 뿐.
하지만 이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존재가 진짜 죽은자들의 왕이라는 사실을.
슈우우웅.
바람소리에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느새 다가온 거인의 발이 내려꽂히고 있었다.
거인의 발은 그저 내려찍는 것만으로 풍압을 일으키며 흑탑주를 향해 다가왔다.
".....하."
콰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