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8 흑탑
콰직.
아무 저항도 하지 않고 거인의 발에 깔리는 흑탑주를 누리는 우묵한 눈으로 바라봤다.
아니. 눈이라고 하기는 좀 애매한가?
지금의 나에겐 어둠이 눈이요, 입이며, 코이고 귀이다.
팔과 다리이며 머리이고 몸이다.
내가 곧 심연이고 심연이 곧 나이다.
아무튼.
흑탑주가 나타나기 전 누리는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어 흑탑의 등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유시윤, 성수언과 같이 있을까도 했지만, 아직 유시윤과의 관계가 껄끄러웠기 때문에 그냥 숨어 있기로 했다.
'천유가주같은 타입은 어렵단 말이지.'
넘치는 연륜으로 속을 꿰뚫어보는 그 눈동자는 힘의 고저에 상관없이 누리를 주눅 들게 만들었다.
그렇게 잡생각을 이어갈 때쯤.
쿠구구궁.
휘이이잉.
스스스슥.
흑탑이 나타났다.
'연출 한번 화려하네.'
흑마력을 사용하는 흑탑의 수작질은 누리의 눈을 피해 갈 수 없었고 전부 계산된 연출이란 것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부탑주의 소개.
성기사의 도발. 그리고 끔살.
이내 흑탑주의 등장까지.
영역을 펼치며 흑탑주가 등장했을 땐 누리도 살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비스?.....는 아니구나.'
자신의 어비스와 같다기에는 뭔가 많이 어설펐다.
세계자체를 구축한다는 느낌보다는 물들인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렇기때문인지 삼차원의 공간이 아닌 이차원의 공간에만 머무는 흑탑주의 영역.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대단한일이란 거지.'
솔직히 자신도 성수언에게 정보를 듣기 전까지는 자신의 힘에 대한 정체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저 쓸 수 있기에 사용했을 뿐.
어쨋든 성수언의 말에 의하면 인간이 자신의 심상에 가상이 아닌 현상세계를 담는 것은 불가능한 일.
흑탑주 또한 자신의 심상에 현상세계를 담아낸 것은 아니다.
무언가 외력을 사용해 강제로 확장시킨 심상세계가 심상 바깥에 넘쳐 흐르게 된 것 뿐.
그리고 그 외력이란.
'머리에 붙어있는 저것.'
흑탑주의 뒷통수에 붙어서 흑마력을 줄기줄기 뿜어내는 무언가가 누리의 눈에는 확실히 보였다.
누리의 기준에서도 어마어마한 양의 흑마력을 내뿜고 있는 무언가.
'유물인가?'
평범한 아티팩트로는 불가능한 일. 아마 흑탑의 유물 같은데.
'잠깐. 흑탑의 유물?'
그건 분명 게임 중반부에서.....
쿠구구궁.
쩌저저적.
무언가 머리에서 스치고 지나간 생각에 고심하고 있던 찰나 흑탑주가 무언가 마법을 사용했는지 땅에 갈라짐이 생기고 그 사이에서 죽음의 기사들이 일어났다.
'슬슬 나서야겠네.'
확인할 것은 전부 확인했다.
이제 흑탑이 열심히 준비한 무대를 뺏어올 일만 남았을 뿐.
'이왕 데뷔하는 거 시작부터 화려하게.'
사아아악.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심연을 펼쳐낸다.
하늘마저 뒤덮어버리는 어둠에 남아있는 것은 인간과 묶여버린 데스나이트들 뿐.
평소라면 여기에서 끝냈겠지만 이미 흑탑주가 비슷한 걸 보여줬으니 한 가지 더.
자신도 한 번밖에 사용해본 적 없지만, 이 기회에 제대로 사용해 본다.
"{준비한 쇼는 잘 봤다}."
"{기획, 각본, 연출 전부 준비가 잘되었더군.}"
"{하나 아쉬운 점을 꼽자면 주인공의 능력이 너무 부족해}."
"누구냐! 당장 모습을 드러내라!"
살짝 도발해주고.
"{후후. 꼭 겁먹은 개새끼마냥 소리높여 짖는군}."
"네 이놈!!"
"{내 모습을 보고 싶다고 했나}."
여기선 압도적인 모습으로 겁을 준다.
모델은 과거에 플레이해봤던 게임의 기술을 모방한 하늘을 가득 채운 눈동자들.
"{내 모습이라면 지금도 보고 있지 않나}."
마지막으로 멋들어진 대사 한마디.
"{내가 곧 심연이니라}."
죽은자들의 왕. 마지막 페이즈. 세계 동화. 비욘드 더 어비스(Beyond The Abyss).
"{어때 이제 좀 잘 보이나}?"
"감히!!"
'오. 이건 좀 의왼데.'
이정도 했으면 알아서 스스로 무너지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흑탑주의 자존심이 생각보다 강한 것 같다.
'그렇다면 좀 더 임팩트 있는게....아. 그래 그거.'
얼마전에 봤던 기술을 한번 따라해보자.
"이이익!!"
"{흑마력은 그렇게 다루는게 아니지}."
실제로 흑탑주는 한계를 완전히 넘어서지 못해서인지 영역 자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닌 영역의 흑마력을 끌어다 마법의 위력을 올리는 것에 그치고 있었다.
"{일어나라}."
어떻게든 데스나이트의 통제권을 되찾아오려는 흑탑주를 다시 한번 도발해주고 어설픈 흑탑주와 달리 진짜 세계의 힘을 사용한다.
쿠구구구구궁.
사실 지금의 상태에서는 따로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된다.
지금의 나는 심연 그 자체.
팔다리를 움직이는 명령하고 움직이지는 사람은 없지 않나.
내가 의식하면 세계가 자연스레 행한다.
쩌저적.
흑탑주의 주력이 사령술인 것 같으니 시체를 활용.
내가 원하는 것은 전에 보았던 거인화한 현창식 같은 거인.
이내 완성된 것은.
쿵. 쿵. 쿵.
걸음마다 땅이 울리는, 시체들로 이루어진 거인.
김누리 오리지널. 거대한 죽음.
흑탑주는 자신의 데스나이트를 포함한 시체로 만들어진 거인을 보자 그제서야 모든 것을 내려놓았는지 허탈한 웃음을 짓는다.
더 발악했다면 죽이는데 조금 고생했을지도 모르지만 어째서인지 반항조차 하지 않는 흑탑주.
하지만 흑탑주가 반항하든 하지 않든 거인의 발은 멈추지 않았고.
쿵. 콰직.
신이 되고자 했던 남자의 최후치고는 허무한 결말이었다.
"...."
"...."
"...."
그 장면을 보고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입을 다문채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흑탑의 소속원들은 그 충격이 가히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으니.
".....우리의 신이...."
"어떻게...."
"아아...."
주로 가장 앞에 서 있던 수뇌부로 보이는 인물들 일부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지만.
"탑주가 죽었어?"
"진짜?"
"드디어...."
그 일부를 제외한 흑탑의 소속원들에게서 미묘한 열기가 느껴졌다.
'이렇게 보니 확실히 구분하기가 쉽군.'
죽여야 할 자들과 살려야 할 자들.
쿵. 쿵. 쿵.
누리의 의지에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하는 거대한 죽음이 흑탑원들을 향해 발을 내려찍었다.
쾅. 쾅. 쾅.
"으아아악!!"
"갑자기 왜!"
"커억!"
단 세번. 단 세번의 발걸음 전멸한 흑탑의 수뇌부들.
몇몇 마스터로 보이는 인물들이 반항을 했지만 이어지는 압도적인 질량의 폭력에 결국 한줌의 핏물이 되었다.
털썩.
바로 자신의 앞에서 죽어가는 상급자의 모습에 겁에 질린 채 주저앉는 흑탑원들.
콰과광.
그때 거인의 발아래에서 터져 나온 검은 폭발.
휘청. 쿵.
얼마나 강한 폭발이었는지 거대한 죽음마저 휘청거리며 한발 물러나게 되었다.
"커어억."
그곳에 서 있던 것은 바로 부탑주 알렉스.
괜히 부탑주가 아니라는 것인지 다른 장로들이 죽어나갈 때 혼자 살아남는 것에 성공했다.
'확실히 이걸 보면 마스터사이에서의 차이도 상당한 것 같군.'
장로중에서도 마스터의 경지가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모두 거대한 죽음의 질량에 반항하지 못했다.
"쿨럭."
물론 부탑주의 상태도 정상적이진 못했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던 누리는 동화를 해제하고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정체는 숨기기 위해 흑린갑을 두른 채로.
"너, 너는. 쿨럭. 누구냐."
"{방금 전까지 그렇게 나를 부르짖으며 찾지 않았나}?"
"설마...."
여기까지 이야기해줬는데 이해하지 못하면 병신이겠지.
"죽은자들의 왕?"
부탑주가 중얼거리는 순간.
"왕을 뵙습니다!"
""왕을 뵙습니다!""
흑탑의 소속원이 아닌 흑마력 사용자들 쪽에서 몇몇 흑마력 사용자들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바로 미리 불러둔, 진작에 누리에게 복종한 흑마술사들.
"어?"
"뭐, 뭔."
갑자기 주변의 사람들이 무릎을 꿇자 안 그래도 심연의 세계에 압도되어 패닉에 빠져있던 흑마력 사용자들은 주춤거리며 같이 무릎을 꿇었다.
패닉에 빠져있는 와중에도 저 검은존재를 향한 본능적인 두려움이 무릎 꿇는 것을 방해하지 못하게 했으니까.
쿵. 쿵.
시체로 이어진 거인 또한 누리에 무릎을 꿇었다.
"{선택해라}."
사실 탑주를 포함한 부탑주 장로들을 전부 죽이려 했지만 혼자서 살아남은 부탑주를 보고 또 변덕이 발동한 누리.
'가지고 싶다.'
"......"
누리의 말에 입을 다물고 무언가 고심하는 알렉스.
누리는 재촉하지 않고 천천히 기다렸다.
하지만 그 기다림조차 알렉스에겐 압박으로 다가왔으니.
"...한 가지. 약속해주실 수 있습니까."
그럼에도 곧바로 굴복하지 않고 조건을 내거는 알렉스의 모습에 오히려 더욱 그가 마음에 드는 누리.
"{뭐지}?"
"당신의 힘으로 다시는 우리가 핍박받지 않도록 해주실 수 있습니까?"
누리는 알렉스의 말에 그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분노, 절망, 회한.
여러가지 감정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두 눈을 보고있으니 만약 여기서 자신이 거절한다면 죽어도 무릎 꿇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좋다. 약속하지}."
털썩.
"왕을 뵙습니다."
털썩.털썩.털썩.
""왕을 뵙습니다!""
부탑주인 알렉스가 무릎을 꿇자 곧바로 따라 꿇는 흑탑원들.
흑탑의 일을 처리한 누리는 이번엔 각각의 단체에서 보낸 이능력자들을 바라보았다.
움찔.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초월적이 존재가 바라보니 본능적으로 몸을 떠는 이능력자들.
"{기억하라}."
그들을 바라보며 누리는 입을 열었다.
"{때가 다가왔으니}."
메인스토리의 시작이 몇 달 남지 않은 시점. 이제 슬슬 대비하게 해야겠지.
"{멸망은 망설이지 않고 그대들을 짓밟을 것이다}."
사실 여유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겁좀 줘야 빨리 움직일테니 좀 과장해서.
"{살아남으려거든 발버둥쳐라. 인간들이여}."
이정도면 충분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