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9 흑탑
흑탑이 무언가 발표한다고 했을 때도, 그리고 그곳에 소속원들을 보낼때도 이능집단의 수뇌부들은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흑탑이 절대 무시할만한 세력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저 흑탑에게는 교회라는 천적이 있기 때문에 딱히 신경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
무엇이든 흑탑이 미친 짓을 하면 교회에서 직접 나설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물론 발표장소에서도 미친 짓을 하지 말라는 법은 없기에 죽어도 상관없는 말단을 보내기는 했지만.
그들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그들의 말단들이 어떠한 소식을 가지고 올지는.
적당한 규모를 가지고 있는 어느 이능집단의 수장실.
수장은 매우 심각한 얼굴을 한 채 수하에게 보고를 받고 있었다.
"....조작의 흔적은?"
"믿기 힘들지만 없습니다."
"....그러면."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혹시 몰라 수하의 몸에 달아둔 보디캠.
그곳에 찍힌 내용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조작의 여부부터 확인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확인 결과 영상은 원본.
즉.
"저딴 괴물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영상에서 나온 죽은 자들의 왕을 자칭하며 알 수 없는 힘을 사용하는 흑탑주와 그런 흑탑주를 끔살해버린 시체거인,
그리고 시체거인을 만들어내고 흑탑을 복종시켜버린 '진짜' 죽은 자들의 왕.
결정적으로 멸망의 경고까지.
허투루 넘길만한 정보들이 아니었다.
만약 이 정보들이 사실이라면.
"... 교회에서 본격적으로 움직일지도 모르겠어."
폭풍이, 그것도 이능사회 전체를 뒤흔들만한 거대한 폭풍이 몰아칠 것이다.
그리고 정보를 얻게 된 대부분의 집단이 같은 판단을 하였다.
문제는 정작 교회에서 보낸 성기사가 초장부터 죽어버려 교회가 가장 늦게 정보를 얻게 되었다는 점.
이 점이 어떤 여파를 미치게 될지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하였고.
누리는 더더욱 자신의 말이 어떤 스노우볼을 굴리고 있는지 예상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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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탑의 사건이 있고 이틀 후. 누리는 지난 이틀간 흑탑을 수습했다.
우선 해결한 것은 흑탑의 금제.
부탑주를 제외한 흑탑의 전 인원에게 걸려있던 금제를 풀어 그들에게 자유를 주고.
떠나고 싶은 사람은 떠나도록 도와준다고까지 흑탑원들에게 공표했다.
하지만 떠난 흑탑원은 제로.
핍박과 차별에 질려 자의적으로 흑탑에 몸을 담은 사람은 누리 같은 초월자의 보호를 오히려 더 환영했고,
강제로 납치되어 끌려온 이들도 흑탑의 수뇌부를 죽이고 금제를 풀어준 누리가 구원자로 보였기에 없던 충성심이 절로 생겼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틀 전 보았던 누리의 힘.
그것을 직접 목격한 모든 흑마력 사용자들은 본능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힘이야말로 우리가 진정 따라야 할 '왕'이라고.
그렇기에 그 자리에 있던 흑탑 소속이 아닌 흑마력 사용자들도 전부 흑탑을 향했고 결국 흑탑의 규모가 대거 늘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부탑주를 중심으로 새로 조직도를 개편하였다.
두 번째로 해결한 것은 흑탑의 사업들.
이게 말만 사업이지 대부분이 인신매매, 마약, 테러 청부 등. 범죄 사업이었기에 이번 기회에 깡그리 정리했다.
다행인 것은 아마존 우림 한가운데에 있는 흑탑의 주변에는 마수가 들끓었기에 수익을 낼 방법은 충분히 있다는 점이려나.
그렇게 흑탑을 대충이나마 정리한 이후.
후룩.
"확실히 대단한 것을 보여주기는 했어."
차를 마시던 유시윤이 입을 열었다.
누리가 그녀의 대답을 듣기 위해 다시금 파불라 엑시티움의 임시본부에서 만남을 청했다.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인간 맞나?"
"몇 번이나 말씀드리지만 저는 인간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었든,
내가 사용하는 힘이 인간 같지 않든,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내가 그렇게 정했기에 나는 인간이다.
"....성수언이, 그놈이 왜 넘어갔는지는 이해가 돼."
유시윤이 보기에도 이 김누리라는 남자는 흥미롭기에 짝이 없었다.
이능력자들이 꿈에 바라고 마지않는 초월자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이기를 바라고,
자신을 포함한 천유가따위 씹어먹을 수 있는 힘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어떻게든 말로 설득하려 든다.
지금도 이틀 전 진짜 힘을 보여줬으니 적당히 협박을 섞어가면 훨씬 일이 수월해질 텐데.
"하지만 너를 돕는 것은 별개의 일이야."
공은 공, 사는 사. 그에게 전보다 흥미가 생긴 것은 사실이지만 흥미로 이끌고 있는 집단의 운명을 맡길 수는 없다.
성수언이가 미친놈일 뿐.
"이제 전 세계에서 알게 되었으니 오히려 더욱 조심해야겠지."
그렇다고 완전히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만약 멸망에 대한 그의 말이 맞다면 누리와 같은 절대강자와의 동맹은 매우 큰 도움이 될 터이니.
"하지만 나는 천유를 넘어 이 땅을 수호해야 하는 몸. 일단 의심하고 볼 수밖에 없는 내 입장을 이해해줬으면 좋겠어."
"걱정 마세요. 이해합니다. 천천히 생각해주세요."
어차피 급할 건 없다.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는 멸망에 대한 단어가 박혔을 테니 나름의 대비는 하겠지.
게다가 그녀의 말투가 달라진 것을 보면 어느 정도 호감을 사는 것도 성공한듯하니 지금의 관계도 썩 나쁘지 않다.
"아. 그러고 보니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무엇을?"
"흑탑주는 도대체 어떻게 넘어선 거지?"
완전하진 못했긴 해도 어설프게나마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분명 넘어섰던 흑탑주.
유시윤 그녀 또한 다음 경지를 간절하게 바라는 한 명의 이능력자로서 궁금증을 감출 수는 없었다.
"이 물건 덕분입니다."
툭.
그리 말하며 누리가 꺼내든 물건.
그것은 언뜻 보기에는 평범한 검은색의 보석으로 보였다.
"무언가 느껴지지는 않고... 유물인가?"
"네. 그런 듯싶습니다."
"흐음."
사실 누리는 이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게임 속 아이템의 형태로.
'처음 흑탑주를 봤을 때부터 설마설마했는데 진짜 일 줄이야.'
흑탑. 유물. 경지의 상승.
이 세 가지를 조합했을 때 누리의 머릿속을 스치고 간 아이템.
Superbia(슈페르비아).
유물 중에서도 태곳적에 만들어졌다고 전해지는 고대 유물 급 아티팩트.
한마디로 사용하면 강제로 레벨을 한 단계 높여주는 유니크 아이템.
이 검정색 보석의 정체였다.
슈페르비아라면 확실히 흑탑주의 경지를 강제로 높여주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게임 속의 레벨은 현실의 경지나 마찬가지 였으니까.
하지만 누리가 놀란 이유는 유물의 성능 때문이 아니었으니.
'분명 이 시점에서 출현하는 아이템이 아니다.'
메인 스토리 이후. 그것도 중반에서의 이벤트를 겪고 나타나는 아이템.
'그때도 흑탑주가 사용했었는데 왜 기억을 못 했나 했더니.'
게임 속 이벤트와 지금의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그때는 죽은 자들의 왕의 사칭 따위 하지 않으니까.'
메인 스토리에서의 이벤트는 사칭이 아닌 흑탑주의 폭주.
왜냐하면 흑탑주의 이벤트는 죽은 자들의 왕이 출현한 이후 시점에 발생하기 때문이다.
아마 예상컨데 죽은 자들의 왕이 출현해 흑탑주의 지위가 흔들리기 시작하고 그 와중에 미래 시점의 교회라면 지금보다 더욱 흑탑을 쪼아댈 테니 결국 참지 못한 흑탑주가 폭주한 것이겠지.
하지만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 이유는 아마도.
'나 때문이겠지.'
갑작스레 나타나서 테러를 일으키는 흑마술사를 가로채는 것으로 모자라 대놓고 흑마술사로 활동하니 숨어있던 흑마력 사용자들이 흑탑이 아닌 나에게 향했다.
그야 세력이 작더라도 나라의 협회에서 인정까지 받았으니 테러단체보다야 나을 테니까.
이러한 나의 행동들이 나비효과가 되어 흑탑주의 폭주가 사라지고 세력을 늘리기 위한 죽은 자들의 왕 사칭이라는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메인 스토리가 시작되기도 전에. 후후.'
직접 개입하지 않았음에도 메인 스토리가 점점 변하고 있다. 그것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멸망을 막아내되 메인 스토리를 망치는 것이 목표인 나로서는 매우 큰 호재이다.
"....흐음. 잘 모르겠군."
그사이 보석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던 유시윤은 포기하고 보석을 내려놓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특징도 없어. 효과부터가 심상치 않으니 함부로 기운을 집어넣을 수도 없고."
"보통 강제 도핑 아티팩트들은 페널티가 있으니 조심하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
"그렇긴 하지."
실제로 게임 속에서도 생명력. 즉 HP가 실시간으로 깎이는 페널티가 있으니 수명이라도 깎이면 큰일이다.
"그러면 네가 해보는 건 어때?"
"네? 저 말입니까? 하지만...."
'응? 잠깐.'
그녀의 말에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
페널티가 생명력이나 수명이라면 나는 상관없지 않을까?
기본적으로 불사를 가지고 있는 죽은 자들의 왕.
'불사와 생명력 페널티. 이것도 설정 공백으로 봐야 하나?'
게임에서 존재할 수 없는 보스몬스터의 아이템 장착.
"....그럼 한번 해볼까요."
갑자기 치솟는 자신감에 누리는 보석에 손을 대고는 흑마력을 일으켜 보았다.
슈우욱.
누리는 나중에 이 상황을 상기하며 이렇게 말하고는 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은 패망의 지름길이라고.